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타이 손’ 풀스토리①] 쇼팽콩쿠르 상장·상금 그냥 시상식장에 놓고와 가슴 철렁

니콜라예바 “베트남 젊은 남자가 우승” 예언 적중
‘심사위원 사퇴’ 아르헤리치 축하 전보 받고 행복

민은기 기자 승인 2022.08.08 22:31 | 최종 수정 2022.08.09 16:06 의견 0
1980년 아시아인 최초로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당 타이 손이 오는 8월 21일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에서 리사이틀을 연다. ⒸHirotoshi Sato/마스트미디어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기자] 당 타이 손은 모든 역경을 이겨 낸 초월적 음악의 힘을 보여주는 피아니스트다. 1980년 아시아인 최초로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다. 현존하는 피아니스트 가운데 ‘가장 쇼팽다운 연주자’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가 오는 21일(일)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내한공연을 연다. 이에 앞서 16일(화) 춘천문화예술회관, 19일(금) 통영국제음악당에서도 팬들을 만난다.

이번 리사이틀 1부에서는 쇼팽과 더불어 당 타이 손의 주력 레퍼토리인 드뷔시와 라벨 등 프랑스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한다. 라벨이 옛 무곡의 리듬을 활용해 신고전적 향취에 흠뻑 빠질 수 있도록 만든 사랑스러운 소품 ‘고풍스러운 미뉴에트’와 그의 대표작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들려준다. 인상주의 음악의 정수인 드뷔시의 ‘영상’ 1권, 그리고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은 프랑크의 ‘전주곡, 코랄과 푸가’ 등을 터치한다.

2부는 쇼팽의 음악으로만 구성했다. 그 중에서도 춤곡을 엄선해 들려준다. 폴로네즈, 왈츠, 마주르카와 더불어 자주 연주되지 않았던 ‘에코세즈’와 ‘타란텔라’까지 쇼팽의 손을 거쳐 콘서트용으로 재탄생한 대표적 춤곡을 선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 타이 손을 쇼팽 콩쿠르 챔프로만 이해한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그의 ‘미러클 스토리’를 알고 나면 생각이 바뀐다. 출신지가 공산국가 베트남이라는 특수성과 남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겸손한 성품 때문에 그동안 그의 진면목은 드러나지 않았다. 이번 공연을 주최하는 마스트미디어의 김용관 대표도 이런 점이 늘 아쉬웠다.

김 대표는 지난 7월 초 페이스북에 “당 타이 손의 스토리는 한번도 10km 단축마라톤 대회 조차 참가해보지 않은 학생이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것과 같은 기적의 이야기다”라고 적었다. 이어 “전쟁과 피난이라는 배고픔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대부분의 청소년기를 보냈고, 10년간 토굴 속에서 피아노라고 할 수도 없는 형편없는 악기로 피아노를 배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베트남이 공산국가가 되어 좋은 점은 소련의 외교정책으로 모스크바 음악원에 갈 수 있게 된 것, 열악한 환경에서 배운 피아노 실력은 어느 교수도 맡지 않으려 했을 정도로 체계적이지 못했다는 것, 하지만 그로부터 5년 뒤 아무런 경력도 적혀있지 않은 ‘모스크바 음악원 수학 중’이라는 한줄짜리 자기소개서로 쇼팽 콩쿠르에 참가해 우승을 거머쥔 그의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싶었다.

당 타이 손은 우승하고도 너무 무서워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한채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직위에서 호텔로 찾아와 거의 끌고 갔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한 번도 대중 앞에서 연주해 본 적도 없고, 한 번도 작은 동네 콩쿠르조차 참가해 보지도 못했고, 단 한 번도 오케스트라와 연주해 본 적도 없이 쇼팽 콩쿠르를 우승했다. 쇼팽이 축복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기적의 주인공이다.

김 대표는 지난 2003년 자신이 발행했던 월간 매거진 ‘International Piano’의 7~10월호에 그의 풀스토리를 연재했다며, 원하는 사람들에게 기사를 보내주겠다고 적었다. 그래서 자료를 받았다. 당시 일본에서 출간된 당 타이 손의 전기 ‘쇼팽에게 사랑받은 피아니스트’(이구마 요시코 저)를 상당 부분 참고해 작성한 기사였다.

기사는 길지만 막상 읽어보니 우리가 몰랐던 당 타이 손의 모습이 가득하다. 흥미진진하다. 술술 읽힌다. 당 타이 손의 이번 내한공연을 더 즐겁게 감상하도록 돕는 가이드북이 될 수도 있다. 8회에 걸쳐 정리해 싣는다. 이해를 돕기 위해 새로 내용을 추가하고 사진도 덧븥였다.

● “내가 우승했다고” 너무 겁이 나 시상식 가지 못한 채 호텔방서 ‘덜덜덜’

1980년 쇼팽콩쿠르에서 우승한 베트남 출신의 당 타이 손. 이보 포고렐리치가 대중의 관심을 독차지해 손해를 봤지만, 세련되고 아름다운 연주로 심사위원들과 팬들을 사로 잡았다. Ⓒ인터넷 캡처


1980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는 음악계가 뒤집힌 ‘이변’이 일어났다. 유구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쇼팽 콩쿠르에서 동양인으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그것도 전쟁의 폐허 속에 음악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베트남에서 온 청년이 당당히 우승했기 때문이다. 스물두 살 젊은 청년의 등장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세계 각국에서 220명의 참가 신청서가 콩쿠르 사무국에 도착했고, 서류심사를 통과한 149명으로 경연이 시작됐다. 그 중에서 2차 예선에 오른 사람은 12명이었다. 대회에 참가한 당 타이 손에게는 3차 예선 통과와 결선 진출 발표가 가장 기뻤던 순간이었다. 오케스트라와 처음으로 협연을 해볼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행복했다.

결선에서 아무런 욕심 없이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들려줬고, 연주를 마치자마자 호텔로 직행했다. 다른 참가자들의 연주를 듣거나, 콩쿠르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콩쿠르가 진행된 3주 가까이 너무 긴장해있었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혼자가 되고 싶었다. 그냥 쉬고 싶었다.

시상식이 있던 날, 우승자 손은 행사가 열린 바르샤바 필하모니 홀로 가지 못하고 호텔방 침대 안에서 머뭇대고 있었다. 자신이 1위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쇼팽 콩쿠르 역대 우승자 명단에는 마우리치오 폴리니, 마르타 아르헤리치, 크리스티안 짐머만 등 최정상급으로 활약 중인 피아니스트들이 올라 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다는 것 아닌가.

그 화려하고 영예로운 시상식 자리에는 도저히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기쁨보다 떨림과 두려움이 앞섰던 것. 결국 그는 쇼팽 콩쿠르 직원들이 호텔까지 찾아와 “우승자인 당신 없이는 시상식이 시작되지 못한다”고 통사정을 한 끝에 거의 양쪽 팔을 붙잡힌 채로 시상식장에 끌려갔다.

쇼팽 콩쿠르의 결선과 시상식 등이 열리는 바르샤바 필하모니 홀은 1901년에 지어진 견고한 석조 건물이다. 1939년 9월에 독일군의 폭격을 당했으나 전후에 재건됐다. 당당한 외관과 함께 내부에는 붉은색 카펫이 깔려 있고, 실내 장식 또한 역사의 무게와 품위를 느끼게 한다. 객석수는 1072석. 콩쿠르 개최 기간 동안에는 필하모니 홀의 무대 벽면에 커다란 쇼팽의 초상화가 걸린다. 참가자들이 쇼팽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연주하도록 하는 것이다.

쇼팽 콩쿠르는 잘 알려진 대로 과제곡이나 자유곡이 모두 쇼팽의 작품 일색이다. 쇼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쇼팽의 악곡 양식을 잘 소화하여 연주하는 것,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 등 많은 요소가 심사의 대상이 된다. 결국 빼어난 ‘쇼팽 연주자’를 선발하는 것에 무게를 둔다. 심사위원은 참가자의 연주 성숙도와 함께 장래성에도 큰 비중을 둔다.

1차 예선에서는 녹턴, 에튀드, 스케르초가 과제곡으로 주어진다. 이를 통해 서정적으로 노래하는 능력, 고도의 테크닉, 작품 구성력 등을 판단한다. 2차 예선은 발라드, 프렐류드, 왈츠, 폴로네즈 등 길이가 긴 작품이 과제곡으로 주어져 참가자의 개성이 심사된다. 3차 예선 과제곡은 소나타, 마주르카 등 피아니스트로서의 높은 자질이 요구되는 작품들이다. 결선에서는 협주곡을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고 이때에는 연주자의 모든 자질을 통합적으로 살펴본다.

이러한 독특한 콩쿠르를 만든 사람은 러시아 태생의 폴란드 피아니스트 예지 주라블레프(1886~1980)다. 폴란드 피아노 악파의 기초를 구축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쇼팽 기념 바르샤바 고등음악학교의 교수를 오랫동안 역임하면서 후학을 양성했던 인물이다. 제1회 대회는 1927년에 개최됐다. 첫 우승자는 소련의 레프 오보린. 그는 전설적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반주자로 유명하다.

● 우승상금 바르샤바에 예치했더니 ‘서방 망명 계획’ 한바탕 소동

1980년 쇼팽콩쿠르에서 이보 포고렐리치가 격정에 차서 청중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인터넷 캡처
1980년 쇼팽콩쿠르에서 이보 포고렐리치는 턱시도에 나비넥타이가 아니라 끈넥타이를 매고 연주하는 등 자유분방한 모습을 선보였다. Ⓒ인터넷 캡처


당황했던 탓인지, 순진했던 탓인지, 손은 시상식에서 받은 상장과 상금을 챙겨 가야한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시상식장에 그대로 두고 왔다. 다음날, 콩쿠르 사무국 사람들이 쇼팽협회에서 수여하는 부상 수여식에 참가해야 한다고 호텔로 마중을 왔을 때에서야 그게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았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사무국 사람들과 함께 부랴부랴 필하모니 홀로 갔다. 다행스럽게도 무대 한 가운데에 그대로 놓여있는 ‘분실물’을 발견했다. 손은 우승상금을 콩쿠르 협회 사무국에 예치해두었다가 다음 해에 그곳에서 우승자 콘서트가 열릴 때에 받기로 했다.

쇼팽 콩쿠르의 부상에는 세계 각지의 음악관련 단체, 회사, 개인이 기증한 돈과 물품들이 포함된다. 부상의 합계금액이 콩쿠르 협회에서 주는 우승상금보다 고액이 되기도 한다. 손이 받은 부상 가운데 가장 액수가 큰 것은 상금 2000달러다. 당시 베트남에서는 10달러 정도면 한 가족이 한 달 동안 생활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콩쿠르 이후 ‘베트남 최고의 거부’ 등으로 불릴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이 소식은 곧 소련의 KGB에도 알려졌다. 모스크바 음악원에 유학 온 손을 가르치고 있었던 블라디미르 나탄슨 교수는 KGB로부터 조사를 받아야했다. 제자가 상금을 바르샤바에 두고 왔다는 정보를 보고 받았는데, 혹시 망명을 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당시 소련에서는 망명자가 나오면 그 가족은 물론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잘 알고 있던 나탄슨 교수는 몸이 떨렸다.

손이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맨 먼저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교수의 초췌한 얼굴이었다. 손은 “선생님, 절대 아니에요. 망명 같은 건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통감했으니까요. 상금은 내년 콘서트 때까지 예치해두었다가 받게 됐어요”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교수는 두 다리를 뻗고 잠을 잘 수 있었다.

손이 쇼팽 콩쿠르에 참가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본격적인 연습을 개시했던 것은 모스크바 음악원에 유학한 지 2년째 되던 해다. 나탄슨 교수에게는 말하지 않고 몰래 연습하고 있었다. 아직 때가 이르니 콩쿠르 참가는 안된다는 말을 들을 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에서였다.

1980년에 쇼팽 콩쿠르가 있고, 1982년에 차이콥스키 콩쿠르가 있었다. 그는 먼저 쇼팽 콩쿠르에 참가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고, 그런 다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도전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레슨 과제곡들을 공부하는 틈틈이 혼자서 쇼팽의 이런저런 작품들을 병행해서 연습했다.

1978년에 개최된 제6회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손이 콩쿠르와 피아니스트에 대해 여러가지를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모스크바 음악원 동료들과 피아노 부문의 경연장인 모스크바 음악원 연주홀에서 콩쿠르를 지켜보았고, 미하일 플레트네프(1위·소련) 등의 연주를 들었다.

2년 후인 1980년에 모스크바 음악원에서는 쇼팽 콩쿠르에 참가할 피아니스트들을 대상으로 오디션이 열렸다. 소련에서는 국제 콩쿠르에 참가하기 위해 세 차례의 오디션을 거쳐야 했다. 이 중에 두세 명이 선발돼 콩쿠르 참가 티켓을 손에 쥐게 되는데, 손은 이 3단계의 오디션을 무사히 통과했다.

그때까지는 누구도 그의 이름을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었지만, 이후로는 모스크바 음악원 내에서 일약 유명해지게 됐다.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를 지내기도 했던 타티아나 니콜라예바(1924~1993)도 오디션 연주를 들었는데, 그 해 여름 바르샤바 여행에 나섰던 그가 현지에서 이런 선언을 했다. “올해의 쇼팽 콩쿠르에서 누군가가 월계관을 쓴다면 그건 분명 베트남에서 온 젊은 남자아이가 될 거요.” 결국 니콜라예바의 예언은 멋지게 적중했다.

● 연주복 없어 하루만에 부랴부랴 옷 맞춰 입고 결승 연주

1980년 쇼팽콩쿠르에서 우승한 베트남 출신의 당 타이 손(왼쪽에서 세 번째)이 다른 수상자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당 타이 손이 입고 있는 양복은 결선 전날 부랴부랴 사입은 ‘급조 연주복’이다. 맨 왼쪽 여성이 2위를 차지한 러시아 출신의 타티아나 셰바노바다. 그는 연하의 폴란드 피아니스트와 결혼해서 평생 폴란드 비드고슈츠 음대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인터넷 캡처


오디션은 통과했지만 난감한 일이 또 남아 있었다. 콩쿠르 사무국에 제출하는 서류에는 참가자의 경력을 기입하게 되어 있었던 것. 콩쿠르 참가경력 및 수상경력, 콘서트 기록 등을 적어야 하는 그 칸에 손은 ‘베트남 하노이 음악원 졸업, 모스크바 음악원 재학’ 밖에 쓸 것이 없었다. 사무국이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는 베트남 출신의 피아니스트를 서류 심사에서 통과시켜줄 지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사무국에서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공부하고 있다면 괜찮겠다고 판단해 참가가 인정됐다.

쇼팽 콩쿠르를 석 달 남겨놓은 1980년 여름에 위기가 닥쳤다. 한창 연습해야 할 여름 한 달 동안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됐다. 그 해에 모스크바 올림픽이 열리게 되자, 소련 당국은 모스크바 음악원의 기숙사 시설을 외국 선수들과 특별한 방문객들의 숙소로 내어주기로 했다. 기숙사에 들어와 있던 외국 유학생들은 한 달 동안 기숙사를 비워주는 대신, 흑해 연안의 풍광 좋은 곳에 마련된 리조트로 잠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손은 크게 낙담했다.

콩쿠르를 포기해야 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학생들은 옮겨간 리조트에서 매일 수영을 하고 특별한 여름휴가를 보내며 만족스러워했지만, 피아노를 못치게 된 손으로서는 마음이 지옥이었다. 하지만 그는 의자에 앉은 채 무릎 위에 손가락을 대고 움직이며 연습을 했다. 악보를 보면서 건반을 머리 속에 떠올렸다. 식탁에 앉을 때에도 손가락을 쉬지 않고 움직여서 항상 손이 굳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한 달 후 모스크바에 돌아와서 피아노를 다시 만졌을 때 그는 자신의 방법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단기간 내에 원상태로 회복됐다.

10월이 되어 손은 바르샤바로 향했다.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온 참가자들도 많았지만 그는 완전히 혼자였다. 처음으로 대회장의 모습을 보러 갔던 것 이외에는 시내 구경조차 하지 않고, 홀과 연습장과 호텔만을 왕복했다. 그는 1차 예선에서 ‘녹턴 D플랫 장조 Op.27-2’ ‘스케르초 2번 b플랫 단조 Op.31’ ‘에튀드 a단조 Op.25-4’를 연주했다.

제10회 쇼팽 콩쿠르는 ‘이보 포고렐리치 스캔들’에 휘말렸던 대회다. 그는 때로는 악보의 세부 지시사항을 과감히 무시하며 자신의 스타일로 곡을 해석했다. "포고렐리치가 쇼팽을 죽였다"며 불쾌한 목소리가 터졌다. 그 반대로 "포고렐리치가 새로운 쇼팽의 시대를 열었다"며 환영의 박수도 나왔다. 그의 의상도 쇼킹했다. 가죽바지를 입었고 전형적인 나비 네타이 대신에 끈 넥타이를 걸쳤다. 엄격하고 보수적인 콩쿠르 무대에 '자유분방한 돌아이'가 등장했다. 언론은 "포고렐리치가 쿠데타를 기획했다"고 표현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포고렐리치가 1차 예선에서 합격한 사실에 화가 난 영국 출신의 심사위원 루이스 켄트너가 심사를 중단하고 고국으로 돌아가 버리자, 심사위원들 사이에 한 차례 소동이 일었다. 그 후 3차 예선에서는 정반대로 포고렐리치가 탈락한 것에 항의해 이번에는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이후의 심사과정을 모두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저 아이는 천재란 말이오!” 아르헤리치가 텔레비전 카메라를 향해서 분노에 차서 일갈했던 한 마디는 일파만파로 전해졌다. 아르헤리치의 의견에는 심사위원이었던 니키타 마갈로프(1912~1992) 역시 찬성의 뜻을 표했다.

손은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결선진출자 일곱 명에 뽑혔다. 그러나 연주 때 입을 정장 수트가 없었다. 24시간 이내에 옷을 만들어줄 수 있는 상점을 찾아야 했던 그는 ‘포고렐리치 스캔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사실 콩쿠르에 참가하기 직전, 그는 무대에서 입을만한 양복을 한 벌도 가지고 있지 않아 걱정됐다. 급히 모스크바 시내의 백화점에 가서 학생용 교복 비슷한 걸 한 벌 샀는데, 베트남 출신의 동료 친구들은 경악했다. “텔레비전으로도 중계가 되는 국제적인 이벤트에 그런 차림으로 나간다는 것은 베트남 사람의 수치다”라며 말렸다. 결국 그는 친구들이 어렵게 구해준 양복과 구두를 들고 바르샤바로 향했던 것이다.

예선 때에는 줄곧 그 옷으로 버텼지만 결선 무대는 달랐다. 격식 있는 연주복이 있어야 했다. 급한 마음에 쇼팽협회로 달려가서 바르샤바 시내에서 가장 빠르게 옷을 만드는 가게를 수소문했다. 협회 직원들이 알아봐준 상점에 가서 다행히 시간에 맞춰 옷을 해 입을 수 있었다.

결선은 아주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시작됐다. 예선 탈락한 포고렐리치가 결승전 진출자들의 연주를 듣기 위해 대회장에 모습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결선은 이틀 동안 진행됐는데 손은 첫째 날의 세 번째 순서로 연주하게 됐다. 그런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연주자가 컨디션이 안좋다면서 마지막에 연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사무국에 요청했다. 결국 손이 맨 먼저 연주를 하게 됐다. 첫 번째로 연주하는 것은 불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손은 협주곡 2번을 연주해나갔다. 시장바닥같이 대회장의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일순 가라앉았다. 그의 연주는 예선 당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는데, 깊은 서정과 고도의 테크닉이 빼어나게 조화를 이룬 연주가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선율과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청중의 마음을 물들이고 있었다.

후진국 취급을 받던 베트남 출신이라고 해서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는 상황에서 손은 베트남인도 쇼팽을 잘 연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편견 없이 피아니스트로서 인정받고 싶은 한 가지 마음으로 콩쿠르에 참가했다. 전쟁이 휩쓸고 간 베트남 땅에서 온 젊은이의 연주에 사람들은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청중들은 옆자리 사람들과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심사위원석 또한 마찬가지였다. 필하모니 홀은 연주 전과는 완전히 다른 이유로 또 한 번 소란스러워졌다.

사실 결선이 있던 날, 제네바로 돌아가지 않았던 아르헤리치가 대회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심사를 거부하고서 결선에 오른 참가자들의 연주를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제네바에 돌아가자마자 곧 콩쿠르 사무국에 한 통의 전보를 보냈다. “당 타이 손, 우승을 축하해요. 당신의 쇼팽 연주는 훌륭한 것이었어요. 앞으로의 활동에 기대를 걸고 있겠으니, 열심히 하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손은 콩쿠르 사무국을 통해 아르헤리치가 정식으로 전보를 보내왔다는 사실에 감사했고 큰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부터 그는 양 어깨에 ‘책임’이라는 이름의 무거운 짐을 지게 된 것이다. 너무나 힘들고 치열하게 살며 공부했던 지난 시간의 일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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