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20년 만에 선사한 ‘네순 도르마’...이용훈 모두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오페라 ‘투란토트’ 칼라프 왕자로 첫 국내무대
​​​​​​​새롭게 해석한 손진책 ‘레지테아터’ 연출 찬사

김일환 기자 승인 2023.10.27 10:20 | 최종 수정 2023.10.27 11:45 의견 0
‘투란도트’ 칼라프 왕자 역할로 20년 만에 국내 무대에 데뷔한 월드 클래스 테너 이용훈이 26일 영혼을 뒤흔드는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클래식비즈 김일환 기자] 어둠 침침 암울한 분위기의 지하세계다. 감옥과 같다. 극의 배경을 고대 중국이 아닌 삭막한 콘크리트 구조물과 해골 나뒹구는 설치물을 활용해 디스토피아적 공간으로 바꿨다. 이따금 뒤편으로 희망을 상징하는 달이 뜨지만 아주 잠깐이다. 이내 사그러들며 벗어날 수 없는 절망과 공포를 드리운다.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새로운 모습이다. 연극·창극·마당놀이 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베테랑 손진책이 원작의 시간과 공간을 새롭게 재해석한 ‘레지테아터’ 무대를 선보인 것. 자신의 첫 오페라 연출이다.

3막 1장. 영혼을 뒤흔드는 목소리로 ‘아무도 잠들지 말라(Nessun dorma)’가 흘러 나왔다. 세종문화회관 3000석 대극장 무대를 뚫고 힘차게 퍼져나갔다. 26일, 약 20년 만에 밟은 첫 고국 오페라 무대. 월드 클래스 테너 이용훈은 마치 오늘만을 기다렸다는 듯 종횡무진 빅무대를 누비며 존재감을 여실 없이 드러냈다. 칼라프 왕자의 퍼펙트 데뷔다.

‘투란도트’ 칼라프 왕자 역할로 20년 만에 국내 무대에 데뷔한 월드 클래스 테너 이용훈이 26일 영혼을 뒤흔드는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투란도트’ 칼라프 왕자 역할로 20년 만에 국내 무대에 데뷔한 월드 클래스 테너 이용훈이 26일 영혼을 뒤흔드는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이용훈은 서정적인 음색이지만 강렬하게 밀어붙이는 힘까지 더한 리리코 스핀토 테너(Lirico spinto tenor)다. 흔치 않은 달란트를 가져 ‘신이 내린 목소리’로 불린다. 이번 공연이 자신에게 허락된 짧은 준비 기간이었음에도 그는 자신이 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를 호령하는 세계 최정상급 가수인지 입증했다.

이용훈는 공연 직후 “20년 동안 기다렸던 데뷔 무대였다. 해외 일정으로 아직 시차 적응이 안돼 부족한 점이 많고 힘도 들었지만 사랑으로 맞아주고 반겨줘 감격적이었다. 그 어떤 외국 무대보다 긴장되고 떨렸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한국 팬들을 직접 만나니 너무 기쁘고 설레고 뿌듯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투란도트’ 3막에서 칼라프 왕자(테너 이용훈·오른쪽)가 투란도트 공주(소프라노 이윤정)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투란도트’에서 시녀 류 역할을 맡은 소프라노 서선영이 26일 노래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이어 공연 후 로비에서 기다리던 팬들과 후배 성악가들에게는 “오페라와 같은 클래식 음악이 골든 에이지를 지나고 대중적 인기가 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참으로 좁은 길이다. 동양인이라 더 힘든 점이 많았다. 정말 많은 난관, 넘어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았다”라며 “그렇지만 음악을 정말 사랑하면 끝까지 갈 수 있다. 내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가는 게 아니라 ‘오페라 가수가 내가 존재해야 하는 사명’이라고 생각돼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만의 사명을 가지고 임하면 험한 길을 만나더라도 또 다른 길을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세종문화회관과 서울시오페라단이 제작하는 오페라 ‘투란도트’는 29일(일)까지 계속된다. 투란도트 역에 이윤정·김라희, 칼라프 역에 이용훈·신상근·박지응, 류 역에 서선영·박소영, 티무르 역에 양희준·최공석 등이 출연해 최고의 음악 성찬을 이어간다.

시녀 ‘류’(소프라노 서선영)가 자살을 한 후 실려 나가자 이를 지켜보는 칼라프 왕자(테너 이용훈·오른쪽 첫번째)가 오열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현대적 연출에 걸맞게 인물들을 새롭게 해석했다. 극의 키 포인트는 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 그의 죽음으로 어둠의 공간이 빛의 공간으로, 폐허가 낙원으로 뒤바뀐다.

원작 오페라에는 16∼18세기 이탈리아 전통극의 광대 캐릭터에서 따 온 왕실 신하 ‘핑·팡·퐁’이 등장한다. 본디 코믹한 캐릭터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냉소적이고 기계적인 인물로 그렸다. 권력 지향적이며 충성심은 하나도 없이 개인의 목표만을 위해 달려가는 역할로 표현했다. 오늘날의 정치인을 떠올리게 하는 점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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