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란도트’로 첫 오페라 연출 손진책 “류가 원했던 더 큰 사랑의 승리 담겠다”

“오페라도 연극처럼 본질은 소통...원작 넘어보고 싶어”
20년만에 국내 무대 데뷔 테너 이용훈 “꿈같은 기분”

박정옥 기자 승인 2023.10.23 14:56 의견 0
서울시오페라단의 ‘투란도트’에서 칼라프 왕자 역할을 맡은 테너 이용훈과 류 역할을 맡은 소프라노 서선영이 19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오페라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시오페라단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단순히 투란도트와 칼라프 커플의 승리를 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칼라프 왕자의 시녀 류가 지키고자 한 숭고한 가치를 되새기면서 좀 더 큰 사랑의 승리로 승화시켜 보고 싶었습니다.”

손진책이 처음으로 오페라를 연출하다. 1974년 연극 ‘서울 말뚝이’로 연출가 생활을 시작한 그는 연극, 창극, 마당놀이 등 다양한 장르의 무대예술 작품에서 연출을 맡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식 총감독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오는 26일부터 29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되는 서울시오페라단의 ‘투란도트’는 그가 최초로 연출하는 오페라다.

오페라 연출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앞둔 손 연출은 19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오페라도 ‘소통’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연극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오페라든 무용극이든 특별히 연극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고 연출했다”며 “차이가 있다면 오페라는 음악이 무엇보다 앞선다는 점이다. 음악적인 효과를 최대한 끌어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서울시오페라단의 ‘투란도트’에서 칼라프 왕자 역할을 맡은 테너 이용훈(왼쪽)이 19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오른쪽은 손진책 연출. ⓒ서울시오페라단 제공


이어 “오페라는 가사와 대본을 주어진 대로 연출해야 해서 연출가의 해석이 견강부회식으로 들어가는 부분이 있다. 연극은 내용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즐거움이 있었는데 이렇게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에서 작업하는 것도 재미있다”며 웃었다. 베테랑다운 여유가 느껴졌다.

오페라 ‘투란도트’는 이탈리아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의 유작으로 1926년 초연했다. 얼음같이 차가운 모습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공주 투란도트와 공주의 사랑을 쟁취하려는 칼라프 왕자의 이야기다.

칼라프는 공주가 결혼 조건으로 내건 수수께끼를 모두 풀었음에도 결혼을 받아들이지 않자, 해가 뜨기 전까지 공주가 자신의 이름을 알아낸다면 패배를 인정하겠다는 내기를 걸어 공주를 자극한다. 이름을 알아내는 데 실패한 투란도트는 칼라프의 사랑을 받아들이며 결말을 맞는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원작의 결말을 비틀었다. 배경도 바꿨다. 이른바 원작의 배경과 결말을 바꿔 새롭게 연출하는 ‘레지테아터’ 오페라다.

서울시오페라단의 ‘투란도트’에 출연하는 테너 이용훈(칼라프 왕자), 소프라노 서선영(류), 베이스 양희준(티무르)이 19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오페라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시오페라단 제공


손 연출은 칼라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시녀 류의 헌신을 조명한다. 류는 칼라프의 이름을 알아내려는 투란도트의 고문을 견디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는 류의 조건 없는 사랑과 희생에 주목했다. 배경에서도 중국풍을 지우고, 어느 압제 국가의 풍경으로 묘사한다.

그는 “‘투란도트’의 배경은 암울하고 희망이 없는 죽음의 도시다”라며 “결말에서는 민중이 압제에서 벗어나 희망찬 나라, 생명의 도시로 바뀌는 것에 환호하며 끝난다. 관객이 이런 해석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기대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작품을 볼 때마다 류의 죽음을 밟고 사랑의 열매를 맺는 부분이 괴기하고 불길하다고 느꼈다. 한 번도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투란도트가 갑자기 사랑에 빠진다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푸치니도 피날레에 정작 사랑의 듀엣을 넣지 않았는데, 그런 점이 꺼림칙했던 게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원작을 넘어보고 싶었다”고 밝혔다.

서울시오페라단 ‘투란도트’의 연출을 맡은 손진책이 19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서울시오페라단 제공


오페라에는 16∼18세기 이탈리아 전통극의 광대 캐릭터에서 따 온 왕실 신하 ‘핑·팡·퐁’이 등장한다. 손 연출은 “세 신하는 본디 코믹한 캐릭터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냉소적이고 기계적인 인물로 그렸다. 권력 지향적이며 충성심이라곤 없이 개인의 목표만을 위해 달려가는 역할로 표현했다. 오늘날의 정치인을 떠올리게 하는 점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전의 현대적 재해석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칼라프 역에는 월드 클래스 테너 이용훈이 출연한다. 오페라를 잘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알 만한 ‘네순 도르마(아무도 잠들지 말라)’ 아리아로 유명한 역할이다.

그는 ‘리리코 스핀토 테너’라는 평가를 받는다. ‘리리코(lirico)’는 서정적인 음색을, ‘스핀토(spinto)’는 강렬하게 밀어붙이는 활기찬 목소리를 가졌다는 뜻인데 이용훈 처럼 두 목소리를 모두 가진 테너는 극히 드물다. 2010년 ‘돈 카를로’로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 무대에 데뷔한 뒤 영국 로열 오페라 하우스, 이탈리아 스칼라 극장 등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극장에서 공연했다.

서울시오페라단의 ‘투란도트’에서 칼라프 왕자 역할을 맡은 테너 이용훈이 19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서울시오페라단 제공

줄곧 해외에서 활동한 그는 이번 공연으로 국내 무대에 데뷔한다. 이용훈은 2021~22시즌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2022~23시즌 런던 로열 오페라의 ‘투란도트’에서도 칼라프 역을 맡았을 정도로 이 역할과 인연이 깊다. 그는 “지금까지 ‘투란도트’에 110~120회 정도 출연했다”면서 “고국 땅에서 첫 무대를 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국내 오페라 무대 데뷔는 드라마틱했다. 당초 국내 공연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나, 독일 공연의 휴식기와 한국 공연 시기가 겹치며 출연이 성사됐다. 이용훈은 “이번에 정말 공교롭게도 한국 무대에 오를 수 있게 되어 꿈같은 기분이다”고 말했다.

국내 데뷔가 늦어진 점에 대해서는 “해외는 빠르면 5년 전부터 제안이 오지만 국내는 다음 달 열리는 공연인데 출연을 요청하는 경우가 있다”며 “그렇게 되면 이미 스케줄이 차서 출연할 수가 없다. 프로 성악가로 활동한 지가 20년인데 일정이 밀리고 밀리다 보니 이제야 국내 공연이 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이용훈은 연출가가 오페라에 자신의 해석을 가미하는 추세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혔다. 그는 원작의 대본이나 음악을 변형하는 것은 작곡가에 대한 존중에서 어긋나는 일이지만 새로운 해석과 시도도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최근에 ‘오징어 게임’에서 모티브를 얻은 오페라 ‘투란도트’에 출연한 경험도 들려줬다. 그는 “서바이벌 게임에서 승리하면 투란도트의 수수께끼를 풀 기회를 얻는다는 설정이었다”며 “무대에서 줄다리기에 양궁까지 하는데 관객들이 정말 좋아했다.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이용훈은 내년 8월 서울 예술의전당이 공연하는 베르디 오페라 ‘오텔로’에도 출연할 예정이다. 학창 시절 선교사를 꿈꿨을 정도로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그는 “주권자(신)의 힘으로 이 자리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며 “많은 분이 도와주신 덕분이다”며 겸손해했다.

서울시오페라단의 ‘투란도트’에 출연하는 테너 이용훈, 소프라노 서선영, 소프라노 이윤정, 베이스 양희준(왼쪽부터)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서울시오페라단 제공


투란도트 역에는 이탈리아 베로나, 베니스 극장 등 유럽 무대에서 활동해 온 소프라노 이윤정이 낙점됐다. 류 역에는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소프라노 서선영이 출연한다.

이윤정은 “메조소프라노로 출발했는데 소프라노로 데뷔한 역할이 투란도트였다”며 “이 역할로 100회 이상 무대에 섰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서선영은 “세계적인 성악가와 함께할 수 있어 기쁘다”며 “칼라프를 향한 사랑으로 죽음을 택한 류를 저의 해석으로 표현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러면서 “류는 희생만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다. 칼라프를 향한 사랑의 표현으로 죽음을 택한 거다. 류가 칼라프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 그것이었다.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사랑이다”며 견해를 밝혔다.

투란도트 역은 소프라노 김라희, 칼라프 역은 테너 신상근·박지웅, 류 역은 소프라노 박소영이 함께 맡는다. 진주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정인혁이 지휘봉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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