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송영훈·조재혁으로 구성된 ‘트리오인(Trio In)’이 1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라흐마니노프 시리즈 세 번째 공연에서 연주하고 있다.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팀 이름이 멋지다. ‘트리오인(Trio In)’이다. 항상 ‘음악 안에’ ‘청중 안에’ ‘우정 안에’ 있겠다는 다짐을 담았다. 2019년 바이올리니스트 김지연, 첼리스트 송영훈, 피아니스트 조재혁이 결성했다.
세 연주자의 실력은 이미 유명하다. 김지연은 스무 살에 에이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 상(미국에서 활동하는 전도유망한 젊은 연주자에게 주는 상)을 수상하고 지금껏 쉼 없이 세계무대에 오르고 있다. 송영훈은 클래식 레퍼토리 섭렵 후 크로스오버와 월드뮤직에까지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또 조재혁은 2021년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음반을 발매해 국제적으로 러시아 작품 해석의 적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들 세 사람이 뭉친 트리오인이 19세기 말 러시아 실내악의 매력을 선사했다. 바이올린을 켤 때마다 눈물 한 방울이 흘렀고, 첼로 선율에는 슬픔 한 숟가락이 묻어나왔다. 피아노 건반에서는 시리도록 아름다운 비애가 샘솟았다.
지난 1일 롯데콘서트홀. 클래식 음악 기획사 인아츠프로덕션이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 탄생 150주년을 맞아 기획한 라흐마니노프 시리즈 세 번째 무대를 장식했다. 라흐마노프의 피아노 트리오 2곡과 안톤 아렌스키의 피아노 3중주곡을 들려줬다.
김지연·송영훈·조재혁으로 구성된 ‘트리오인(Trio In)’이 1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라흐마니노프 시리즈 세 번째 공연에서 연주하고 있다.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공연에 앞서 조재혁이 무대로 먼저 나와 전체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그는 “러시아 작곡가들은 처음에 피아노 3중주를 선호하지 않았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세 악기가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논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차이콥스키-아렌스키-라흐마니노프를 거치면서 실내악의 골격을 만들어 갔고, 자신의 내면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은밀한 음악언어로 피아노 트리오를 받아 들였다”고 설명했다.
조재혁은 “오늘 연주할 세 곡은 누군가를 기념하고 애도하고 기리는 곡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두 곡은 차이콥스키를, 아렌스키의 곡은 다비도프를 추억하며 만들었다. 살짝 무겁게 느껴지는 작품들이지만 각자 기억하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며 감상하면 좋다”고 팁을 알려줬다.
김지연·송영훈·조재혁으로 구성된 ‘트리오인(Trio In)’이 1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라흐마니노프 시리즈 세 번째 공연에서 연주하고 있다.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트리오인은 첫 곡으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의 피아노 트리오 1번 g단조 ‘애가(élégiaque)’를 연주했다. 1892년 1월 라흐마니노프는 모스크바에서 정식 데뷔 음악회를 열었는데, 그 당시 열아홉 살 파릇파릇한 청년이 야심작으로 선보인 곡이다.
이 곡에는 두 가지 창작동기가 작용했다. 먼저 라흐마니노프의 개인적 경험이 오선지를 들게 했다. 실패한 인생을 산 아버지 때문에 이리저리 흘러 다니듯 보내야 했던 유년 시절을 포함해 어린 소년이 몸으로 뼈저리게 느낀 비애감이 고스란히 음표로 표출됐다. 거기에 더해 ‘대선배’ 표토르 차이콥스키(1840~1893)를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그의 피아노 트리오 a단조(Op.50)를 흉내 냈다. 차이콥스키는 절친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피아노 3중주를 만들었는데, 그 첫 번째 악장의 제목 ‘pezzo elegiaco’에서 이름을 빌려와 ‘élégiaque(애가)’라고 타이틀을 달았다.
첫머리의 주제 네 음은 차이콥스키의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첫 모티브를 뒤집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반적인 진행 역시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트리오 1악장과 많은 부분이 닮았다. 단악장이지만 10대 시절 라흐마니노프의 독특한 아이디어를 담고 있으며, 12개의 에피소드가 나열식으로 등장하면서 소나타 형식의 얼개를 갖추고 있다.
송영훈의 첼로와 김지연의 바이올린이 만든 음의 물결 위로 조재혁의 피아노가 몸을 맡기자, 세 악기는 각자의 아픔을 드러내며 울었다. 안으로 안으로 삼키던 슬픔은 어느새 한꺼번에 밖으로 왈칵 터졌다. 짙은 비애감의 첫 주제를 제시한 뒤, 두 번째 주제에서는 한결 여유롭고 풍성한 정서를 전달했다. 환상곡풍으로 자유롭게 펼쳐지는 짧은 전개를 거쳐 나오는 재현부에서는 악기 간의 역할을 바꿔 모티브를 강조했고, 마지막은 장송곡풍으로 마무리했다.
‘트리오인(Trio In)’의 바이올리니스트 김지연이 1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라흐마니노프 시리즈 세 번째 공연에서 연주하고 있다.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두 번째 곡은 안톤 아렌스키(1861~1906)의 피아노 트리오 1번 d단조(Op.32). 러시아의 실내악 작품 가운데 ‘숨은 명품’을 언급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곡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배운 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가르치기도 했던 아렌스키는 시기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를 이어주는 음악가였다.
이 곡은 최고의 러시아 첼리스트였던 칼 다비도프를 기리기 위해 헌정됐다.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인 아렌스키의 작품답게 피아노가 전곡을 주도하지만, 러시아인 특유의 어둑하면서 풍성한 양감이 느껴지는 두 현악기의 선율미와 뉘앙스 역시 훌륭하다.
알레그로 모데라토 템포의 1악장은 묵직한 우수와 동경을 담은 두 주제가 부드러운 모양으로 어우러지며 흘렀다. 제시부의 코데타(‘코다’보다 작은 형태의 종결구) 부분은 피아노의 활약을 통해 오케스트라적 음향을 과시했고, 아다지오의 지시어가 붙은 마지막 종결부는 첫 주제를 쓸쓸히 추억했다. 2악장은 스케르초다. 알레그로 몰토의 가벼운 느낌이 지나가자 빠르게 도약하는 현악기의 멜로디와 이를 강조하고 장식하는 피아노의 패시지가 절묘하게 이어진다. 중간부의 왈츠 리듬은 러시아적인 스케일을 드러낸다.
애가풍의 3악장은 매우 무거운 분위기의 장송곡이다. 흐느끼듯 노래하는 현악기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피아노의 몽환적인 아르페지오로 시작되는 중간부는 다소 밝은 분위기며 여러 번의 전조가 이루어져 다채롭다. 피날레 4악장은 알레그로 논 트로포. 비장미와 드라마틱한 전개가 인상적인 론도 형식이다. 긴박감을 주는 1주제와 소박한 아름다움의 2주제가 대조를 이루는 부분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전곡을 마무리하기 전 3악장의 중간부 주제, 그리고 1악장의 첫 주제를 다시 끄집어내 통일성을 꾀하는 모습이 작품의 무게감을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트리오인(Trio In)’의 첼리스트 송영훈이 1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라흐마니노프 시리즈 세 번째 공연에서 연주하고 있다.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마지막 곡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트리오 2번 d단조 ‘애가(Op.9)’. 이 곡은 자신보다 나이가 33세 더 많았던 차이콥스키에 대한 깊은 리스펙트에서 출발했다. 라흐마니노프는 스무 살 때인 1893년 10월 기차역에서 차이콥스키를 우연히 만났다. 그곳에서 작곡에 대한 조언과 함께 자신의 모스크바 음악원 졸업작품인오페라 ‘알레코’에 대한 격려의 말을 들었다. 차이콥스키는 자신과 다른 행선지로 떠나는 후배에게 “이제는 자네와 내가 이렇게 각자 다른 곳으로 연주를 다니는 동료 작곡가로군”이라는 말로 간접적인 칭찬을 했다. 라흐마니노프에겐 결코 잊을 수 없는 최고의 날이었다.
그리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차이콥스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라흐마니노프에게 깊은 충격을 안겨줬다. 그래서 마침 막 곡을 쓰기 시작했던 자신의 두 번째 피아노 트리오를 차이콥스키에게 바치겠다고 결심한다.
작품의 분위기와 구성을 차이콥스키가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피아노 삼중주 a단조(Op.50)와 비슷하게 맞췄다. 또한 자신의 피아노 트리오 1번과 마찬가지로 ‘애가풍의 트리오(Trio élégiaque)’라는 제목을 붙였고, ‘위대한 예술가를 추억하며’라는 부제가 더해져있다. 이 역시 차이콥스키의 작품 스타일을 따르려 한 것이다. 이처럼 두 작품에는 위대한 예술혼의 흐름을 음악을 통해 전하려는 작곡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트리오인(Trio In)’의 피아니스트 조재혁이 1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라흐마니노프 시리즈 세 번째 공연에서 연주하고 있다.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모데라토로 시작되는 1악장은 정열적이면서도 깊은 슬픔에 잠겨 있다. 하행하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등장하는 주요 주제는 한숨과 흐느낌을 묘사한다. 피아노가 활기찬 리듬형을 제시하며 등장하는 부주제 역시 환희보다는 슬픔에 가깝다. 그 후 등장하는 두 번째 주제는 부드러운 피아노 아르페지오 위에서 노래한다.
변주곡 구성의 2악장은 피아노가 주도적으로 활약하며 잦은 조바뀜과 템포 변화가 흥미롭다. 주제는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시 ‘바위’에서 가져왔다. 우아하면서도 어딘지 고독함이 풍긴다. 모두 여덟 개의 변주로 이루어져 있다. 아르페지오 위에서 진행되는 자유로운 변형(1변주), 피아노 독주로 환상곡풍의 진행(2변주), 아라베스크풍의 피아노 장식(3변주), 녹턴풍의 흐름(4변주), 반음계적 진행과 화려한 악구(5변주), 강한 에너지가 뿜어 나오는 행진곡풍(6변주), 레치타티보적 분위기(7변주), 다양한 조옮김과 평온한 코다(8변주)로 꾸며져 있다.
작품의 에너지를 다시 충전해 3악장 피날레로 이어졌다. ‘와일드 조재혁’이다. 격정적 분위기의 피아노 카덴차로 시작해 점차 그 리듬을 타이트하게 조절해 만들어 내는 마지막 변주는 동일한 모티브를 서로 주고받듯 연주해 대위법적 진행을 보였다. 감성의 폭을 최대한 넓힌 세 악기는 땅을 울리듯 강력한 피아노의 연타로 시작해, 최초의 주제를 비극적 정서를 듬뿍 안은 채 다시 연주했다. 첫머리의 멜로디가 다시 등장하는 수법은 차이콥스키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이는 라흐마니노프가 거장에게 보낼 수 있는 최대의 찬사였고 트리오인은 그런 마음을 잘 담아냈다. 세 사람은 조용한 클로징으로 마무리했다. 50여분을 달려온 모든 음은 이미 멈췄지만 오랫동안 얼음 상태를 유지했다. 공기 중에 혹시라도 떠도는 음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감상하라는 배려다. 혹시 추모하고 싶은 누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그 사람을 생각하라는 따뜻함이다.
트리오인은 공연을 마친 후 몇 차례 커튼콜에 응한 뒤 김지연과 송영훈이 각각 마이크를 들고 관객에게 감사 인사말을 건넸다. 김지연은 울컥 눈물을 보였고, 송영훈은 살짝 목이 메었다. 그리고 앙코르곡으로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를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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