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음악은 무기력한 울음이 아니다...‘류재준의 애가’로 입증한 라쉬코프스키

피아노 독주회서 ‘비극 속 꺾이지 않는 의지’ 표현
베토벤·리스트 소나타로 ‘얼얼한 음악 충격’ 선사

박정옥 기자 승인 2023.04.14 16:59 | 최종 수정 2023.04.14 17:00 의견 0
일리야 라쉬코프스키가 12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린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연주하고 있다. ⓒ오푸스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들을 때 마다 가슴 먹먹한 곡이 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의 ‘피아노 소나타 32번 다단조(Op.111)’가 그렇다. 피아노의 신약성서라는 애칭이 붙은 악성의 피아노 소나타 32개 중 가장 마지막 작품이다. 1822년에 완성하고 같은 해에 출판했다. 세상을 떠나기 5년 전이다.

피아노 앞에 앉은 일리야 라쉬코프스키는 ‘아주 길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첫 음의 터치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의자 끝에 엉덩이를 살짝 걸친 폼에서는 더 집중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느껴졌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장대하다. 매우 이례적으로 2개 악장 구성이지만 연주시간은 25분쯤 된다. 러닝타임뿐만 아니라 담고 있는 내용 또한 넓고 크기 때문에 장대하다.

장중하면서도 극적인 서주로 1악장이 시작됐다. 곡의 진행이 매우 험난하다. 라쉬코프스키의 손가락은 암흑과 혼돈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한 음악가의 초상을 어루만졌다. 때로는 안타깝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음을 끌고 나갔다.

일리야 라쉬코프스키가 12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린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연주하고 있다. ⓒ오푸스 제공


1악장이 어둠에 맞섰다면 2악장은 순진무구한 세계로 진입한다. 긴장은 이완으로, 투쟁은 평정으로 변모한다. 티 없이 깨끗하다. 두 번째 악장은 아리에타다. 작은 아리아라고 이름 붙였지만 더없이 심오한 정서를 담고 있다.

주제를 변형한 5개의 변주가 연결돼 흐른다. 변주가 진행될수록 음의 길이가 분할되면서 속도감이 더해진다. 그런데 희한하다. 급해지기 보다는 유장하게 이어진다. 계속해서 세분되는 음표는 어느새 트릴에까지 이른다. 끝없이 투쟁하고 쟁취하던 여정은 마침내 도달한 종착지에서 오래도록 머문다. 그리고 전율과 환희 속에서 영원한 이별을 고한다. 모든 음이 끝났음에도 라쉬코프스키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아주 오래’ 멈춰있었다.

15분 안팎의 연주 시간 동안 한 아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온종일 누워만 있던 갓난아기가 뒤집기를 한다. 그리고는 낮은 포복으로 긴다. 이것만 해도 대견하다. 휘청거리며 선다. 위태위태했지만 어느새 두발로 서서 걷는다. 엄마와 아빠는 환호한다. 이젠 뛰기도 한다. 우사인 볼트의 9초58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힘껏 100m를 달린다. 2시간1분9초의 엘리우드 킵초게를 따라 갈수는 없지만 끈질기게 42.195km도 완주한다. 그리고는 80세·90세쯤 된 사람이 나온다. 에너지가 많이 소진됐다. 움직임이 둔하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쉰다. 그리곤 하늘로 올라간다. 끝없이 끝없이 올라간다. 더 이상의 진행을 기대할 수 없는 여행은 완전한 끝에 이른다. 한 사람의 일생이 고스란히 오버랩된다. 인생 마감 직전에 느끼는 마음, 꼭 그런 마음이다. 콧등이 찡했다.

일리야 라쉬코프스키가 12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린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연주하고 있다. ⓒ오푸스 제공


러시아 피아니스트 라쉬코프스키는 하마마스 국제 피아노 콩쿠르 1위, 롱티보크레스팽 콩쿠르 2위, 아서 루빈스타인 국제 피아노 마스터 콩쿠르 3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4위 등 세계 유수의 콩쿠르를 석권했다. 뛰어난 테크닉과 풍부한 감성표현으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성신여대 음악대학 초빙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성악가, 바이올리니스트, 첼리스트 등의 잇단 러브콜을 받는 인기 최고의 반주자다. 협연, 실내악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등 횟수로 따지자면 가장 많이 무대에 오르는 연주자다.

그가 12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피아노 리사이틀을 열었다. 공연 타이틀이 ‘Masterpiece’, 즉 ‘걸작’이다. 피아노 음악사에서 표현의 깊이와 영역을 확장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대작으로 프로그램을 짰다. 얼얼한 음악적 충격을 선사했다.

라쉬코프스키는 1부에서 ‘소나타 32번’에 앞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1번 내림가장조(Op.110)’를 먼저 연주했다. 명상적 성격과 투쟁적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청력 완전 상실이라는 삶의 끝에서 오직 예술을 붙잡으려 했던 절절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는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을 뽐내고(1악장), 리듬감 넘치는 스케르초를 지나(2악장), 아리오소와 푸가가 결합된 독특한 4부분 구성(3악장)을 차례대로 펼쳐냈다. 느리지만 지나치지 않게, 빠르지만 지나치지 않게 구성된 3악장은 ‘너는 내 음악의 포로야’라고 마음에 낙인을 찍었다.

일리야 라쉬코프스키가 12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린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류재준의 '애가'를 연주한 뒤 무대로 올라온 류재준 작곡가와 포옹하고 있다. ⓒ오푸스 제공


작곡가 류재준이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서울국제음악제의 지난해 주제는 ‘우리를 위한 기도’였다. 류재준과 크시슈토프 펜데르츠키의 작품이 연주된 폐막음악회 전날 밤에 많은 젊은이들이 길 위에서 세상을 떠난 사고가 발생했다. 바로 이태원 참사다. 연주에 앞서 류재준은 희생자들을 위해 묵념할 것을 제안해 그들을 추모했다.

류재준은 꼬박 3개월에 걸쳐 ‘라멘트(Lament)’를 작곡했다. 슬픈 심정을 읊은 ‘애가(哀歌)’는 한탄과 비탄에 빠져 있기 보다는 분연히 일어나 소리 높여 저항하고 함께 연대하기를 청했다. 올 2월 피아니스트 감가람의 리사이틀에서 초연됐다.

이번엔 라쉬코프스키가 두 번째로 연주했다. 단악장의 곡이다. 느린 비탄의 춤곡으로 시작해 점차 소생한 후 4성 푸가와 행진곡풍 코다에 이르는 역동적 과정을 잘 표현해 냈다.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지만 하나의 주제가 전체를 관통하며 자유로움과 통일성을 동시에 성취했다.

애도의 노래에서 시작해 힘찬 행진으로 끝나는 이 작품은 끊임없는 비극 속에서도 한결같이 꺾이지 않는 의지가 돋보인다. 주저하지 않고 춤추며, 침묵하지 않고 노래하며, 흩어지지 않고 연대하며 함께 행진했다. 그리하여 끝내 희망적이다. 음악은 결코 무기력한 울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줬다. 산산이 깨진 마음을 붙잡아주는 위로이자 서로를 지탱하게 해주는 힘이라는 것을 느끼게 만들었다.

곡을 마치자 라쉬코프스키는 객석에 앉아있는 작곡가에게 존경의 마음을 표했다. 무대에 오른 류재준은 포옹을 하며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이런 광경을 지켜보는 관객들도 두 사람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일리야 라쉬코프스키가 12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린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연주하고 있다. ⓒ오푸스 제공


프란츠 리스트(1811~1886)의 ‘피아노 소나타 b단조(S.178)’는 그가 남긴 유일한 피아노 소나타이자 낭만주의의 가장 혁신적인 소나타다. 단악장으로 되어 있지만 작품 해석에 따라 3개 또는 4개의 악장으로도 볼 수 있는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단순히 정신없는 소음이며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건전한 음악적 아이디어가 어디에도 없으며 단 한 번의 명확한 화성 진행도 찾을 수 없다.”(클라라 슈만) “모든 개념을 초월해 대단히 아름답고 매력적인 동시에 위대하고 깊고도 숭고하다.”(리하르트 바그너) 감상자가 진저리를 치든 환호성을 보내든 이 작품은 강렬하게 상반된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뿐만 아니라 구조적·내용적으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점이 매력이자 특징이다.

라쉬코프스키는 리스트의 의도를 잘 파악했다.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모순을 포용하며 혼동 속에서 격돌하는 감정을 표현해 새로운 질서를 창조했다. 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나온 자유롭고 충격적인 세계는 음악가들에게 창조력의 원천이됐고 감상자에게는 상상력의 샘물이 돼 예술적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해줬다.

앙코르는 두 곡을 선사했다. 쇼팽의 ‘녹턴 13번(Op.48-1)’과 바흐·부조니의 ‘코랄 전주곡’ 중 ‘주여, 당신을 소리쳐 부르나이다(Ich ruf zu dir, Herr)’를 연주했다.

한편 이번 공연을 주최한 오푸스는 오는 5월 2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에머슨 스트링 콰르텟의 라스트 댄스’를 연다.

/park72@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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