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타이 손’ 풀스토리④] 누나·형도 음악 전공...쇼팽 주로 연주해 친구들 ‘숀팽’ 별명

아버지가 중국 ‘태산’에서 이름 따와 작명
사물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습성 물려받아

민은기 기자 승인 2022.08.12 08:00 의견 0
쇼팽 콩쿠르 우승자 당 타이 손이 오는 8월 2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내한 공연을 연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당 타이 손이라는 이름은 아버지 당 딘 훙이 지었다. 중국의 ‘태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인데, 베트남에서는 ‘아버지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태산처럼 높고 큰 것이며, 어머니가 해주는 것은 강을 흘러가는 무한한 물과 같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훙은 그것을 아들의 이름에 쓴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손은 가족이나 친구로부터 ‘손’이라고 불렸는데, 그것이 퍼스트 네임이다. ‘타이’가 미들 네임이고, ‘당’이 패밀리 네임 즉 성(姓)에 해당한다. 한자로 표기하면 ‘鄧泰山(등태산)’이 된다. 베트남어의 ‘S’ 발음은 ‘SH’에 가깝기 때문에 ‘손’은 ‘숀’ 또는 ‘쇼온’에 가깝게 발음한다. 그가 언제나 쇼팽을 주로 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은 그를 ‘숀팽’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 ‘이미 자식 2명’ 리엔, 네 번째 남편 만나 당 타이손 낳아

여기서 잠깐 당 타이 손의 가족사를 살펴본다. 어머니 타이 티 리엔은 1918년 사이공 출신이다. 음악을 하고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태어나 가톨릭계 학교에 들어가 엄격한 교육을 받았고, 30세에 프랑스에 유학해 피아노를 계속 공부했다. 당시 파리에서는 식민지를 해방시키고 독립시키자는 공산주의자 그룹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는데, 리엔은 거기에 베트남 여성의 대표로 소속돼 있었다.

이 그룹에는 파블로 피카소나 이브 몽탕 같은 예술가, 지식인, 영화인들이 많이 있었다. 이 그룹 가운데 리엔의 세 번째 남편이 된 인물이 있었다. 그는 베트남 초대 체코 대사에 임명돼 부인인 리엔과 함께 프라하로 갔고, 이곳에서 1949년 손의 누이가 되는 챤 튀 하가 태어났다. 프라하에서 베트남으로 되돌아왔을 때는 인도차이나 전쟁의 한가운데였고, 그는 정글 속에서 가혹한 생활을 해야 했다. 이때 세 번째 남편과 사별하게 됐고, 리엔은 몸속에 이미 또 다른 아이가 자라고 있음을 알게 됐다. 1953년에 태어난 챤 탄 빈이었다. 리엔은 두 명의 어린 자녀를 키우면서 연극과 무용, 음악 등을 포괄하는 예술가 그룹에 소속돼 활동하고 있었는데, 바로 여기서 시인이었던 당 딘 훙을 만났다.

당 딘 훙은 1924년에 태어났다. 전통적인 엄격한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랐는데, 자신과 정반대의 활달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리엔에게 첫눈에 호감을 느꼈다. 훙과 리엔이 결혼했을 즈음, 리엔은 이미 40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아이는 낳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훙은 어떻게든 자신을 닮은 아이 하나를 원했다.

◇ 시인 이었던 아버지, 프랑스 음악잡지 번역해 아들에게 보내줘

당 타이 손이라는 이름은 시인이었던 아버지 당 딘 훙이 중국의 ‘태산’에서 이름을 따와 지었다. 당 타이 손은 사물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습성을 아버지에게서 물려 받았다. Ⓒ당 타이 손 페이스북 캡처


1958년에 손이 태어난 뒤로 훙은 리엔의 전 남편의 자식들에게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죽은 친아버지가 요직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정부가 교육자금이나 생활편의 등 여러 가지를 돌봐주었다. 손의 누이는 장학금으로 중국에 유학해서 피아노를 공부했고, 형은 하노이 음악원에서 8년 동안 첼로를 전공했다.

아홉 살 위인 누나는 특히 손을 귀여워했다. 형은 전형적인 남자아이의 성격을 가졌는데 활발한 장난꾸러기였다. 아버지 훙도 손에게 항상 형처럼 ‘남자다울 것’을 강조하곤 했다. 하지만 손은 조용히 사색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편안히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밖에 나가 뛰어 놀고, 장난 치고, 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노는 것은 내켜하지 않았다.

한편 아버지 훙은 아들이 피아노 연습을 하는 동안 끈기 있게 지켜봐주었다. 그리고 왼손잡이였던 손이 피아노를 칠 때 언제나 몸이 왼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는 것을 뒤에서 보고 항상 자세를 고쳐주었다. 프랑스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했던 훙은 나중에 손이 모스크바 음악원에 유학했을 때 프랑스의 유명 음악잡지 ‘르 몽드 드 라 뮈지크’를 베트남어로 번역해 편지와 함께 자주 보내주곤 했다. 손이 아버지와 보낸 시기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언제나 사물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성격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어머니로부터는 강한 의지와 전향적인 자세를 물려받았다.

베트남에서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온 점성술로 그 사람의 성격을 맞춘다거나, ‘납음(納音)’이라고 부르는 운세표로 인생의 향방을 점치는 일이 많았다. 이 표에 의하면 개띠 해에 태어난 손의 상징은 ‘고원에 서있는 나무’였다. 성격은 보수적이고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받기 쉽다고 나와 있었다. 손은 납음을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자신의 운세를 보곤 했는데, 레퍼토리도 바흐나 브람스보다는 프랑스 작품 쪽이 좋다고 나와 있곤 했다.

◇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 가브릴로프와 함께 콘서트 ‘절친’

1980년 쇼팽 콩쿠르에 출전한 당 타이 손과 이보 포고렐리치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함께 공부했다. 두 사람은 똑같이 1958년생이다. Ⓒ인터넷 캡처


이보 포고렐리치(1958년생)와 안드레이 가브릴로프(1955년생)는 손과 ‘동문수학’한 사이다. 크로아티아 출신으로 손과 동갑이었던 포고렐리치는 일찍이 11세 때부터 소련에 유학을 해서 모스크바 음악원 부속 중악음악학교와 모스크바 음악원 두 군데를 거치면서 러시아에서 이른바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사실 이름 있는 국제 콩쿠르 입상자 가운데 동구권 출신은 거의 이 코스의 출신자였다. 큰 키에 잘 생긴 외모, 카리스마를 풍기는 스타적 기질, 연주 또한 개성적이었던 포고렐리치는 처음부터 주목을 끄는 존재였다. 그는 손과 같이 모스크바 음악원의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나이는 같았지만, 학년은 일찍 유학 온 포고렐리치 쪽이 3년 위였다.

그는 손이 쇼팽 콩쿠르에 참가하기 위해 국내 오디션을 통과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손을 자기 방에 초대해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많은 레코딩 가운데 여러 가지를 들려주기도 했다. 손이 놀랐던 것은 그 레코딩 가운데 포고렐리치 자신이 직접 연주한 프로코피예프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포고렐리치는 커다란 스캔들이 일었던 쇼팽 콩쿠르 이후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되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손과의 관계는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포고렐리치의 러브 스토리도 유명하다. 포고렐리치는 열일곱 살 때인 1976년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알리자 케자라체를 처음 만났다. 알리자는 1937년생으로 1958년생인 포고렐리치보다 무려 21살 연상이었다. 게다가 아들을 혼자 키우고 있는 이혼녀였다. 포고렐리치는 청혼을 하지만 퇴짜를 맞는다. 이대로 물러설 포고렐리치가 아니다. 그극 끝없이 프로포즈를 반복했고, 결국 1980년 쇼팽 콩쿠르 스캔들 이후 두 사람은 결혼한다. 하지만 1996년 안타깝게도 알리자가 오랜 투병 끝에 간암으로 숨진다. 이 충격으로 포고렐리치는 오랜 시간 피아노 앞에 앉지 않았다. 2002년이 되어서야 다시 팬들 앞에 나섰다.

손의 절친이 되어준 안드레이 가브릴로프는 모스크바 출신이다. 그는 1974년 차이콥키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그 해에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1915~1997)를 대신해 무대에 서며 데뷔했다. 가브릴로프는 스케일 큰 비르투오조풍의 연주 스타일을 갖고 있는데, 1957년에 러시아 순회연주를 왔던 글렌 굴드(1932~1982)의 연주를 듣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그를 뛰어넘는 연주자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가브릴로프는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하기로 결정했을 때 약 5개월 동안 연습실에 틀어박혀 날마다 15~17시간씩 연습을 했던 인물이다.

가브릴로프와 손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알게 됐다. 성격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전혀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의기투합했다. 두 사람은 1982년에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콘체르토 네 곡을 연주하는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서로 퍼스트와 세컨드를 바꿔가며 쳐보고, 음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분석해서 연습을 하는 사이 이들은 앙상블의 묘미를 배워나갔고 음악을 하는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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