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기막힌 아이디어를 냈어요. ‘한 사람이 한두 악장씩 연주하는 유럽 갈라 콘서트 느낌을 내면 어때?’라고 제안했죠. 그리고는 ‘그 솔리스트들을 다른 사람을 초청하지 말고 당신들이 직접 해보면 어때?’라고 덧붙이더군요. 연주자들 모두 흔쾌히 ‘OK’로 화답했어요. 자신의 악기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곡을 하나 둘씩 선보이며 전체 프로그램을 완성하는 겁니다. 무대에서 각자 좋아하는 곡을 연주할 기회도 매우 소중한데, 무엇보다 오케스트라의 솜씨가 좋아 협연자들을 잘 받쳐줄 것이기 때문에 무척 기대됩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스베틀린 루세브는 지난달 고잉홈프로젝트(Going Home Project)’의 첫 음악제 ‘더고잉홈위크(The Going Home Week)’를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고잉홈프로젝트의 시작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손열음이 예술감독으로 있는 평창대관령음악제는 전 세계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연주자를 모아 평창페스티벌오케스트라(PFO)를 결성했다. 음악제 때만 모였다가 해산하는 스페셜 악단이다. 플루티스트 조성현, 첼리스트 김두민, 호르니스트 김홍박도 참여해 호흡을 맞췄다.
대관령음악제는 막을 내렸지만 1년에 달랑 한번 짧은 만남으로 끝내기에는 아쉬움이 컸다. 그래서 조성현, 김두민, 김홍박, 스베틀린 루세브, 앙렉상드로 바티 등은 장기적인 음악 비전을 공유할 수 있는 정규 악단 설립의 필요성에 뜻을 모았다. 착실한 준비 과정을 거쳐 지난해 말 드디어 고잉홈프로젝트를 론칭했다.
원래는 해외 오케스트라 등에서 활동하는 한국 아티스트들이 주축이 되는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홈’의 의미를 ‘집’ ‘조국’에서 벗어나 ‘음악’ ‘가족’의 개념으로 확장했다. 이 덕분에 더 많은 연주자들이 모였다.
올해의 더고잉홈위크는 7월 30일부터 8월 4일까지 롯데콘서트홀에 열리고 있다. 14개국 50개 교향악단에서 활약하고 있는 80여명의 아티스트들이 어벤저스급 오케스트라를 구성했다. 오케스트라 공연 4회, 실내악 공연 2회 등 모두 여섯 차례의 음악회를 준비했다.
8월 2일 고잉홈프로젝트의 세 번째 프로그램 ‘볼레로: 더 갈라’가 공연됐다. 스베틀린 루세브가 말한 것처럼 스타 연주자 14명이 협연자로 나섰다. 모두들 이름만 들어도 흥분되는 연주자들이다. 이들은 솔로이스트로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뒤, 곧바로 오케스트라 자리로 들어가 다시 악단의 단원이 되는 이채로움을 선보였다.
오보에→바이올린 2대→비올라 2대→바순→첼로→바이올린·더블베이스→하프→플루트→바이올린→바이올린→클라리넷의 순서로 각기 다른 악기가 협연을 하다가 조금씩 그 편성이 커지며 마지막에는 모두가 함께 연주하는 대장관이 펼쳐졌다. 피날레로 연주한 라벨 ‘볼레로’의 음악적 구성을 그대로 본 딴 것인데, 말이 필요 없는 퍼펙트 콘서트였다. 관객들은 ‘잠깐 한눈 팔면 음악 놓칠라’는 마음으로 옴짝달싹 못하고 2시간 30분 ‘얼음’이 되어 감상했다.
1부의 첫 주자는 오보에 연주자 함경. 도메니코 치마로사의 ‘오보에 협주곡 C단조’를 들려줬다. 차분한 애상조의 선율(1악장)에 이어 생기발랄(2악장) 음악을 선사했다. 연주를 마친 뒤 퇴장하지 않고 오케스트라 단원들 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그 뒤를 이어 바이올리니스트 이직무와 이은주가 등장했다. 두 사람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D단조’ 중 2악장을 연주했다. 그리고 비올리스트 헝웨이 황과 루크 터렐이 나와 역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6번 B플랫장조’ 중 3악장을 들려줬다. 더블 바이올린과 더블 비올라의 흔치 않은 협연에 귀를 쫑긋 세웠다.
바순 연주자 유성권이 배턴을 이어 받았다. 그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바순 협주곡 B플랫장조’ 중 1악장으로 낮고 굵은 저음의 매력을 펼쳤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악단의 반주 없이 나홀로 개인기를 선보여 환호를 받았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현악 사중주 1번’ 중 2악장 ‘안단테 칸타빌레’는 아름다운 선율로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다. 오죽하면 작곡가가 “모두들 2악장만 듣고 싶어 한다”고 하소연할 정도다. 톨스토이도 이 악장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첼리스트 김두민은 차이콥스키가 첼로곡으로 편곡한 버전을 들려줬다. 활은 멈췄지만 마지막 한음까지 청중에게 전하려는 듯 왼손가락으로 끝까지 코드를 누르는 모습은 전율이었다.
솔직히 더블베이스는 주목받지 못하는 악기다. 늘 첼로의 뒤에서 숨죽여 울고 있다. 하지만 오늘은 더블베이스가 당당한 주인공이다. 더블베이시스트 부락 말랄리는 바이올리니스트 조윤진과 함께 지오반니 보테시니의 ‘그랑 듀오 콘체르탄테’로 엑설런트 기량을 뽐냈다.
2부에서는 하피스트 시반 마겐이 클로드 드뷔시의 ‘성스러운 춤과 세속적인 춤’을 연주했다. 고색창연한 악기지만 누가 어떻게 연주하는가에 따라 무한한 확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해준 시간이었다.
플루티스트 조성현은 프랑스의 여성 작곡가 세실 샤미나드의 ‘작은 플루트 협주곡 작품번호 107’을 선사했다. 어느새 오케스트라 편성이 훨씬 더 커졌다. 목관, 금관, 팀파니, 퍼커션 등이 가세했다. 조성현은 ‘고막남친’이 되어 이들과 원더풀 하모니를 이루며 풍부한 음악을 들려줬다.
바이올린 연주자 플로린 일리에스쿠는 이날 콘서트의 악장을 맡아 고잉홈프로젝트 오케스트라를 리드했다. 그도 솔로이스트로도 무대에 올랐다. 헨릭 비에냡스키의 ‘화려한 폴로네이즈 작품번호 4’로 솜씨를 뽐냈다. 트럼펫의 멋진 오프닝에 이어 패기 넘치는 바이올린 선율로 관객을 휘어잡았다.
‘치간’은 유럽의 유랑 민족인 ‘집시’를 뜻하는 단어 중 하나다. 바이올리니스트 스베틀린 루세브는 모리스 라벨의 ‘치간’을 연주했는데, 전반부의 무반주 바이올린 선율과 후반부의 협연 파트가 귀를 사로잡았다. 루세브는 연주를 마친 뒤 곡을 든든하게 받쳐준 하프 연주자를 찾아가 악수하며 멋진 케미를 가능하게 해준 고마움을 표시했다. 훈훈한 장면이다.
아티 쇼는 20세기 최고의 재즈 클라리네스트 중 한 사람이다. 조인혁은 아티 쇼가 작곡한 ‘클라리넷 협주곡’을 통해 재즈의 매력을 전달했다. 특히 중간에 색소폰 연주자 4명이 동시에 일어나 “이게 바로 재즈다”를 보여준 장면은 멋졌다.
마지막 곡은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 모든 출연자들이 힘을 합쳐 매머드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스네어 드럼의 신호에 맞춰 클라리넷, 바순, 트럼펫, 테너 색소폰, 소프라노 색소폰, 호른, 피콜로, 오보에, 트럼본, 첼로, 더블베이스, 바이올린 등이 하나씩 가세하며 덩치을 키우더니 최고 절정의 순간에 화산이 폭발하듯 엄청난 음악를 토해냈다. 어느 부분에서 어느 악기가 연주하는지를 한눈에 볼수 있어 시각적 만족감이 높았다.
2부에서 연주한 5곡은 브누아 윌만이 지휘를 맡아 더 완성도 높은 음악을 들려줬다. 손열음이 하프시코드, 첼레스타, 피아노를 맡아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힘을 실어준 모습도 이채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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