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타이 손’ 풀스토리②] 피부 벗겨진 손가락 본 스승 화들짝 “손! 당장 공장알바 그만둬”

기숙사 지하 연습실 그랜드 피아노 경쟁
매일 아침6시 일어나 피튀기는 자리싸움

민은기 기자 승인 2022.08.10 14:21 | 최종 수정 2022.08.10 14:46 의견 0
쇼팽콩쿠르 우승자인 당 타이 손이 오는 8월 2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내한 리사이틀을 연다. ⓒHirotoshi Sato/마스트미디어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쇼팽 콩쿠르 아시아인 첫 우승자인 당 타이 손은 일곱 살 때 하노이 음악원 초등과정에 입학했고, 중등과정과 전문과정을 거쳐 1976년 이곳을 졸업했다. 하노이 음악원은 베트남을 대표하는 음악기관의 하나로 1957년에 설립됐다. 초등 7년과 중등 4년, 그리고 전문과정 3년을 거친다. 소련의 교육시스템을 참고한 것으로 프로 연주자 양성을 목표로 하는 국립 교육기관이다.

베트남과 소련은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베트남 정부 문화부는 음악원 학생의 유학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소련이 여러 분야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겠다고 발표하자, 베트남 정부는 해외 유학생을 선발했다. 당시 베트남은 ‘출신 성분’이 좋은 자녀들에게만 외국 유학을 허락했다. 손은 모친이 하노이 음악원의 교수로 재직 중이었지만, 부친은 반체제 시인으로 낙인 찍혀 정부의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유학은 어려워 보였다.

어느 날 손은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으로부터 ‘묘한’ 제안을 받았다. 전쟁 중에 줄곧 부친과 헤어져 살아서 사실상 가족은 어머니뿐이라는 것에 동의하면 유학을 허가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않으면’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다, 정부는 다음 단계로 손의 어머니에게 남편과 이혼할 것을 제안했다. 손의 부모는 원래 오랫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남편이 일정한 수입이 없어 손의 어머니가 손을 양육하고 있었다.

이들 부부는 항상 말다툼을 했고, 손은 불안한 분위기에서 자랐다. 부모가 이혼하기로 결정했을 때에도 안타까움이나 슬픔보다는 홀가분한 마음이 컸다. 극도의 긴장감으로부터 해방됐기 때문이다. 하노이 음악원을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데다 ‘문제 있는’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을 했으니 손은 정부가 유학 보낼 대상자 1순위가 된 셈이다.

● 열차 즉흥음악회 연주 덕에 모스크바 음악원 입학 행운

당 타이 손이 지난해 11월 세계적 피아니스트 넬손 프레이레(1944~2021)의 별세를 추모하며 자신의 페이스북에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고 ‘나의 아이돌(my idol)’이라고 적었다. Ⓒ당 타이 손 페이스북 캡처


1977년 7월 20일 깊은 밤, 19세의 손은 소련으로 향했다. 다른 학과를 전공하는 유학생들과 함께 야간열차에 올랐다. 소련에 간다고 해도, 학생들은 자신이 어디에서 유학하게 될 지를 미리 알지 못했다. 전체 여정은 3주였는데, 중국을 닷새에 걸쳐 횡단했다.

손은 새롭게 시작하는 인생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었고, 가족들의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의 기분을 만끽했다. 중간 기착지는 바이칼 호수 근처인 이르쿠츠크. 거기에서 모두가 열차에서 내려 신체검사를 받았다. 전쟁 직후의 베트남 사람들은 여러 가지 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 입국때 여기서 검사를 받았다.

밤이 되자 열차에 탔던 학생들 모두가 참여하는 즉흥 음악회가 열렸다. 그중 정식으로 음악을 전공한 학생은 겨우 네 명뿐이었다. 당연히 손에게 연주 요청이 왔다. 라흐마니노프의 ‘회화적 연습곡집’ 가운데 몇 곡을 연주했다. 그런데 피아노 상태가 아주 엉망이었다. 건반이 덜그럭거릴 정도였다. 그는 생각다 못해 그 소리가 묻힐 만큼 아주 큰 음량으로 건반을 두드렸다.

연주가 끝나자 웬 여성 한 명이 다가와서 “이름이 당 타이 손이죠? 나중에 내 방으로 좀 와요”하고 이야기했다.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자유스러운 기분을 맛본 것이 죄가 되는 걸까? 손의 뇌리에는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기우였다. 그는 소련 교육부 관계자였다. 손이 방을 방문했을 때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가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우크라이나의 키이우(옛 키예프)나 오데사에서 공부하게 될 지도 모를 상황에서 모스크바 음악원은 당연히 가장 희망하는 곳이었다.

교육부 관계자는 손이 모스크바 음악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조처를 하겠노라고 이야기했다. 그 한 가지 사건으로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가는 것이 결정되고 입학을 위한 오디션을 받게 됐다. 그때까지는 베트남에서 온 유학생이 곧바로 모스크바 음악원 입학시험에 합격한 적은 없었고, 2~3년간 예비학교에 머무는 것이 의무처럼 되어 있었다. 그런데 손은 곧바로 입학하는 것이 허락된 최초의 학생이 됐다.

그는 블라디미르 나탄슨 교수의 클래스에 들어갔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하노이 음악원에서 공부했지만,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기초부터 다시 철저히 배웠다. 모든 것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공부하며 고쳐나갔다. 그때까지 공부했던 주법을 모두 바꿔 고쳐야 했는데, 매우 고통스럽고 힘들었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는 외국에서 온 유학생은 러시아인보다 테크닉 면에서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해 러시아인과는 따로 교과과정을 짜놓고 있었다. 손은 피아노의 기초를 배우는 한편 화성, 음악사, 이론 등의 수업을 받았고 거기다 필수과목인 러시아어 수업도 매일 들어야했다.

● 유학 첫해 성적표 ‘5+’ 최우등...교수들도 뛰어난 실력에 관심 집중

1980년 쇼팽 콩쿠르에서 아시아인 최초 우승의 역사를 쓴 당 타이 손의 내한공연을 앞두고 ‘우승기념 쇼팽 음반’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풍월당은 12일부터 이 음반을 판매한다. 앨범엔 두 곡의 녹턴, 두 곡의 마주르카, 한 곡씩의 왈츠, 발라드, 스케르초, 그리고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그란데 폴로네즈 브릴란테’가 수록돼 있다. Ⓒ유니버설뮤직 제공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딸린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5층 건물인 기숙사는 한 층마다 30개의 방이 있었다. 지방에서 온 학생과 외국에서 온 학생이 2명씩 짝이 되어 하나의 방을 함께 쓰는 형태였다. 각 방에는 한 대씩 업라이트 피아노가 놓여 있었지만 손은 그랜드 피아노로 연습하고 싶었다. 업라이트와 그랜드는 터치가 완전히 달랐다.

기숙사 지하에 있는 연습실의 그랜드 피아노를 확보해야했다. 매일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연습실 앞에 줄을 섰다. 언제나 이른 아침부터 연습실 차지를 위해 줄을 서는 학생은 두 부류였다. 베트남 등 아시아에서 온 유학생, 그리고 유태인들이었다. 이 두 그룹은 추울 때나 더울 때나 연습실 확보를 놓고 신경전을 벌였다.

그는 연습과 공부 외에도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수입이 거의 없는 아버지에게 조금씩이라도 송금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자신의 먹을 것을 해결하기도 벅찰 정도였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선풍기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열처리를 한 부품을 약품으로 냉각시키는 공정이었다. 그러는 동안 손가락은 열에 의해서 피부가 벗겨지고 엉망이 됐다. 어느 날 레슨 중에 제자의 손을 보게 된 나탄슨 교수는 펄쩍 뛰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손, 그만 둬. 제발 부탁이다. 너는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다. 손가락을 상하게 하는 일만은 절대 안돼.” 그래서 더 이상 그 일을 계속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병 수집 아르바이트가 또 있었다. 술병이나 주스, 물 등을 담는 병을 모아다 깨끗이 씻어서 재활용하는 곳에 가지고 가면 얼마쯤 돈을 받았다. 물론 공장의 임금과는 비교도 안되는 수입이지만, 적어도 손가락이 상하지는 않았다. 손은 동료들과 시간 날 때면 꾸준히 병 수집을 했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의 첫 해, 그 1년간은 수업·연습·아르바이트 등으로 편안히 쉬어본 적이 없었다. 늘 잠이 모자랐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1977년 말, 입학 후 첫 해의 시험 결과가 게시판에 붙었다. 손은 ‘5+’를 받아서 최우등이었다. 시험 평가는 1부터 5까지 5단계로 표시되는데, 정말 뛰어나다고 평가받은 경우에 한해 5+가 주어진다.

1년에 한번 치러지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시험에서 그는 브람스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베토벤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 J. S. 바흐의 ‘전주곡과 푸가 BWV 861’을 연주했다. 맹연습을 했던 만큼 성과가 나타났다. 전학년 최우등이었다.

이 일로 인해 유럽·아메리카가 아닌 베트남 등지의 나라에서 온 유학생에게는 전혀 관심를 기울이지 않던 소련 학생들이 손을 주목했다. 음악원 창설 이래 그런 평가를 받은 최초의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교수들도 그때부터 손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특히 1971년부터 모스크바음악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벨라 고르노스타에바가 높은 평가를 하고 음악원 신문에 손과 관련된 기사를 발표했다. 스승인 나탄슨에게 있어서 이런 제자는 큰 자랑이었다. 그는 손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서 이 사실을 알렸다.

● 절대음감 알아챈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로부터 본격 레슨

당 타이 손은 지난 5일 어머니 타이 티 리엔이 104세 생일을 맞이했다고 페이스북에 포스팅했다. 타이 티 리엔은 오랫동안 하노이 음악원 피아노과 주임교수로 일했다. Ⓒ당 타이 손 페이스북 캡처


손의 어머니 타이 티 리엔은 하노이 음악원 피아노과의 주임교수를 맡고 있었다.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는 베트남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면서 여러 번 전쟁의 참화를 겪어내어 기가 셌고 엄한 레슨을 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리엔의 레슨실에서는 언제나 학생을 꾸짖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심한 학생은 내내 울면서 레슨을 받기도 했다. 리엔은 하노이 음악원을 창설했던 일곱 명의 교수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했다. 손은 그러한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가르침을 받았다.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와 누나, 형이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던 그에게는 음이라는 것이 아주 신비롭고 흥미로웠다. 아이들이 노래하는 곡을 피아노로 두드려보면 멜로디를 그대로 칠 수 있었다. 손은 그것이 기뻤다.

하지만 리엔은 손의 호기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집안에 더 이상의 피아니스트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지금 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가르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손의 특별한 귀에 대해 최초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버지 당 딘 훙이었다.

그는 아들에게 여러 가지 음을 들려주고 절대음감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훙은 아내를 설득해서 여섯 살이 된 손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게 했다. 손은 이제 어머니가 정말로 자기에게 레슨을 해준다는 사실에 기뻤다. 어머니가 내준 숙제보다도 언제나 더 많이 연습하고 앞서나갔다.

성과는 바로 나타났다. 수개월 만에 리엔은 소련에서 성서처럼 여기면서 피아노 학습자의 정석처럼 되어 있는 니콜라예프의 교본을 건네주었다. 이것도 손은 단기간에 끝내버렸다. 1965년, 일곱 살이 되던 해에 하노이 음악원의 초등과정에 입학했다. 이제부터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울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할 즈음, 베트남 전쟁이 터졌다.

● 수도·전기까지 끊겨...가난이 일상이 되어버린 전쟁의 비극

하노이는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로서, 두 개의 강에 둘러싸여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옛날부터 ‘하노이(河內)’라고 불렸다. 베트남에서는 길고 고통스러운 전쟁의 역사가 반복됐다. 기원전 100년께부터 약 1000년에 걸쳐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1858년에는 프랑스가 침공했고 1887년에는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의 일부가 식민지가 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이 됐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과 인도차이나 전쟁이 잇따라 일어나면서 1954년에 제네바 협정에 의해 프랑스군이 철수했다. 그러나 곧 미국이 전쟁에 개입해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열된 국가가 됐다. 그러다가 베트남 전쟁에 돌입했다. 전쟁은 장기화됐지만 1975년 남베트남의 사이공(현재의 호치민)이 함락되면서 이듬해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이 탄생했다.

손은 1958년 7월 2일 하노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베트남에서는 정부가 주거 시설을 국민들에게 빌려주었다. 집을 소유하는 것은 제한돼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집을 갖고 있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손의 가족은 3층 건물 아파트의 2층을 임대해 썼다. 방 두 개짜리 좁은 집이지만, 모친이 음악원으로부터 빌려온 업라이트 피아노가 한 대 있었다.

리엔은 하노이 음악원 학생들을 집에서도 가르쳤다. 그는 어머니에게 심한 꾸중을 듣는 학생들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엄마를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아. 저 학생들이 돌아가면 바로 연습을 해야겠다”라고 생각하곤 했다. 이 즈음부터 손은 어머니를 화나게 하지 않기 위해 공부도 피아노 연습도 열심히 했다.

1965년까지는 전쟁 중이긴 해도 전기와 수도의 사용이 가능했지만, 미군의 공중폭격이 시작되자 먼저 수도가 끊겼다. 물은 큰길가의 정해진 장소에서 길어 와야 했다. 손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내려가 물을 길어서 다시 계단을 올라오는 일을 반복했다. 무거운 물 때문에 손에 물집이 잡히고 손가락에도 큰 부담이 됐다. 그렇지만 불평할 처지가 아니었다. 어느 집에서나 다 똑같이 그렇게 했다. 길어온 물은 음식 만드는 데서부터 몸씻기, 화장실용의 순서로 한 방울도 버리지 않고 썼다. 이윽고 전기까지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캄캄한 암흑 생활이 시작됐다.

● 물소 수레에 실려 70km 옮겨온 피아노에 마을 사람들 환호

당 타이 손(오른쪽)이 지난 5일 어머니 타이 티 리엔의 104세 생일을 맞아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을 페이스북에 포스팅했다. Ⓒ당 타이 손 페이스북 캡처


전쟁 상황이 심각해지자 교수였던 리엔과 그의 학생들은 같이 한 마을로 이주했다. 이때 나이 어린 손은 어머니를 따라가게 되어 아버지, 누나, 형과는 헤어져 살게 됐다. 일가가 헤어져 사는 것은 다른 집도 마찬가지였다.

손은 하노이로부터 북동쪽 약 70km 정도에 위치한 시골 마을로 갔다. 마을에 도착해보니 도회지인 하노이와는 너무 달랐고,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원시적이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집의 벽은 길에 있는 붉은 흙을 아무렇게나 발라서 만든 것이었고 전기도 없었다. 벽돌을 쌓아 그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대나무 잎으로 불을 때서 밥을 해먹었다.

손은 자신이 거처하게 된 집의 천장과 벽 사이의 틈으로부터 하늘이 훤히 내다보이는 것에 경악했다. 바깥과 실내의 온도가 완전히 똑같았다. 비가 내리면 점토로 된 벽이 녹아서 무너지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의 와중에서는 그나마도 다행인 편이었다.

베트남 남부에서는 치열한 육박전이 한창이었고, 북부에서는 공중 폭격이 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미군은 큰 도로, 다리, 역, 텔레비전 방송국, 공장 등에 주로 폭탄을 퍼부었다. 손이 살고 있던 마을이 공중 폭격을 당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으나 마을로부터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다리가 있어서 그곳에 폭탄 떨어지는 소리가 자주 들려왔다. 다리가 무너지면 바로 임시 수리를 하고, 또 파괴당하길 반복했다.

어린 아이들은 폭탄 파편이 머리에 박히지 않도록, 밖에 나갈 때는 항상 모자를 쓰는 것이 의무가 되어 있었다. 옷도 흰색 등 밝은 색은 금지됐고, 풀빛을 닮은 녹색이나 갈색으로 제한받았다. 손과 리엔은 마을의 촌장 집에 세 들었다. 거기에는 큰 나무판자를 두 장 붙여 만든 침대가 있었고, 그 집 가족과 손의 일행은 거기서 숙식을 같이 했다. 손도 점차로 대가족의 삶에 익숙해졌고, 사람들과 어울려 협동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몸으로 익혔다.

집에는 하노이 음악원으로부터 옮겨온 피아노가 있었는데 리엔의 제자들이 교대로 그걸 사용해 연습했다. 폭탄을 실은 전투기 소리가 가까워지는 듯하면 어른들은 빨리 연습을 중지하라고 소리쳤다. 전투기의 비행음을 판별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의 전투기는 아주 빠르고 공격적인 소리를 내며 날아간다. 반대로 소련의 전투기는 공격이 아니고 정찰을 하는 것이 목표였으므로 얌전한 소리가 났다. 손은 그 음을 듣고서 구분할 수 있게 됐고, 소련의 비행기 소리가 들리는 경우엔 연습을 중지하지 않아도 좋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어른들은 진지했다. 전투기의 음이나 폭음이 조금이라도 들려오면 아이들에게 빨리 지하로 내려가 몸을 숨기라고 말했다. 모든 집들이 침대 아래쪽에 굴을 뚫어놓았다. 간이 방공호인 셈이었는데 내부는 습기가 많고 축축해서 비위생적이었고, 뱀이 우글거렸다. 당시는 전쟁으로 죽은 사람보다도 뱀에 물려 사망한 사람이 더 많을 정도였다. 어린 아이들은 그 반지하의 장소가 매우 싫었다. 그래서 어른들이 없을 때면 폭음이 들려와도 굴로 들어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이 아예 일상이 되어버린 상황. 손은 평화보다는 오히려 전쟁에 익숙한 채로 자랐다.

시골 마을에 이주해왔던 초기엔 아직 피아노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리엔의 기쁨에 넘친 소리가 들렸다. 하노이 음악원으로부터 피아노 몇 대가 온다는 것이었다. 하노이로부터 그 마을까지는 약 70km의 거리로, 자동차로라면 몇 시간 이내에 도착할 거리였다. 그러나 네 개의 하천을 건너야만 했다. 대부분의 다리가 공중 폭격으로 파괴된 상태였기 때문에 육로로 악기를 옮긴다는 것은 무리였다.

1개월 후,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근처의 강가로 달려갔다. 피아노가 도착하는 날이었다. 손은 고개를 길게 빼고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강 저쪽에서 뭔가 움직이는 듯한 기미가 보였다. 크고 흔들거리는 물체가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물소다! 물소가 온다! 피아노가 온다!” 누군가가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손은 벌떡 일어났다. 어머니 리엔도 믿어지지 않는 듯했다. 아주 천천히 헤엄쳐오고 있는 몇 마리의 물소 머리가 보였다. 그 뒤쪽에는 분명히 뭔가가 실려 있는 것 같았다. “우와, 피아노다!” 어린이들은 놀라움의 소리를 내질렀다. 물소들은 필사적으로 앞을 향해 헤엄쳐왔다. 강 수면에 반쯤 얼굴을 내놓고서 큰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하면서 정말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수레는 물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 위에 실린 피아노 역시 거의 물속에 잠겨있고 금방 떨어질 듯 위태로웠다. “힘내라, 물소야 힘내라!” 모두가 물소를 향해 마음을 모아 응원했고, 조금씩 헤엄을 쳐서 가까이 오고 있는 물소의 움직임에 맞추어 마을 사람 모두가 똑같이 호흡을 했다.

가까스로 물소가 땅으로 끌어올려지고 피아노가 육중한 모습을 드러냈다. 줄도 끊어지고, 페달도 망가지고, 해머도 없어졌다. 너덜너덜해진 피아노의 모습은 한마디로 처참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합심해서 열심히 수리하고 닦았다. 며칠 후 피아노는 겨우 칠 수 있을 정도의 상태가 됐다. 학생 전원이 교대로 쳐야했기 때문에 가장 나이가 어렸던 손은 하루에 20분만 건반에 손가락을 대볼 수 있었다. 그래도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만은 전쟁도 가난도 모두 머리 속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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