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3층에서도 보였던 등과 팔의 잔근육...안네-소피 무터의 힘은 ‘자기관리’

5년만의 내한 리사이틀서 ‘바이올린 여제’ 실력 발휘
슈베르트 환상곡·레스피기 소나타 등으로 감동 선사

서울 머무는 동안 봉은사 매일 방문하며 심신 힐링
​​​​​​​떡튀순·비빔밥 사진 SNS에 올리며 한국사랑 내비쳐

민은기 기자 승인 2024.03.15 18:10 | 최종 수정 2024.03.18 10:46 의견 0
바이올리니스트 안네-소피 무터가 피아니스트 램버트 오키스와 공연을 마친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무터는 점점 더 우아하고 아름다워진다. 등과 팔의 잔근육들 움직임에서 철저한 자기관리를 엿볼 수 있었다.”(음악평론가 류태형)

안네-소피 무터가 2019년 이후 5년 만에 한국 리사이틀로 팬들을 만났다. 13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올해 61세(1963년생)의 바이올리니스트는 흐트러짐 없는 연주로 “역시 바이올린 여제!”라는 찬사를 받았다.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어갈수록 몸의 근육은 점점 빠져 나간다. 어쩔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다. 하지만 무터는 류태형 평론가(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의 말처럼, 탄탄한 근육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일부 팬들은 “3층에서도 근육이 보일 정도였다”고 감탄했다.

무터는 공연 내내 ‘수직 보잉(Bowing)’을 뽐냈다. 활을 가장 아래부터 위까지 모두 길게 쓰면서도, 끝까지 수직으로 그었다. 깊고 넓은 한결같은 소리의 비밀은 ‘자기관리 끝판왕’의 근육에서 시작됐음을 관객들도 눈치 챘다.

첫 곡으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 18번 G장조(KV.301)’를 연주했다. 2악장 구성의 짧은 곡이지만, 소프라노 알로이자 베버에게 홀딱 빠져 있는 시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인지 사랑의 기쁨과 애틋함이 가득하다.

뜀 뛰듯 경쾌하고, 인형 보는듯 예쁘고 귀여운 1악장을 거쳐 2악장이 펼쳐졌다. 발랄하고 밝은 분위기의 미뉴엣이다. ‘사랑하는 알로이자와 춤추는 상상을 하며 작곡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금빛 감도는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무터의 옷차림도 상상의 날개를 부추겼다.

피아노 반주를 맡은 램버트 오키스는 78세(1946년생)다. 무터와는 열일곱 살의 나이차다. 1988년부터 호흡을 맞췄으니 올해로 36년째 든든한 파트너로 함께 하고 있다. 두 번째 곡을 연주하기에 앞서 다정스러운 단짝 모습이 포착됐다.

오키스가 피아노 앞에 앉자 연미복 꽁지 부분이 의자 위로 삐죽 튀어나왔다. 이를 본 무터가 가지런히 정리해주자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를 눈치 채지 못한 오키스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어리둥절 표정을 지어 정겨웠다. 마치 아버지와 딸의 모습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안네-소피 무터가 피아니스트 램버트 오키스와 공연을 마친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두 번째 곡은 프란츠 슈베르트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C장조(D.934)’. 피아니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 모두에게 난곡으로 꼽히는 곡이다. 무터 역시 그렇게 말할 정도로 만만찮은 곡이다.

호수에 햇살이 반짝이듯 빠르게 움직이는 피아노 연주로 시작해, 곧 바이올린이 아름다운 노래를 더해 지난날 아름다웠던 추억으로 안내했다.(1악장) 분위기를 바꿔 랩소디 풍의 경쾌하고 화려한 연주를 들려줬다. 주제 선율을 두 악기가 대화하듯 이끌어갔고, 돌림노래로도 진행하는 등 다양한 악곡 진행을 보여줬다. 피아노가 중간에 독주를 펼칠 때, 무터는 왼손을 풀어줬다.(2악장)

3악장은 슈베르트 가곡 ‘당신에게 인사를 보냅니다(D.741)’에서 힌트를 얻은 선율을 활용한 변주곡이다. 하나의 테마가 여러 개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파노라마 사진처럼 펼쳐졌다. 4악장은 템포 프리모-알레그로 비바체-알레그레토-프레스토로 숨 가쁘게 흐르며 힘찬 피날레로 마무리됐다. 무터와 오키스는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수고 했어요” 격려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무터는 1976년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데뷔했다. 열세 살 때다. 천재성을 알아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에게 발탁돼 오디션을 봤고, 카라얀이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에서 협연(1977년)했다. 그리고 1978년 카라얀 지휘로 베를린 필과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3번과 5번을 녹음했다. 도이치 그라모폰에서의 첫 레코딩이었다. 열다섯 살 소녀의 스타 탄생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열다섯 소녀가 환갑을 넘기는 동안 음악적 슬럼프가 없었다는 점이다. 내면의 슬럼프가 없었을 리는 없지만 최소한 겉으로 드러난 것은 없었다. 스물다섯 살, 한창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 가던 시절 한 남자를 만났다. 무터보다 스물일곱 살 더 많은 금융변호사 테틀리프 분덜리히와 결혼해 두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지냈다. 하지만 결혼생활 6년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놀랍게도 무터는 장례를 치른 다음 달부터 연주여행을 떠났다. 나중에는 지휘자 겸 작곡가 앙드레 프레빈과 재혼했다. 음악으로 험난한 세월을 헤쳐 나간 것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안네-소피 무터가 피아니스트 램버트 오키스와 공연을 마친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클라라 슈만의 ‘세 개의 로망스(Op.22)’는 아버지(프리드리히 비크)의 반대를 뚫고 로베르토 슈만과 결혼에 골인한 클라라의 행복했던 시절이 녹아있는 작품이다. 촉망받는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요제프 요하임에게 헌정됐고 그가 직접 초연했다. ‘세 개의 로망스’는 6년 만에 끝난 무터의 결혼 시절이 오버랩됐다.

첫 곡(매우 느리게)은 우아한 아르페지오가 만발하는 피아노 반주에 바이올린이 꿈꾸듯 아름다운 음을 풀어 놓았다. 편안한 분위기 뒤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애달픈 표정도 살짝 엿보인다. 두 번째 곡(조금 빠르게)은 방긋 웃게 만들었다. 두 악기가 감미롭게 대화를 나눴다. 세 번째 곡(빠르게 열정적으로)은 사랑스러웠다. 리듬이 이끄는 피아노 위에서 바이올린이 호흡이 길고 유려한 선율을 연주했다.

마지막 곡은 관현악곡 ‘로마 3부작’으로 유명한 오토리노 레스피기의 ‘바이올린 소나타 b단조(P.110)’. 대중적인 레퍼토리는 아니지만 무터는 이 곡에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2016년 내한공연에서도 연주한 적이 있다. 그는 특유의 거칠거칠한 보잉과 비브라토, 낭만적인 루바토와 격정적인 다이내믹으로 풀어냄으로써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이 곡의 매력을 전달했다.

비밀을 간직한 듯 음습하게 1악장이 시작됐다. 선율은 자유로운 리듬을 타고 발전하며 두 악기는 직물을 짜듯 얽히며 진행됐다. 피아노의 찐매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몸을 뒤로 젖히고 왼손을 둥글게 허공 속에서 휘젓는 포즈는 베테랑의 모습이다. 열정이 가득 찬 대단원에 이른 후 평온하게 마무리됐다.

2악장은 화사하고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가 스타트를 끊었다. 하지만 바이올린이 등장하면서 점차 어두운 분위기로 변해가고, 곧 다시 밝아지기를 반복한다. 쓰디쓴 현실 속에서 좋은 날의 아련한 기억이 떠오르는 듯하다. 무터의 바이올린은 공기 속으로 끊임없이 소리를 흩뿌렸다. 강렬한 열정도 내비치지만, 갈등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차분하게 마무리했다.

3악장은 먼저 피아노가 매우 중후하고 엄숙하게 저음 주제를 제시했다. 그리고 바이올린이 더해져 피날레에 걸맞은 속도감과 에너지로 화려하게 변주한다. 서정적인 중간 부분에서 잠시 숨을 돌린 뒤, 다시 첫 부분의 분위기로 돌아온다. 기교적인 피아노의 활약이 돋보이며 장중한 막바지로 돌진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안네-소피 무터가 피아니스트 램버트 오키스와 앙코르를 연주하기에 앞서 곡을 설명해 주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앙코르도 깜놀이었다. 무려 4곡을 선물했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1번’, 존 윌리엄스의 ‘신데렐라 리버티’ 주제곡 중 ‘Nice to be aroud’,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2번’, 윌리엄스의 ‘쉰들러 리스트’ 테마의 순으로 연주했다. ‘헝가리 무곡 1번’ 연주를 끝마침과 동시에 활의 줄이 하나 끊어져 나풀나풀 날리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마지막 앙코르 ‘쉰들러 리스트’는 깊은 감동을 안겨줬다.

무터는 마이크 체질이었다. 앙코르 4곡 모두 친절한 해설을 덧붙였다. 청중과 다양하게 소통하려는 시도다. 오키스와의 특별한 인연을 강조하기도 하고, 자신이 세운 ‘안네-소피 무터 재단’에서 세계 각국의 젊은 연주자들을 후원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는 한국인(바이올리니스트 최예은)도 있다거나, 존 윌리엄스에게 생강 쿠키를 선물로 보내고 답신을 받을 일화 등을 소개해 웃음을 안겨줬다.

무터는 공연을 마친 뒤 오키스와 함께 사인회도 진행했다. 손에는 자신의 명기 스트라디바리 ‘로드 던 레이븐’을 들고 있었다. 드레스 옷차림만 봤는데 스키니 진에 킬힐을 신은 모습도 이채로웠다.

류태형 평론가는 “모차르트, 슈베르트, 클라라 슈만은 비브라토를 과하게 사용해 너무 많이 울어버린 올드 패션에 가까웠다”면서 “레스피기 소나타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찐득하고 두툼한 연주였다. 오키스의 섬세한 피아노도 일품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앙코르 브람스 헝가리 무곡 1번 2번은 독일 바이올린 스쿨의 계승자다운 연주를 들려줬고, 대미를 장식한 ‘쉰들러 리스트’ 주제음악은 깊은 감동을 던져주었다”고 말했다.

안네-소피 무터가 광주 공연을 마친 뒤 떡튀순을 먹는 사진을 SNS에 올렸다. ⓒ안네-소피무터 페이스북 캡처


<백브리핑> ‘에너자이저’ 안네-소피 무터다. 그는 지난 3일 대전공연을 마친 뒤 대만에서 세 차례 공연을 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12일 광주 공연을 마치고 13일 서울 공연도 마무리했다. 무엇 하나 허투루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피곤할 법도 한데 한국에 머무는 동안 매일 강남의 봉은사를 방문했다. 심신 힐링 코스였던 셈이다. 심지어 대전과 광주를 가기 전에도 들렀다. 광주 공연을 끝내고는 떡튀순을 대기실에서 먹는 사진을 SNS에 올렸고, 예술의전당 공연을 마친 뒤에는 마지막 비빔밥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5년 만에 다시 방문한 한국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음을 인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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