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조소프라노 이아경이 데뷔 30주년을 맞아 오는 3월 25일 기념 콘서트 ‘마이 웨이(My Way)’를 연다. ⓒSMI엔터테인먼트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걸어갈 길’을 보여주는 무대입니다. 그래서 공연 타이틀도 ‘나의 길’로 달았습니다.”
‘메조의 전설’ 이아경이 데뷔 30주년을 맞아 오는 3월 25일(화)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기념 콘서트 ‘마이 웨이(My Way)’를 연다.
그는 1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노래 하나만을 생각하며 성악의 길을 올곧게 걸어왔다고 생각한다”면서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도와주신 분들, 그리고 제가 다시 도와야 할 분들을 위한 시간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커리어 30년의 품격이 느껴지는 멘트다.
20주년 콘서트도 의미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인 러브’라는 제목으로 소프라노 박미자·오미선·강혜정, 테너 이영화·나승서, 바리톤 강형규·한명원 등 한국을 대표하는 성악가들이 대거 힘을 보탰다.
그는 “2015년 공연이 오케스트라 반주로 동료들과 함께하는 축제였다면, 이번 콘서트는 저와 피아니스트 두 사람의 울림을 전달해 관객들이 함께 호흡할 수 있도록 기획했다”며 “10년이 지났으니 더욱 큰 책임감을 가지고 ‘마이 웨이’하겠다”고 밝혔다.
그의 오페라 데뷔는 갑자기 찾아왔다. 1995년 국립오페라단이 공연한 잔 카를로 메노티의 ‘무당’에서 주인공 마담 플로라를 맡았다. 제목에서 나타나듯 미스터리한 내용의 현대 오페라였다. 대학 졸업 후 인천시립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할 때였다.
“당시 국립오페라단 박수길 단장께서 합창단원 정기평가 외부 심사위원으로 오셨어요. 노래를 듣고는 ‘주인공 메조소프라노를 못 찾아 고민하고 있었는데, 바로 여기에서 만났네’하면서 캐스팅을 해주셨어요. 다양한 감정 표현 스킬에 눈을 떴죠.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주인공으로 빙의해 헛것을 본 것처럼 놀라는 표정을 짓기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메조소프라노 이아경이 데뷔 30주년을 맞아 오는 3월 25일 기념 콘서트 ‘마이 웨이(My Way)’를 연다. 왼쪽은 피아노 반주를 맡은 김도석. ⓒSMI엔터테인먼트 제공
합창단원에서 하루아침에 프리마돈나로 업그레드했다. 이게 사다리가 됐다. 자신감이 붙자 여러 오디션에 지원해 배역을 따냈다. 6~7년 동안 국내 무대를 누볐다. 그런데 주위에서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외국에 나가 공부를 하고 오면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다. 언젠가는 유학을 다녀오지 못해 속상한 일을 겪을 수도 있다”고 조언을 해준 것.
그래서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001년, 남들보다 훨씬 늦은 서른한 살 때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다행히 혼자가 아니었다. 든든한 아군이 함께 했다. 오페라 연출가를 꿈꾸는 남편 이의주 씨가 옆에 있었다.
“1년 동안은 숫기 없이 학교만 다녔어요. 그런 풀죽은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는지 남편은 늘 파이팅을 북돋워줬어요. 서툰 피아노였지만 반주를 맞춰 주며 용기를 심어줬죠. ‘아경! 이제부터 콜로라투라라고 생각해. 스타카토를 연결해 레가토로 나가봐’라며 항상 어드바이스를 해줬어요. 그러면서 ‘가서, 이기고 와’라고 세상 속으로 나가도록 이끌어줬어요.”
거침없이 질주했다. 한국인 최초로 제34회 벨리니 성악 콩쿠르 우승을 비롯해 6개의 국제 콩쿠르에서 단독 1위를 석권하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메조소프라노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다니엘 바렌보임, 정명훈, 얍 판 츠베덴, 카를 시숑 등 거장들과의 협연은 물론 오페라 ‘아이다’ ‘삼손과 데릴라’ ‘돈 카를로’ 등 수십 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일까. 유학을 가기 전 출연했던 윤이상의 ‘심청’ 초연이란다. 그는 “뺑덕 역을 맡았다. 뺑덕의 성격과 감정을 말하듯이 자연스럽게 표현해야 하는 부분, 어려운 박자 나누기, 위아래를 오가는 폭넓은 음역을 커버하는 기술 등 모두 신선하고 충격적인 경험을 한꺼번에 했다”고 털어 놓았다. 남편은 이때 조연출로 참여했다. 심봉사가 눈뜨듯 사랑에 눈을 떴고, 평생의 짝을 만났으니 고마운 심청이다.
메조소프라노 이아경이 데뷔 30주년을 맞아 오는 3월 25일 기념 콘서트 ‘마이 웨이(My Way)’를 연다. ⓒSMI엔터테인먼트 제공
2003년 벨리니 콩쿠르 우승은 나름 ‘미러클’이었다. 대진운이 안좋았다. 손해 본다는 마지막 순서였다. 긴 기다림 끝에 밤 12시에 무대에 섰다. 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에 나오는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Mon coeur s’ouvre à ta voix)를 불렀는데 청중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심사위원들도 놀란 표정이었다. 그는 “노래도 결국 상호작용이다. 실력도 중요하지만 관객들과의 긴밀한 교감에서 오는 환호가 우승을 만들었다”며 공감의 중요성을 깨우친 밤이었다고 고백했다.
유럽의 내로라하는 극장의 러브콜을 뒤로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2010년부터 모교 경희대 성악과 교수로 부임해 후배들을 키우고 있다. 소프라노 조수미는 세계무대에서 활약해야 하는데 일찍 한국으로 들어온 이아경에게 “지금까지 만난 메조소프라노 중 이렇게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아깝다”고 말했다.
후회는 없다. 풍성한 음악적 환경에서 자라지 못하다가 대학에 와서야 비로소 성악의 깊이와 매력을 알게 됐기 때문에, 후배들에게 자신이 누리지 못한 좋은 백그라운드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는 “어렸을 때 꿈은 수녀나 간호사였다”며 “이제 누군가를 어시스트해 빛나게 해주는 역할이 훨씬 더 멋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30주년 콘서트에서 이아경은 피아니스트 김도석과 케미를 맞춘다. 두 사람은 2018년 슈만의 ‘여인의 사랑과 생애’ 음반 발매 기념 콘서트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김도석은 오랫동안 품었던 생각을 드러냈다. 그는 “반주자로서 평생 마음에 맞는 세 명의 성악가를 만나면 행운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중 단연 첫 손가락은 이아경 선생이다”라며 “한 가지 꿈이 있다면 메조소프라노가 노래하는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해보고 싶은데, 그 주인공이 이아경이었으면 좋겠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이아경은 “전 아직 동의하지 않았다”고 재치 있게 말해 웃음을 안겨줬다.
메조소프라노 이아경이 데뷔 30주년을 맞아 오는 3월 25일 기념 콘서트 ‘마이 웨이(My Way)’를 연다. ⓒSMI엔터테인먼트 제공
이번 공연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사계절 콘셉트로 진행한다. 그 앞과 뒤에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배치했다. 평소 인생은 사계절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진부하지만 한 번은 꼭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다.
“사계절에 빗대 성악을 처음 시작할 때 다룰 수 있는 곡을 봄에 넣었고, 제 음악이 무르익어 가면서 했던 곡들로 여름을 장식하고, 가을에는 음악적으로 더 성숙하게 해준 곡들을 배치했어요. 겨울은 마지막이기도 하지만 봄을 기다리는 처음이기도 하니 30년을 걸어온 만큼 앞으로 더 걸어가겠다는 의미를 담은 곡들로 준비했어요.”
이런 흐름에 맞춰 슈베르트의 가곡 ‘음악에(An die Musik)’로 시작해 조르다니의 ‘오, 내 사랑(Caro mio ben)’, 비제 오페라 ‘카르멘’에 나오는 ‘하바네라(Habenera)’, ‘삼손과 데릴라’ 중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커티스의 ‘물망초(Non ti scordar di me)’ 등을 들려준다. 마지막에는 ‘마이 웨이(My Way)’로 끝을 맺는다.
한국 가곡도 눈에 띈다. ‘또 한 송이의 나의 모란’(김용호 시·김진균 곡) ‘님이 오시는지’(박문호 시·김규환 곡) ‘누군가 내 마음을 적시네’(이월하 시·김도형 곡)를 부른다. 메조소프라노는 테너와 소프라노에 비해 소프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극한 파트다. 하지만 첼로 선율처럼 중심을 잡아주는 중요 파트다.
“편안하게 제 음악을 들어주세요. 커피 한 잔하면서 대화하듯 즐겨주세요. 저와 가까이 호흡할 수 있는 콘서트, 저의 울림이 그대로 관객 가슴으로 전달되는 시간이 목표입니다.”
/park72@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