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핌 브론프만 “손가락 피 흘러도 계속 연주...좋은 음악 못보여주면 전부 변명일 뿐”

피 묻은 건반 거장 11월11일 공연
‘빅3’ 로열콘세르트헤바우와 협연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2번 연주
​​​​​​​“개인적 감정 없애고 작품에 집중”

박정옥 기자 승인 2023.11.09 13:00 | 최종 수정 2023.11.09 13:21 의견 0
‘피 묻은 건반 거장’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듣는 예핌 브론프만이 11월 11일 네덜란드 명문 악단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와 내한 공연을 연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만을 상징하는 ‘레전드 사진’이 한 장 있다. 아무 배경 설명 없이 보면 섬뜩한 느낌이다. 바로 피 묻은 피아노다. 하얀 건반이 핏자국으로 빨갛게 물들어 있다. 2015년 10월 12일 오스트리아 빈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열린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때의 사진이다. 손가락이 찢어지는 부상에도 연주를 강행한 결과였다.

“제 손가락에 어떤 조각이 박혔고, 그것을 제거해야만 했습니다. 수술 과정에서 생긴 상처로부터 피가 난 것 같습니다. 그날 무대 위에서 바르톡를 연주하는 동안 피가 났지만 연주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다.”

연주 도중 수술 상처가 벌어지면서 건반에 피가 고이기 시작했지만 손을 멈추지 않았다. 관객의 열광적인 환호에 앙코르까지 다 마친 뒤에야 건반에서 손을 뗐다. 왜 연주를 취소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청중을 실망하게 할 수는 없었다.”

예핌 브론프만이 2015년 10월 오스트리아 빈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열린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연주한 피아노의 모습. 핏자국이 선명하다.


‘핏빛 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만(1958년생)이 한국을 찾는다. 네덜란드 명문 악단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와 함께 11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내한공연을 연다. 한국 방문은 2019년 빈 필하모닉과 협연 이후 4년 만이다. 그는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한다. RCO는 파비오 루이지의 지휘로 베버 오페라 ‘오베론’ 서곡,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들려준다.

최근 클래식비즈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브론프만은 자신의 연주 철학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밝혔다. 그는 “손에서 피가 나든, 또 엄청나게 혼란스러운 일이 바로 옆에서 일어나든, 연주자는 연주에만 몰두해야 한다”며 “고통스럽다고 불편하다고 집중력을 잃으면 안된다. 연주자는 음악으로 말하는 사람인데 좋은 연주를 못 보여주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전부 변명일 뿐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거장다운 품격이다.

브론프만은 러시아 태생의 유대인 피아니스트다. 주빈 메타, 다니엘 바렌보임, 사이먼 래틀 같은 명지휘자들이 앞 다퉈 찾는 이 시대 최고 연주자 중 한 명이다. 7세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했고 10대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1989년 카네기홀에서 데뷔하며 세계적인 연주자로 거듭났다. 1991년에는 전도 유망한 젊은 연주자에 주는 에이버리 피셔 상을 수상했다. 에사 페카 살로넨의 지휘로 LA 필하모닉과 협연한 바르톡 피아노 협주곡 앨범으로 1997년 그래미상을 받았다. 이후 빈 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 RCO 등 세계 3대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수많은 명연주를 펼쳤다.

‘피 묻은 건반 거장’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듣는 예핌 브론프만이 11월 11일 네덜란드 명문 악단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와 내한 공연을 연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그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공부해 음악가로 성장한 데 대해 “인생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은 직접·간접적으로 제 삶에, 제 음악에 영향을 미친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만약에 계속 러시아에 있었다면 다른 방식으로 또 다른 발전을 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이든 설명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일이다”고 덧붙였다.

이번 공연에서 터치하는 곡에 대해서도 말을 꺼냈다. “리스트 협주곡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한 악상들이 담겨 있다”며 “개인적인 감정은 최대한 배제하고, 작곡할 당시 리스트의 생각과 심경을 청중에게 그대로 들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브론프만에게 늘 따라붙는 수식어는 ‘러시아 낭만음악의 스페셜리스트’. 미국에 정착한 뒤 러시아 레퍼토리에 집중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하지만 정작 그는 이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고개를 저었다. 러시아 작곡가 작품이든 헝가리 작곡가 작품이든 자신에겐 모두 똑같이 의미 있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헝가리, 독일, 프랑스로 나눌 것 없이 모든 음악이 각별해요. 작품마다 나름의 특색이 있거든요. 깊이 파고 들수록 서로 다른 면들이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니 러시아 낭만음악 전문가와 같은 특정한 수식어로 저를 한정하고 싶지 않아요. 다른 연주자들도 저와 마찬가지일 겁니다.”

‘피 묻은 건반 거장’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듣는 예핌 브론프만이 11월 11일 네덜란드 명문 악단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와 내한 공연을 연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한국과의 첫 인연은 1988년 서울 신포니에타 창단 연주회였다. 이후 1997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평화와 화합을 위한 97 갈라 콘서트’, 2008년 에사 페카 살로넨이 이끄는 LA 필하모닉의 아시아 투어 등으로 팬들을 마났다. 2019년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열린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에서 협연했다. 그래서 국내에서도 마니아층이 두텁다.

“훌륭한 한국 관객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늘 즐거워요. 한국 문화를 다 좋아하지만 특히 클래식 음악을 향한 청중의 뜨거운 관심에 깜짝 놀랐어요. 정말 열정적이죠. 한국 연주자들은 대단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어요. 미국에서 공부할 때 ‘정 트리오’(첼리스트 정명화·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피아니스트 정명훈),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 등의 연주를 매우 인상 깊게 봤어요.”

함께 호흡을 맞추는 RCO에 대한 기대도 감추지 않았다. “실력, 명성, 전통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예요. 음악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에서 그들의 개성은 확실히 드러나죠. 워낙 실력 있는 악단인 만큼 저와 좋은 앙상블을 선보일 것이라는 데 한 치의 의심도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감정이 아닌 그 음악이 가진 감정을 잘 전달하려고 합니다.”

/park72@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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