[딥리뷰] ‘순이삼촌’ 애끊는 보칼리제 울컥...서울 한복판서 제주4·3 아픔 노래했다

이틀 공연 6000명 몰리며 창작오페라 깊은 공감
강혜명·이정원·김신규·최승현·심기복·김성국 출연
현기영 원작의 현대사 비극 깊이있게 다뤄 호평

민은기 기자 승인 2022.09.06 20:16 | 최종 수정 2023.03.20 10:25 의견 0
소프라노 강혜명이 창작오페라 ‘순이삼촌’에서 열연하고 있다. ⓒ제주4·3평화재단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너무 슬프면 말문이 막힌다. 입 밖으로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도 ‘어어~’ ‘으으~’ ‘아아~’ 등의 중얼거림을 되풀이한다. 애를 끊는 엄청난 비통의 무게 때문에 언어를 잊어버린다. 어디 이뿐인가. 눈물도 사라진다. 온힘을 쥐어짜도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가슴을 쾅쾅 내리쳐도 꽉 막힌 구멍은 뚫릴 기미가 없다. 눈가에 물기라도 살짝 맺히면 조금 나으련만, 그 마저도 바싹 말라붙는다. 순이삼촌 역할을 맡은 소프라노 강혜명이 그랬다. 제주에서 ‘삼촌’이라는 호칭은 촌수 따지기 어려운 먼 친척 어른을 남녀 구별 없이 흔하게 부르는 명사다.

1948년 음력 섣달 열아흐레날(12월 19일)이다. 바다 건너 남쪽 끝 제주도지만 한겨울 매서운 추위가 몰아쳤다. 산속 동굴로 피신했던 순이삼촌은 마을에 남아있는 어린 딸과 아들을 데리러 왔다가 붙잡힌다. 중무장한 군인들이 운동장을 에워쌌다. 총칼의 무서운 기세에 짓눌려 극도의 공포감이 가득하다. 주민들을 대상으로 ‘분류’ 작업이 이루어진다. 군인·경찰·공무원 등의 가족은 이쪽으로, 그리고 그 나머지는 저쪽으로 옮겨간다. 저쪽으로 간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졸지에 빨갱이로 몰린다.

낙인찍힌 그들이 끌려간 곳은 제주시 조천면 북촌 일주도로변에 있는 4개의 옴팡밭(‘움푹 들어가 있는 밭’이라는 뜻의 제주 사투리)이다. 순이삼촌과 아이들도 그곳에서 벌벌 떨고 있다. 그 순간 탕탕탕 총소리가 들린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참혹한 학살이다, 이곳에서만 한날한시에 떼죽음 당한 사람이 300여명이다. 저 멀리 마을도 활활 불타고 있다. 삶의 터전도 아예 없애려 일부러 불을 질렀다.

소프라노 강혜명이 창작오페라 ‘순이삼촌’에서 열연하고 있다. ⓒ제주4·3평화재단 제공


며칠이 지났을까. 순이삼촌이 깨어났다. 총소리에 화들짝 놀라 혼절했는데, 눈을 떠보니 몸 위로 여러 명이 죽음이 겹쳐있다. 겨우 목숨을 건졌다. “아...우리 아이들은”하면서 손을 더듬어 시신 더미를 헤집는다. 싸늘한 주검을 찾았다. 생떼 같은 두 아이들이 숨져있다.

역시 강혜명이다. 가사 한줄 없이 그냥 ‘아아~’ ‘어어’ 모음으로만 이 장면의 아픔을 토해냈는데, 그 울림이 상상 이상이다. 두 아이의 시신을 본 어미의 심정을 표현한 보칼리제(Vocalise) 형식의 ‘광란의 아리아’다. 최정훈 작곡가에게 초연 때부터 주문했던 곡인데, 지난해에 새로 추가되면서 작품의 완성도 역시 업그레이드 됐다.

“자식의 죽음을 본 엄마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내가 울고불고 다 할 테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음악을 써줘요’라고 부탁했습니다. 너무 깊고 짙은 아픔이기 때문에, 이를 예술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작곡가가 무척 고생을 했어요. 저 때문에 ‘강혜명 가위’에 눌리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나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그 느낌으로 곡을 써달라’고 말했죠.”

강혜명과 최정훈 콤비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이제 2막일뿐인데 벌써 관객들의 목구멍을 타고 울컥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콧등이 찡하더니 여기저기 훌쩍 소리도 들린다. 순이삼촌은 실성하지 않고는 이 순간을 견딜 수 없었다.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 버금가는 ‘순이삼촌의 매드신(Mad Scene)’이 펼쳐졌다. 3막과 4막은 얼마나 더 처절할까. 나머지 공연을 어떻게 봐야할지 감당이 되지 않는다.

창작오페라 ‘순이삼촌’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되고 있다. ⓒ제주4·3평화재단 제공


제주시와 제주4·3평화재단이 만든 창작 오페라 ‘순이삼촌’이 서울 관객을 울렸다. 제주 4·3사건을 다룬 ‘순이삼촌’이 9월 3일과 4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됐다. 이틀에 걸쳐 모두 6000여명이 객석을 채웠다. 둘째 날 공연을 감상했다.

현기영의 중편소설 ‘순이삼촌’을 원작으로 한 이번 오페라는 2020년 제주도에서 첫선을 보였다. 지난해 제주도와 경기아트센터에서 재연한데 이어 올해에는 처음으로 서울에서 관객을 만났다.

제주 4·3사건은 1947∼1954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소요사태와 무력충돌 과정에서 일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무려 6만명이 숨졌다. 우리 현대사의 처절한 비극이다. ‘순이삼촌’의 배경이 된 북촌에서만 300여명이 숨졌다.

제주 출신의 소설가 현기영은 4·3사건이 발생한 지 약 30년이 지난 1978년 어린 시절 직접 보고 겪은 일을 엮어 ‘순이삼촌’을 펴냈다. 당시까지도 4·3사건은 언급이 금기시됐고 곧 금서로 지정됐다. 이 책 때문에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창작오페라 ‘순이삼촌’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되고 있다. ⓒ제주4·3평화재단 제공


‘순이삼촌’은 한국 창작 오페라의 가능성과 발전성을 동시에 보여줬다. 재미없고 지루할 것이라는 편견을 깨뜨렸다. 오페라의 기본 장르에 충실하면서도 시각적 이미지를 적절하게 믹스해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오페라의 예술적 힘이 위력을 발휘하면서 우리가 기억하고 공감해야 하는 역사의 길잡이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집단학살의 현장인 옴팡밭은 2막에 이어 3막과 4막에서도 중요한 장소로 활용됐다. 3막에서는 자식을 잃은 사건이 일어난 이듬해에 순이삼촌의 옴팡밭이 농사가 잘 되는 땅으로 나온다. 수확한 고구마가 목침 덩어리만큼 큼직큼직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송장거름을 먹은 덕분이라고 수군거렸다. 흉년이라 먹을 것이 없던 때였지만, 사람 죽은 밭에서 난 고구마라고 사먹지 않았다.

순이삼촌은 비극의 장소인 옴팡밭을 일구어 계속 농사를 지었다. 주위에선 흉흉한 땅이라고 입방아를 찧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순이삼촌은 아기구덕(제주도에서 아기를 재울 때 쓰는 바구니)을 지고와 옆에 두고 김을 맸다. 질긴 게 또 사람 목숨이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무서운 일을 겪었는데도 순이삼촌의 뱃속에 있는 아기는 살아있었다. “내 새끼들 이리 오라”하면서 죽은 아이들의 돌무덤을 어루만지며 부르는 노래는 숙연했다. 비록 저 세상으로 같지만, 자식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4막에서는 1979년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12월 18일)의 옴팡밭이 나온다. 싸리 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머리 희끗희끗한 순이삼촌이 밤색 두루마기에 토끼털 목도리를 한 정갈한 차림으로 밭으로 온다.

소프라노 강혜명이 ‘순이삼촌’이 열연하고 있다. ⓒ제주4·3평화재단 제공


“어진아, 오 내 아이들아,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길 바랐네. 아, 험악한 세상이 너희를 데려갔구나. 죄 없는 너희를 앗아가고 말았네” 자식을 먼저 앞세운 어미의 처절한 심정이 녹아 있는 ‘어진아’를 부른다. 제주에서는 ‘아기가 어질게 잘 자라라’는 뜻으로 어릴 때 어진이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애절함이 관객 가슴으로 훅 들어와 박혔다. 2막 보칼리제 아리아와 함께 이 작품의 시그니처 노래가 됐다.

자신이 일구는 밭에서 딸과 아들을 읽고 혼자 유령처럼 살아남은 순이삼촌은 깊은 회한에 잠기며 꿩약 싸이나(청산가리)를 입에 털어 넣는다. 이 장면에서 ‘탕’ 총소리가 들린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만, 순이삼촌은 이미 지난 30여년 전 그 학살 현장에서 이미 숨을 거뒀음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1000년 가도 잊지 못할 아픔을 견디며 살아온 어머니는 그렇게 자식 곁으로 간다.

현기영이 소설 속에서 이렇게 적었다. “삼십년이라면 그럭저럭 잊고 지낼 만한 세월이건만 순이삼촌은 그러지를 못했다. 흰 뼈와 총알이 출토되는 그 옴팡밭에 발이 묶여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오누이가 묻혀 있는 그 옴팡밭은 당신의 숙명이었다. 그렇다. 그 죽음은 한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삼십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삼십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삼십년의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바리톤 장성일이 창작오페라 ‘순이삼촌’에서 노래하고 있다. ⓒ제주4·3평화재단 제공

오페라는 4막으로 구성됐다. 테너 이정원이 프롤로그 독창자로 나와 ‘그날의 기억’(현기영 헌정곡)을 부르며 막이 올랐다. 1막에서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상수(테너 김신규 분)가 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8년 만에 고향 북촌으로 돌아온다. 상수는 큰아버지(바리톤 심기복 분)로부터 순이삼촌이 며칠 전에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 큰아버지는 ‘죽어도 벌써 죽었을 사람’이라는 아리아를 부르며 순이삼촌의 피맺힌 삶을 추모한다. ‘서북청년단’ 출신의 고모부(바리톤 김성국 분)는 “나 아니었으면, 이 집안 쑥대밭 됐을 것이다”라며 ‘엣세반공, 우리가 이땅의 주역’이라는 극우세력을 옹호하는 노래를 부른다. 가해자를 대표하는 캐릭터다. 상수보다 한 살 위인 사촌형 길수(테너 고세빈 분)는 그런 고모부를 못마땅하게 바라본다.

2막은 가장 잔인했던 1948년 북촌초등학교와 옴팡밭에서의 대학살 이야기다. 상수는 ‘예나제나 죽은 마을, 다시 이곳에’를 부르며 자신의 삶과도 질기게 이어져 있는 북촌의 비극을 들려준다.

3막은 자식을 잃은 어미의 절절한 마음을 표현한 순이삼촌의 내면 연기가 펼쳐졌다. 박연술의 진혼춤과 문석범의 퍼포먼스는 산 자와 죽은 자를 하나를 묶어 위로했다. 또한 순이삼촌의 심적 변화에 포커스를 맞춘 현대무용이 삽입돼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시각적 즐거움도 배려해 극의 몰입도를 높였다.

소프라노 강혜명과 메조소프라노 최승현이 창작오페라 ‘순이삼촌’에서 열연하고 있다. ⓒ제주4·3평화재단 제공

4막에서 순이삼촌은 결국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할머니(메조소프라노 최승현 분)의 아리아 ‘살아시난 다 살아진다’는 작품의 주제를 관통하며 뭉클함을 전달했다. 절망 속에서도 이 악 물고 살다보면 결국은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노래한다. 민초들의 강인한 삶이 읽혀졌다.

그리고 4·3사건의 전체 기간인 1948년부터 1953년까지 희생당한 사람들의 나이, 이름, 사망원인을 적은 영상이 자막에 비춰졌다. 특히 여섯 살, 일곱 살, 여덟 살, 아홉 살 등 나이 어린 희생자들이 너무 많아 마음이 무거웠다. 출연자 모두가 다함께 ‘이름없는 이의 노래’를 합창하며 막을 내렸다.

창작오페라 ‘순이삼촌’의 모든 출연자들이 합창하고 있다. ⓒ제주4·3평화재단 제공


원작자인 현기영 작가도 직접 내레이션으로 참가해 의미를 더했다.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누구 한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이 아픔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반드시 이들의 명예회복 등 해결해야할 숙제는 우리들의 몫임을 일깨워줬다.

강혜명이 연출·예술감독, 김수열이 대본·각색, 김홍식이 지휘를 맡았다. 제주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만큼 제주의 아들·딸들이 많이 참여했다. 제주교향악단, 제주합창단, 제주4·3평화합창단, 밀물현대무용단, 극단가람, 제주시뮤지컹아카데미, 메트오페라합창창단 등 모두 250여명이 힘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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