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예린 ‘다양한 오브제 활용’·문은주 ‘온라인 짤의 예술화’...제주출신 작가 5인 작품전

인사동 제주갤러리서 18일까지 ‘아틀리에, 그 너머’ 진행
​​​​​​​“레지던시 참여로 그림 바뀌었다” 작품변화 한눈에 실감

민은기 기자 승인 2024.03.09 11:19 | 최종 수정 2024.03.09 20:45 의견 0
장예린 작가가 자신의 작품 ‘picked the petals’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민은기 기자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장예린 작가의 그림에는 항상 소녀가 등장한다. ‘자기 모습을 그린 것인가’라고 물어볼까 했더니, 예상했다는 듯 “저의 자화상을 통해 창조한 소녀입니다”라고 자진 고백했다. 캔버스 속 여자는 장예린의 또 다른 분신인 셈이다.

그림 사이즈가 크다. 162.2×130.3cm다. 보라색 긴 머리카락에 어깨 드러낸 흰색 드레스를 입었다. 그런데 몸의 반쯤이 물에 잠겨 있다. 묘한 분위기다. 오른손에는 노란꽃을 한 송이 들고 있다. 왼손으로는 그 꽃잎을 하나씩 뗀다. 그림 제목은 ‘picked the petals’, 즉 ‘꽃잎 떼기’다.

“제가 지금까지 겪은 온갖 사건들로부터 기인한 트라우마를 바탕으로 자아에 대해 탐구하고 있어요. 기존 작업에서는 소녀를 감싸고 있는 거울과 액자를 매개체로 삼아 외적인 형상은 물론 내면을 드러내려 했어요. 그런데 레지던시(residence)에 참여하며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가상의 배경과 다양한 오브제를 활용해 기억과 감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장 작가를 지난 29일 서울 인사동 제주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제주 출신 작가 5인의 작품전 ‘아틀리에, 그 너머’에서 만났다.

제주도는 2022년부터 제주 작가들의 역량 강화를 위해 수도권 근처에 창작 공간을 제공하는 ‘레지던시 파견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기본 1년이지만 최장 2년까지도 지원받을 수 있다. 경기도 양주 장흥 가나아틀리에 작업 공간을 마련해 어시스트한다. 제주도의 열정적인 문화예술 지원 사업 중 하나다.

이번 ‘아틀리에, 그 너머’는 2023년 3월부터 지난 2월까지 레지던시 파견사업에 참여한 5명(김유림·문은주·박동윤·장예린·현덕식)의 작가들이 레지던시 공간에서의 경험, 그들의 시선과 시간을 담은 회화·영상작품 30여점을 선보인다. 오는 18일까지 계속된다.

장 작가에게 ‘레지던시’는 터닝포인트다. 작품이 바뀌었다. 그는 “비둘기와 귀고리 등이 중요한 소품으로 사용된다. 이들은 일종의 방어기제(防禦機制)로 작용한다”며 “특히 새는 저의 페르소나다. ‘너는 나처럼 상처받지 말라’는 간절한 소망의 대상이다”고 말했다. ‘상처’라는 말에 그가 지금껏 겪은 온갖 사건들이 간단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촛불도 자주 등장한다. 숨을 쉴 때마다 촛불은 흔들린다. 이는 정화를 상징한다. 긍정적 이미지로 작동한다”라며 “하지만 물은 부정적 이미지, 즉 죽음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설명을 듣고 보니 ‘picked the petals’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확 느껴졌다. 몸이 물에 잠겼으니 죽음 앞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인간의 숙명이 그려졌다. 하지만 노란꽃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나는 산다”라며 꽃잎을 하나 떼고, “나는 죽는다”라며 또 꽃잎을 하나 떼며 ‘운’을 테스트하지만 결국엔 삶에 대한 강한 애정으로 귀결됨을 눈치 챌 수 있다.

장 작가는 “경험의 파편들을 직접 노출하기 어려워 간접적으로 오브제들을 활용했다”며 “한곳에서 여러 동료들과 함께 작업하니 오히려 제 자신에게 더 집중하는 시간이 됐다”고 밝혔다.

‘아틀리에, 그 너머’는 메인 전시관(A·B전시장)에서 ‘변주와 확장’을, 아카이브관(C전시장)에서는 ‘아틀리에 풍경’이라는 주제로 나눠 전시되고 있다. 아카이브관은 작가 작업실을 압축적으로 재현해 눈길을 끈다.

메인 전시관에서는 장 작가 등 5명의 독특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모두 다채로운 소재의 확장을 보여준다. 김유림 작가는 파란색의 ‘블루’가 지닌 이중적 상징성을 심리학적 의미로 재해석한 회화작품을 내놓았다. 박동윤 작가는 물과 해를 모티브로 삼아 색의 파동과 에너지를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회화적 실험을 선보이며, 현덕식 작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의 한계를 극대화해 궁극적으로 자아 성찰에 이르고자 하는 한국화 작품을 출품했다.

문은주 작가가 자신의 작품 ‘Meme Painting’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민은기 기자


또 한명의 눈에 띄는 작가는 문은주다. 온라인과 모바일에서 유행하는 ‘짤’을 과감하게 예술로 끌어 들였다. TV드라마에 나왔던 웃고픈 장면이나 동물들의 재미있는 포즈 등을 그림으로 그린 뒤, 그것을 다시 설치미술로 확대했다.

“리처도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쓴 단어 ‘밈(meme)’에 주목했습니다. 최근 눈에 띄는 현상 가운데 하나는 재미있는 이미지와 영상을 서로 주고받는 일이에요. 단순 유행을 넘어 하나의 문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유명한 장면을 따로 떼어내 그림으로 표현했어요.”

‘밈’이 대세가 되면서 모든 이들은 콘텐츠의 생산자, 소비자, 전달자가 되는 세상이 됐다. 널리 이슈가 되고 공유가 되는 영상, 사진, 그림, 문구 등은 시시각각 생성되고 사라진다. 문 작가는 이런 변화를 재빨리 캐치한 것.

작은 그림 30여개를 배치해 하나의 큰 작품으로 만들었다. 한쪽 벽면을 통째로 채우고 있는데 제목이 ‘밈 페인팅(Meme Painting)’이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한번쯤 온라인과 모바일에서 본 기억이 있는 장면들이다. 전시될 때마다 그림의 위치를 조금씩 바꿔 가변적 아름다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문 작가는 “온라인상의 하위문화 콘텐츠와 제작방식을 차용한 회화에서 출발해 영상, 조각, 설치로의 확장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레지던시 참여로 작품을 다루는 범위가 더 크고 넓어졌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강지선 큐레이터(홍익대학교 연구교수)는 “레지던시의 작업실을 방문해 작가들과 나누었던 창작의 고민과 결과, 향후 활동에 대한 기대감, 관객과의 소통을 향한 열망을 전달하고 싶었다”면서 “레지던시를 계기로 더 깊어진 작가 5인의 작업을 만나볼 좋은 기회다”라고 말했다.

/eunki@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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