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남 ‘왕자호동’이 현제명·김동진 제치고 국립오페라단 창단작 선정된 이유?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 소장자료 연구총서’ 발간
1960년대 한국공연예술의 역사적 전개 집중 조명

박정옥 기자 승인 2021.12.30 15:36 의견 0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은 ‘공연예술박물관 소장자료 연구총서’ 권1을 최근 발간했다. Ⓒ국립극장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장일남(1932~2006)의 오페라 ‘왕자호동’은 1962년 국립오페라단의 창단 기념 작품이다. 4월 13일부터 19일까지 명동국립극장에서 초연됐다. 국립 공연 단체를 출범시키면서 국내 창작 작품을 강조한 것은 당연한 선택으로 보인다. 실제로 3월 말부터 진행된 국립 공연 단체의 창단 기념 공연은 4개 단체(국립오페라단·국립극단·국립무용단·국립국극단) 모두 창작 작품을 하도록 기획됐다.

그러나 국립오페라단이 곧바로 선택할 수 있는 창작 오페라는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공연을 두 달 정도 앞둔 상황에서 작품을 새롭게 위촉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일보’의 1962년 2월 12일자 기사에 의하면 그때까지 작품 선정이 마무리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약 일주일 후인 2월 20일자 ‘대한일보’ 기사는 장일남의 ‘왕자호동’으로 작품이 결정됐고 이미 개인 연습에 들어갔다고 알리고 있다. 그러면서 장일남을 “재건체조 음악 작곡자로 현재 숙명여고의 교사로 있는 신인이다”라고 소개한다.

한편 ‘서울신문’ 2월 18일자 기사는 국립오페라단의 첫 작품으로 장일남의 ‘왕자호동’이 결정되었음을 가장 먼저 알리며 “레퍼토리 문제로 구구한 의견이 많았음”을 전하고 있다. 국립오페라단이 어떻게 장일남의 ‘왕자호동’을 첫 작품으로 선택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으나 최종 결정까지 내부에서 상당한 논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때까지 우리 음악계에 알려져 있던 창작 오페라로는 2년 전에 작고한 현제명(1902~1960)의 ‘춘향전’(1950)과 ‘왕자호동’(1954), 그리고 김대현(1917~1985)의 ‘콩쥐팥쥐’(1951)가 있었다. 특히 현제명의 ‘춘향전’은 재공연될 정도로 인기몰이를 했던 터라 가장 강력한 후보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작곡계의 큰 인물이었던 현제명의 인기 오페라 ‘춘향전’을 제치고 이제 막 서른 살이 된 장일남의 ‘왕자호동’을 선택하게 된 데에는 초연 작품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민족 오페라’ 확립을 기치로 내세운 상황에서 기존의 작품보다는 신작을 선호했다고 볼 수 있다.

1962년 국립오페라단 창단기념 작품인 장일남의 ‘왕자호동’ 공연 모습. Ⓒ공연예술박물관


또 다른 강력한 후보 작품으로 김동진(1913~2009)의 ‘심청전’을 꼽을 수 있다. 김동진은 한국전쟁 이전에 이미 ‘심청전’을 완성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국립오페라단이 창단되기 불과 3개월 전인 1961년 11월 15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국립극장에서 말이 있었는데 작곡가가 북한에서 작곡한 것이라는 사리에도 닿지 않는 말썽으로 해서 무대공연이 이루어지지 않은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며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

또 장일남의 ‘왕자호동’이 초연되기 직전인 3월 29일 ‘경향신문’의 좌담 기사에서 평론가 이성삼은 김동진의 ‘심청전’을 언급하며 완성된 작품조차 공연되지 못하는 현실을 질타한다. 이런 정황들로 보아 국립오페라단의 창단 기념 작품 선정과 관련해서 ‘구구한 의견’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김동진의 ‘심청전’이 논의의 대상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특히 김동진은 1962년 당시 서라벌예술초급대학 교수였으며 이미 가곡 ‘가고파’ ‘수선화’ ‘내 마음’ 등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 작곡가였다.

이미 완성된 채로 첫 무대를 기다리고 있는 유명 작곡가의 창작 오페라를 제쳐두고 신진인 장일남의 오페라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김동진의 ‘심청전’은 판소리 ‘심청가’를 채보한 후에 서양 화음과 오케스트라 반주를 사용해 만든 실험성 강한 음악이었다. 또한 국립오페라단보다 약 3주 앞서 창단 기념 공연을 가진 국립국극단의 작품이 바로 판소리 ‘춘향가’의 국극 버전이었다. 김동진의 ‘심청전’이 판소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오페라라는 점에서 국립국극단의 레퍼토리와 중첩이 되는 문제가 있었을 것이고, 작품이 음악 양식적인 측면에서 당시 성악가들에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었다.

현제명과 김동진, 김대현 등 막강한 선배들을 제치고 장일남의 작품이 선정된 이유는 초연 작품이며, 성악가들에게 익숙한 양식으로 작곡됐고, 소재 역시 한국적이지만 국악 극음악인 판소리와 연관성이 없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허영한(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학과 교수)의 ‘장일남의 오페라 왕자호동 연구’ 중에서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은 ‘공연예술박물관 소장자료 연구총서’ 권1을 최근 발간했다. Ⓒ국립극장


국립오페라단이 창단작품으로 장일남의 ‘왕자호동’을 선택한 이유를 자세하게 살펴보는 등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은 ‘공연예술박물관 소장자료 연구총서’ 권1을 지난 20일 발간했다. 공연예술박물관이 소장한 자료를 적극적으로 공개하는 동시에 공연예술분야에서 학술적 가치가 있는 자료의 심층 연구를 확대하고자 올해 처음 만들어졌다.

‘초연에서 레퍼토리로’라는 주제로 발간된 창간호에서는 1960년대 국립극단‧국립오페라단이 걸어온 역사를 공연예술박물관 소장 자료 중심으로 고찰하고 있다.

분야별 전문가 7명(김남석·김옥란·김현주·박동우·백현미·우혜언·허영한)이 집필진으로 참여해 총 320쪽 분량으로 엮었다. 두 단체가 고유한 레퍼토리를 확보하기 위해 펼친 다양한 활동을 문화예술사적 관점에서 서술했으며, 당시 국립극장 무대미술의 역사도 다룬다. 또한 공연예술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960년대 국립극단‧국립오페라단의 창작 작품과 국내 초연 작품의 사진 자료 60점도 함께 수록했다.

최석영 공연예술박물관장은 “이번 창간호를 시작으로 격년마다 다양한 주제를 담은 연구총서를 발간할 계획이다”라며 “박물관 소장 자료가 적극적으로 활용·공유돼 공연예술연구와 그 발전에 토대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밝혔다.

‘공연예술박물관 소장자료 연구총서’는 12월 30일(목)부터 국립극장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내려 받을 수 있으며, 2022년 1월부터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 자료실 및 주요 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다.

한편 국립오페라단은 내년 창단 60주년을 기념해 ‘왕자, 호동’을 3월 11·12일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다시 공연한다. 한승원 연출과 여자경 지휘자가 협업한다.

/park72@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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