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합창단이 류재준 작곡가의 ‘미사 솔렘니스’를 세계 초연하고 있다. 왼쪽부터소프라노 이명주, 알토 김정미, 테너 국윤종, 베이스바리톤 김재일. ⓒ국립합창단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소프라노 이명주가 “Agnus Dei(그의 어린양)”라고 노래했을 뿐인데 살짝 콧등이 찡하다. 투명한 얼음장 밑을 흐르는 맑은 물을 닮은 목소리가 하늘에 닿았다. 뒤를 이어 알토 김정미가 똑같이 “Agnus Dei(그의 어린양)”이라고 되풀이하자 눈물도 찔끔 나온다. 가사는 똑같지만 음의 높이가 다르니 이렇게 느낌이 색다르다.

테너 국윤종과 베이스바리톤 김재일이 “Miserere nobis, Qui tollis peccata mundie, miserere nobis(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뒤를 받쳐주자 웅장함 속 섬세함이 반짝인다. 뜨거운 것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비집고 나온다.

윤의중 단장이 이끄는 국립합창단·시흥시립합창단이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춰 “donna nobis pacem(우리들에게 평화를 주소서)”이라고 온마음으로 노래하자 절정으로 치닫는다. 솔리스트 4명도 가세했다.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고통이 하늘의 빛에 떠밀려 자취를 감춘다. ‘아뉴스데이’가 모두 마무리되자 평화가 찾아온다.

오랜만이다. 작곡한 사람도, 연주한 사람도, 듣는 사람도 모두 설렜다. 작곡가 류재준의 ‘미사 솔렘니스(Missa Solemnis)’가 세계 초연됐다. 80분짜리 대작이다. 지난 3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2023 국립합창단 여름합창축제’에서 첫선을 보였다.

작곡가 류재준(오른쪽)이 자신이 작곡한 '미사 솔렘니스' 세계 초연을 마친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베이스바리톤 김재일, 알토 김정미, 소프라노 이명주, 류 작곡가. ⓒ국립합창단 제공


그동안 류재준이 보여준 성취는 놀랍다.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가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실력을 뽐냈다. 이번에 선보인 ‘미사 솔렘니스(장엄미사)’도 그의 대표작 목록 상위에 랭크될 정도로 찬사를 받았다.

키리에(자비), 글로리아(영광), 크레도(고백), 상투스(거룩), 아뉴스데이(그의 어린양)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장엄미사의 전례 순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노랫말도 중세시대부터 미사에 쓰인 텍스트를 그대로 가져왔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 의식을 목적으로 한 기능음악은 아니다. 19세기부터 작곡가들은 미사라는 음악 장르를 종교의 범주를 뛰어넘어 오로지 연주회 공연을 위해 작곡했으며, 20세기 이후의 미사 작품은 대부분 예배용 미사와 구분되는 대규모로 된 콘서트를 위한 것이다.

류재준의 ‘미사 솔렘니스’도 연주회용 곡이다. 장대한 길이와 대규모 편성, 압도적인 스케일로 청중을 만나는 콘서트용이다. 가사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작곡가가 발 딛고 서있는 사회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통감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이는 고통 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공감하는 데서 오는 절실함이 작품의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작곡가에게 자신의 작품은 모두 하나같이 소중하지만 류재준에게 ‘미사 솔렘니스’는 각별하다. 2017년 림프종 진단을 받았다. 암이라는 복병을 만났으니 작곡을 계속 할 수 있을지 불투명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읽어버린 채 사람들과의 소통마저 힘들었다. 그때 한줄기 빛처럼 이 곡에 대해 구상했다. 삶과 죽음, 나와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이 곡의 출발점이었다.

국립합창단이 류재준 작곡가의 ‘미사 솔렘니스’를 세계 초연하고 있다. ⓒ국립합창단 제공


지난해 초, 국립합창단 윤의중 단장으로부터 합창곡 창작 의뢰를 받았다. 올해 국립합창단 창단 50주년을 기념하는 대작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머리 속에 막연하게 존재해 있던 곡을 꺼내와 구체화하고 악보로 옮겼다.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이 장기화되면서 사람들은 극단의 고립을 경험했고, 사회는 부분적으로 멈추거나 제대로 가동되지 않은 채 삐걱거리던 시점이었다. 거기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되면서 세계평화를 위협했다.

류재준은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기아와 질병, 전쟁과 종교갈등 등으로 고통 받는 수많은 이들을 떠올리며 작품을 만들어 나갔다. 그의 ‘미사 솔렘니스’가 작곡가 개인을 넘어 인류의 보편성을 획득하는 지점이다. 그 많은 음악 형식 중에 왜 하필 ‘장엄미사’에 몰두했을까. 그는 이 작품에 대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에게 헌정하는 곡이다”라고 설명했다.

“‘미사 솔렘니스’를 쓰면서 바란 것은 하나였어요. 사람들이 이 곡을 들으며 우리가 모르는 비극에 대해 한 번이라도 눈을 돌려 살펴보고, 아픔을 조금이라도 공감했으면 좋겠다는 거죠. 사람들은 영웅을 찬양하지만 사실 가장 고생한 건 그 사람의 가족들이고, 그중에서도 어머니입니다. 자식들 전쟁터에 보내는 어머니들의 슬픔, 이상 고온과 재해에 시달리는 암담함에 자식을 남겨두는 어머니들의 아픔이 작품의 원동력이 됐습니다.”

국립합창단이 류재준 작곡가의 ‘미사 솔렘니스’를 세계 초연한 뒤 인사하고 있다. ⓒ국립합창단 제공


‘키리에’에서는 심벌즈와 드럼 등의 타악기 사운드가 귀를 사로잡았다. 일반적 형식을 벗어나 처음부터 강렬한 한방을 터뜨렸다. ‘글로리아’ 파트에서는 김정미가 플루트 선율에 맞춰 “그의 영광이 크심으로 인하여 감사하나이다”를 부르는 장면에서 울컥했다. ‘크레도’에서는 바리톤→소프라노→테너의 순서대로 분위기를 띄우더니, 마지막엔 메조소프라노의 깊고 따뜻한 음색이 영혼을 어루만졌다. 거룩함을 찬미한 ‘상투스’에서는 순수한 마음이 퍼져나갔다.

류재준은 “건강이 너무 안좋아 작곡도 거의 포기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뭘 남길까’ 고민했다. 그때 베토벤이 청력을 잃고 만년에 쓴 장엄미사가 떠올랐다. 믿음과 구원, 용서를 얘기하는 가사는 종교적이라기보다 내면의 성찰을 담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세계 초연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다. 고통과 평화를 대비시키며 몰입감을 선사했다. 탁계석 평론가는 “드디어 우리도 작곡가 류재준에 의해 세계 명곡 수준의 ‘장엄미사’ 보유국이 됐다”라며 “고통과 재난 속에 상처받고 있는 인류에게 예술로 기여하는 새 변곡점이 만들어졌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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