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이 21일 공연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3막에서 비올레타(소프라노 박소영)와 알프레도(테너 김효종)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3막이 시작되면서 전주곡이 흘렀다. 콧등이 찡하다. 슬프고 애절하다. 눈물 떨어진다. 기-승-전을 거친 스토리가 어떤 결말을 맞을지 암시해주는 시그널 프렐류드다. 전체를 관통하는 서늘한 선율은 곧 주인공의 생명이 꺼질 것임을 넌지시 알려준다.

무대 한가운데 피아노가 놓여있다. 그 위에 비올레타(소프라노 박소영)가 누워 있다. 폐병 때문이다. 훌훌 털고 다시 일어서는 건 힘들다. 목숨이 몇 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왼쪽 구석엔 연인 알프레도(테너 김효종)가 우두커니 서있고, 오른쪽 구석엔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바리톤 정승기)이 앉아있다. 두 사람은 비올레타의 방에 있지만, 사실은 다른 공간에 있다. 아직 나올 차례가 아닌데 미리 등장한 것. 비올레타 곁을 맴돌지만 비올레타는 이들을 인지하지 못한다. 잠시 동안 ‘투명인간’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뱅상 부사르의 영리한 연출이 빛을 발했다. 원작에서는 비올레타가 제르몽이 보낸 편지를 읽는데, 이 작품에선 구석에 앉아있는 제르몽이 편지를 읽는다. 아직 공식적으로 나오는게 아니고 목소리로만 출연한다. 자기가 쓴 편지를 자기가 낭독하는 셈이다.

“알프레도는 외국 땅에 있다네. 자네 희생에 대해 내가 직접 그 아이에게 밝혔다네. 자네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돌아갈 터이고 나도 가겠네. 몸을 돌보길. 좋은 날을 누릴 자격이 있으니.”

편지대로만 되면 좋으련만 점점 희망은 꺼져간다. 비통함이 몰려온다. 실낱 기대를 하지만 시간이 없다. 비올레타는 ‘안녕, 과거의 아름답고 즐거운 꿈이여’를 부른다. 덧없음을 느끼는 아리아다.

하늘이 도왔다. 알프레도가 도착했다. 아까부터 무데에 나와 있었지만 지금 집으로 들어온 것이다. 죽음의 고통에 신음하는 비올레타를 안고 ‘파리를 떠나서’를 부른다. 비올레타도 가세한다. 삶의 힘과 활기를 잠시 느끼지만 이내 스러진다.

국립오페라단이 21일 공연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3막에서 비올레타(소프라노 박소영)와 알프레도(테너 김효종)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래쪽 소녀는 어린시절 순수했던 비올레타를 표현한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이 21일 공연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3막에서 비올레타(소프라노 박소영)와 비올레타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가 연기하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순수했던 시절의 비올레타를 상징하는 어린 소녀가 비올레타 옆으로 온다. 이 소녀는 1막과 2막에서도 몇 번 등장한다. 처음엔 실루엣으로 나오다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 역시 뱅상 부사르가 고안해낸 연출의 묘미다.

결국 비올레타는 숨을 거둔다. 피아노 위에서 내려온 비올레타는 소녀와 손을 잡고 무대 앞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막이 내려가지만 두 사람은 막 앞쪽으로 나와 있어 여전히 무대에 있다. 소프트라이트가 현재의 비올레타와 옛날의 비올레타를 집중해서 부각한다 . 이것 역시 솜씨 좋은 연출이다.

국립오페라단은 21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무대에 올렸다. 파격! 연출가 뱅상 부사르가 선보인 새로운 버전은 ‘파격’이었다. 베르디는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역사·신화적 주제에서 벗어나 동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으려 했다. 그래서 나온 게 ‘라 트라비아타’다.

국립오페라단이 21일 공연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3막에서 비올레타(소프라노 박소영)와 알프레도(테너 김효종)이 연기하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이 21일 공연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3막에서 비올레타(소프라노 박소영)가 연기하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1853년 첫 선을 보인 ‘라 트라비아타’는 1847년 파리에서 스물세 살의 나이로 사망한 젊은 코르티잔(부유층을 상대하는 고급 매춘부) 마리 뒤플레시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베르디는 관행을 깨고 위선과 향락에 빠진 당시의 파리를 날카롭고 거침없이 묘사했다.

당시 파리는 식민지 무역으로 큰 돈을 번 신흥 부르주아들로 넘쳤다. 벼락 부자들은 귀족들만 누려온 각종 특권을 누리고 싶었고, 코르티잔과의 비밀스럽고 뜨거운 사랑은 욕망을 충족시켜줬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소녀들은 배고픔과 추위를 피해 상류층 남성들의 욕망의 대상이 됐고, 그런 코르티잔들이 수없이 피고 졌다.

마리 뒤플레시 역시 가난을 피해 파리로 온 가장 유명한 코르티잔이었다. 그는 무도회, 오페라장 등에서 손님들을 만났는데 자신의 오페라장 박스석에 늘 동백꽃 한 다발을 뒀다. 평소에는 하얀 동백꽃, 생리 중일 때는 빨간 동백꽃을 둬 자신이 사랑을 나눌 수 없는 기간을 알렸다. 그래서 ‘동백꽃 아가씨’로 불렸다.

국립오페라단이 21일 공연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1막에서 비올레타(소프라노 박소영)이 연기하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이 21일 공연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1막에서 비올레타(소프라노 박소영)와 알프레도(테너 김효종)이 연기하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뱅상 부사르는 “역사라는 거름망 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 했던 베르디의 의도에 충실해 이번 작품을 소프라노와 비올레타의 만남으로 그렸다”며 “1847년부터 2023년 현재까지 자유로운 영혼과 육체에 대해 사회가 가하는 잔인함은 변한 것 없이 똑같고 질병의 흔적, 인간과 상황의 잔인함, 질투와 죄책감은 같은 깊이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남성이 지배하는 폭압적 시대의 고통과 사회를 고착시키는 위선의 무게로 여성은 목숨과 생계를 잃는다. 베르디는 이런 면에서 강렬한 울분을 토하며 음악을 전한다”고 덧붙였다.

뱅상 부사르 연출가가 맡은 이번 공연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현대적이고 주체적인 모습의 ‘라 트라비아타’가 무대 위에 모습을 나타냈다. 뱅상 부사르는 비올레타를 소프라노로 설정했다. 통속적인 사교계의 꽃보다는 주체적인 예술가로 격상시켰다.

국립오페라단이 21일 공연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2막에서 비올레타(소프란호 박소영)가 노래하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이 21일 공연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2막에서 비올레타(소프란호 박소영)가 노래하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1막. 비올레타가 등장한다. 가죽재킷에 청바지를 입었다. 굽 높은 부츠를 신고 빨간모자도 썼다. 어수선한 음악연습실에서 처음 알프레도를 만난다. 두 사람은 서로 주고받으며 ‘축배를 듭시다, 아름다움으로 장식된 기쁨의 잔으로’라며 그 유명한 ‘축배의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비올레타는 자신에게 접근해오는 알프레도를 밀쳐낸다. 마음 한구석에선 받아들이고 싶지만 현실적 제약 조건이 너무 많다. 비올레타는 ‘이상해! 이상해’ ‘아 혹시 그이가’ ‘미친 짓, 미친 짓이야’ ‘언제나 자유롭게’로 이어지는 긴 아리아를 부른다. 이 장면에서 비올레타가 입은 드레스는 청바지 위에 가죽 상의와 함께 덧대어 만들었다.

국립오페라단이 21일 공연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2막에서 비올레타(소프라노 박소영)와 제르몽(바리톤 정승기)가 노래하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이 21일 공연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2막에서 비올레타(소프라노 박소영)와 제르몽(바리톤 정승기)가 노래하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2막은 비올레타와 알프레도가 한적한 시골에서 즐기는 ‘사랑의 도피’ 장면이다. 비올레타도 아래 위 모두 흰색 윗옷과 바지 차림이다. 하지만 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비올레타는 자신의 재산을 처분해야 했고,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알프레도는 돈을 구하러 파리로 떠난다. 그사이 비올레타를 찾아온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은 자신의 아들과 헤어질 것을 종용한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천사와 같은 딸이’와 ‘어여쁜 따님께 전해 주세요’를 부른다.

비올레타는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이별을 결심하고, 진실을 말해주지 않은 채 알프레도를 떠난다. 분노와 복수심에 사로잡힌 알프레도는 비올레타가 새 연인과 함께 참석한 가면무도회장을 찾고, 이곳에서 배반당한 연인을 조롱하는 기괴한 춤의 여흥이 펼쳐진다. 드레스를 입은 남성과 턱시도를 입은 여성들, 그리고 핑크·초록·주황의 형광색 의상을 입은 파티 참가자들이 무대를 가득 채우고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알프레도는 손님들을 불러 모아 비올레타에게 돈을 던지며 모욕한다.

국립오페라단이 21일 공연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2막에서 화려한 무도회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이 21일 공연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2막에서 화려한 무도회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무대 양쪽뿐만 아니라 아예 중앙 배경에도 자막을 띄워 관객들이 쉽게 내용을 이해하도록 도왔다. 벽면에 영상을 띄워 극의 전개에 맞는 효과를 줬다. 또한 벽면을 겹치게 배치해 미니멀리즘으로 단순화된 세트에 나름 액센트 있는 변화를 줬다.

지휘자 세바스티안 랑 레싱과 연출가 뱅상 부사르는 ‘마농’ ‘호프만의 이야기’에 이어 이번에 세 번째로 인연을 맺었다. 소프라노 박소영·윤상아가 비올레타 역을, 테너 김효종·김경호가 알프레도 역을, 바리톤 정승기·유한승이 제르몽 역을 맡았다. 21일부터 24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공연. 23일 오후 3시 공연은 국립오페라단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크노마이오페라’와 네이버TV로도 관람이 가능하다.

/eunki@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