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조소프라노 이아경이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노래하고 있다. 피아노 반주는 김도석. ⓒSMI엔터테인먼트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30년 베테랑의 내공은 대단했다. 애써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냥 자신이 낼 수 있는 소리만큼만 노래했다. ‘An die Musik’에서 출발해 ‘My Way’로 마무리할 때까지 관객 모두는 월드 클래스 수준을 눈앞에서 실감했다. 저절로 ‘브라바!’가 튀어 나왔다. “성악 하나만 보고 지금까지 올곧게 길을 걸어왔다는 점이 가장 큰 의미다”라는 고백이 헛말이 아님을 증명했다.

메조소프라노 이아경이 지난 25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를 열었다. 피아니스트 김도석이 반주를 맡았다. 이번 리사이틀은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사계절 콘셉트로 구성했다. 봄의 앞과 겨울의 뒤에 각각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따로 붙였다.

이아경은 평소 인생은 사계절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진부하지만 한 번은 꼭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다. 오페라 아리아뿐만 아니라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 노래를 적절하게 구성했다. 각 계절에 한국 가곡을 한곡씩 넣은 것도 이채로웠다.

“성악을 처음 시작할 때 다룰 수 있는 곡을 봄에 넣었고, 제 음악이 무르익어 가면서 했던 곡들로 여름을 장식하고, 가을에는 음악적으로 더 성숙하게 해준 곡들을 배치했어요. 겨울은 마지막이기도 하지만 봄을 기다리는 처음이기도 하니 30년을 걸어온 만큼 앞으로 더 걸어가겠다는 의미를 담은 곡들로 준비했어요.”

등장 순간부터 박수와 환호가 쩌렁쩌렁하다. 2010년부터 모교인 경희대 성악과 교수로 근무하며 인재를 키우고 있다. 그동안 배출한 제자들의 응원에 열성팬의 격려까지 합쳐져 분위기를 후끈 달궜다.

메조소프라노 이아경이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노래하고 있다. 피아노 반주는 김도석. ⓒSMI엔터테인먼트 제공
메조소프라노 이아경이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노래하고 있다. 피아노 반주는 김도석. ⓒSMI엔터테인먼트 제공


프롤로그에 슈베르트의 ‘An die Musik(음악에게)’를 넣었다. “그대, 아름다운 예술이여/ 많은 두려운 시간 속에서/ 삶의 무거운 굴레가 나를 얽매이고 있는 곳에서/ 그대, 내 마음에 따스한 사랑의 불을 밝혀주었고/ 나를 더 좋은 세상으로 인도해 주었다오.” 이아경은 음악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담아 정성스럽게 노래했다.

봄에서는 조르다노의 ‘Caro mio ben(사랑스러운 나의 연인)’, 슈베르트의 ‘Frühlingsglaube(봄의 찬가)’, 도나우디의 ‘Spirate pur, Spirate(산들바람아, 불어라)’, 김용호 시·김진균 곡의 ‘또 한 송이의 나의 모란’을 들려줬다.

두꺼운 음색의 크기만큼 사랑이 더 깊게 가슴으로 들어왔고(‘Caro mio ben’), 긴 겨울이 지난 뒤 봄이 살금살금 세상을 깨웠고(‘Frühlingsglaube’), 부드럽고 따뜻한 바람이 몸을 감쌌고(‘Spirate pur, Spirate’), 결국은 밉도록 아름다운 꽃망울이 활짝 피어나며(‘또 한 송이의 나의 모란’) 봄은 축복처럼 다가왔다.

이아경은 “성악을 전공하는 사람에게 ‘An die Musik’ ‘Caro mio ben’은 기본적인 곡이지만, 관객 앞에서 불러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라며 “다른 어려운 곡보다 오히려 이 곡을 부르는 게 더 떨린다”고 말했다.

오페라 데뷔는 갑자기 찾아왔다. 1995년 국립오페라단이 공연한 잔 카를로 메노티의 ‘무당’에서 주인공 마담 플로라를 맡았다. 제목에서 나타나듯 미스터리한 내용의 현대 오페라였다. 대학 졸업 후 인천시립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할 때였다.

“당시 국립오페라단 박수길 단장께서 합창단원 정기평가 외부 심사위원으로 오셨어요. 노래를 듣고는 ‘주인공 메조소프라노를 못 찾아 고민하고 있었는데, 바로 여기에서 만났네’하면서 캐스팅을 해주셨어요. 다양한 감정 표현 스킬에 눈을 떴죠.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주인공으로 빙의해 헛것을 본 것처럼 놀라는 표정을 짓기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합창단원에서 하루아침에 프리마돈나로 업그레드했다. 이게 사다리가 됐다. 자신감이 붙자 여러 오디션에 지원해 배역을 따냈다. 6~7년 동안 국내 무대를 누볐다. 그런데 주위에서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외국에 나가 공부를 하고 오면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다. 언젠가는 유학을 다녀오지 못해 속상한 일을 겪을 수도 있다”고 조언을 해준 것.

그래서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001년, 남들보다 훨씬 늦은 서른한 살 때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다행히 혼자가 아니었다. 든든한 아군이 함께 했다. 오페라 연출가를 꿈꾸는 남편 이의주 씨가 옆에 있었다.

이아경은 여름에서 비제 오페라 ‘카르멘’의 타이틀 롤로 변신해 “사랑은 반항적인 새~ 아무도 길들일 수 없어”를 노래했다. ‘카르멘’을 대표하는 시그니처 곡 ‘Habanera(하바네라)’다. 오페라 한편을 감상하는 느낌을 전달하려고 아이디어를 냈다. “내가 당신을 언제 사랑할까?/ 글쎄, 잘 모르겠는데/ 어쩌면 절대 아닐 수도 있고, 내일 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오늘은 확실히 아니야” 레치타티보 부분을 살려 노래했고, 마지막 피날레에서 오른손을 번쩍 들어 악센트 있는 포즈를 취했다.

그는 이어 베토벤의 ‘Ich liebe dich(그대를 사랑하오)’, 박문호 시·김규환 곡의 ‘님이 오시는지’, 레온카발로의 ‘Mattinata(아침의 노래)’를 잇따라 부르며 음악 카타르시스를 선물했다.

메조소프라노 이아경이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노래하고 있다. ⓒSMI엔터테인먼트 제공
메조소프라노 이아경이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노래하고 있다. ⓒSMI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아경은 파란 드레스에서 흰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왔다. 가을이다. 도우니의 ‘O del mio amato ben(오, 나의 사랑하는 그대)’, 이월화 시·김도형 곡의 ‘누군가 내 마음을 적시네’, 토스티의 ‘Sogno(꿈)’으로 단풍빛을 뿜어냈다. ‘누군가 내 마음을 적시네’는 2013년 제5회 세일한국가곡콩쿠르 작곡부문 2위 수상곡이다.

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에 나오는 ‘Mon cœur s’ouvre à ta voix(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는 행운의 노래다. 2003년 제34회 벨리니 국제콩쿠르에서 우승을 안겨준 곡이다. 이 우승을 계기로 메조소프라노로서는 유례없이 6개국 국제콩쿠르에서 모두 단독 1위의 신화를 썼다.

벨리니 콩쿠르 당시 대진운이 좋지 않았다. 손해 본다는 마지막 순서였다. 긴 기다림 끝에 밤 12시가 되어 무대에 섰다. 그런데 청중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심사위원들도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그는 “노래도 결국 상호작용이다. 실력도 중요하지만 관객들과의 긴밀한 교감에서 오는 환호가 우승을 만들었다”며 “공감의 중요성을 깨우친 밤이었다”고 말했다.

우승 당시의 기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로 다시 모았다.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삼손! 삼손! 사랑해요”라고 노래하는데, “여러분! 여러분! 사랑해요”라고 바꿔 들렸다. 진심이 가득했다.

겨울도 4곡으로 구성했다. 토스티의 ‘Rindonami la calma(내게 안식을 주소서)’, 김효근 시·곡의 ‘눈’, 독일민요 ‘O Tannenbaum(오, 소나무여)’, 커티스의 ‘Non ti scordar di me(날 잊지 말아요)’를 연주했다.

메조소프라노 이아경이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노래하고 있다. ⓒSMI엔터테인먼트 제공


에필로그에서는 프랭크 시나트라가 불러 빅히트한 ‘My Way(나의 여정)’를 불렀다. 자크 루보와 질 틸보가 작곡했고 프랑스 가수 클로드 프랑수아가 ‘Comme D’habitude(콤 다뷔튀드·‘평소처럼’ ‘습관처럼’이라는 뜻)’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가수 폴 앵카는 이 곡을 듣고 반해 영어 가사를 새로 붙인 뒤 사나트라에게 ‘My Way’라는 제목으로 줬다.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걷는 메조소프라노 이아경의 모습과 오버랩되며 숙연했다. 음악의 길을 선택한 초심을 다시 다지는 맹세 같았다. 노래도 뭉클했지만 프로그램북을 보니 더 뭉클했다. 마지막 가사 ‘Yes, it was my way...(그래요, 그것이 나의 길이었어요...’ 부분만 따로 굵은 글씨체로 표시해 놓았다. 센스가 빛났다. 곡을 마치자 제자 2명이 무대로 나와 꽃다발을 전해줬다. 흐뭇한 풍경이다.

앙코르는 흥겨웠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Climb Every Mountain(모든 산을 올라봐)’을 불렀다. 깜짝쇼도 연출됐다. 피아노를 치던 김도석이 이아경의 뒤를 이어받아 노래를 부른 것. 관객의 환호소리가 이어지자 이아경은 더 노래를 감상해보라며 ‘쉿! 조용히’ 제스처를 취했다. 테너 출신 피아니스트와의 멋진 듀엣송이었다.

<백브리핑1> 이제하의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과 조영남의 ‘모란, 동백’

“모란꽃 피는 유월이 오면/ 또 한 송이의 꽃 나의 모란/ 추억은 아름다워 밉도록 아름다워/ 해마다 해마다 유월을 안고 피는 꽃/ 또 한 송이의, 또 한 송이의 나의 모란.

행여나 올까 창문을 열면/ 또 한 송이의 꽃 나의 모란/ 기다려 마음 조려 애타게 마음 조려/ 이밤도 이밤도 달빛을 안고 피는 꽃/ 또 한 송이의, 또 한 송이의 나의 모란”

김용호(1912∼1973) 시인이 쓴 ‘또 한 송이의 나의 모란’은 많은 작곡가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가슴을 아리게 하는 탁월한 시어 때문에 앞 다퉈 선율을 붙였다. 가장 먼저 곡을 만든 사람은 조두남(1912~1984)이다. 음악교과서에도 실려 많은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나중에 불거진 그의 친일 논란 탓에 슬금슬금 연주 횟수가 줄었다.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 김진균(1925~1986)의 곡이다. 김진균은 조두남 곡과 구별하기 위해 1절의 첫 구절 ‘모란꽃 피는 유월이 오면’을 ‘모란꽃 피는 오월이 오면’으로 살짝 바꿨고, 바뀐 부분을 두 번 되풀이해 부르게 작곡했다. 메조소프라노 이아경이 데뷔 30주년 콘서트에서 부른 ‘또 한 송이의 나의 모란’은 바로 김진균의 곡이다.

모란을 묘사한 가장 대표적인 시는 역시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다. 고등학교 시절 무조건 외워야 했던 필수 암송시다. 시, 소설, 그림, 음악 분야에서 활약한 ‘멀티 예술가’ 이제하는 평소 김영랑을 좋아했다.

어느 날 조두남 작곡가의 ‘또 한 송이의 나의 모란’을 듣고 창작욕이 발동했다. 그래서 흥얼흥얼 멜로디를 먼저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에 김영랑의 시를 접목해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이라는 가사를 작시해 노래로 만들었다. 1998년 ‘빈들판’이라는 시집을 내면서 자기가 부른 노래를 부록처럼 CD로 만들어 삽입했다. 여기에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이 실렸다.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 산에 뻐꾸기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속에 찾아 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동백은 벌써 지고 없는데/ 들녘에 눈이 내리면/ 상냥한 얼굴 동백 아가씨/ 꿈속에 웃고 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덧없어라/ 나 어느 바다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모래벌에/ 외로이 외로이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동백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 또 한 번 동백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가수 조영남이 이 곡을 탐냈다. 이제하의 허락을 얻어 자신의 음반에 수록했다. 제목을 줄여 ‘모란, 동백’으로 달았다. 조영남은 “내가 죽으면 장례식 때 후배들이 이 노래를 합창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애정을 보였다. 조영남이 라이브로 녹음한 음반을 들어보면 노래를 하다 목이 메어 네 차례 정도 중단되기도 한다.

<백브리핑2> 대중가요로도 히트한 ‘소나무’...바비킴의 ‘오 탄넨바움’ 샘플링

‘오 탄넨바움(O Tannenbaum)’은 1824년 에른스트 안쉬츠가 작사·작곡한 독일의 민요다. 원래는 연인에 대한 굳은 믿음을 전나무(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제목이 ‘소나무’로 바뀌었다)의 푸름에 빗댄 사랑 노래였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크리스마스 캐럴로 변신했다.

가수 바비킴은 서울에서 태어나 두 살 때 가족과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민을 떠났다. 다시 한국에 돌아온 건 스무 살 때인 1993년. 우리말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 채 귀국했다, 캐럴 ‘소나무’는 바비킴의 청소년 시절 애창곡이기도 하다. 미국 사회에서 겪었던 동양인에 대한 편견과 인종차별을 겪을 때마다 그의 마음을 잡아준 노래가 바로 ‘소나무’였다. 바비킴은 이 노래를 샘플링해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두 눈을 감으면 선명해져요/ 꿈길을 오가던 푸른 그 길이/ 햇살이 살며시 내려앉으면/ 소리 없이 웃으며 불러봐요/ 소나무야 소나무야 언제나 푸른 네 빛/ 소나무야 소나무야 변하지 않는 너/ 바람이 얘기해줬죠 잠시만 눈을 감으면/ 잊고 있던 푸른 빛을 언제나 볼 수 있다/ 많이 힘겨울 때면 눈을 감고 걸어요/ 손 내밀면 닿을 것 같아 편한 걸까/ 세상 끝에서 만난 버려둔 내 꿈들이/ 아직 나를 떠나지 못해/ 소나무야 소나무야 변하지 않는 너/ 바람이 얘기해줬죠 잠시만 숨을 고르면/ 소중했던 사람들이 어느새 곁에 있다/소나무야 소나무야 언제나 푸른 네 빛”-소나무(김형준·임보경 작사, 김형준 작곡, 바비킴 노래)

독특한 창법의 가수 바비킴이 우리에게 익숙한 멜로디에 새로운 메시지를 담아 들려주는 ‘소나무’. 힘들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해주고 더불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는 노래가 됐다. MBC TV 드라마 ‘하얀 거탑’의 주제곡으로 쓰여 시청자를 사로잡기도 했다.

/eunki@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