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템페스트’ ‘비창’ ‘발트슈타인’...이고르 레비트 4번의 심쿵 소나타

완급조절 올 베토벤 신공스킬 선보이며 첫 내한리사이틀
고개 숙이고 오른발 빼는 등 독특한 ‘루틴 포즈’도 눈길

민은기 기자 승인 2022.11.17 18:05 | 최종 수정 2023.03.20 10:21 의견 0
베토벤 전문가로 이름을 높이고 있는 이고르 레비트가 첫 내한리사이틀에서 연주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천천히, 아주 신중하게 건반을 눌렀다. 요즘 유럽에서 가장 핫한 35세의 피아니스트는 마치 소리가 사라지는 게 두려운 듯 조심스럽게 터치했다. 그의 손가락을 타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이 고개를 드러냈다. ‘템페스트’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곡이다.

2005년 루빈스타인 콩쿠르에서 2위와 함께 청중상·실내악 연주상·현대음악 연주상까지 받으며 세계무대에 이름을 알린 그는 1악장에서 라르고(아주 느리게)와 알레그로(빠르게)를 반복하며 밀당을 벌였다. 음악적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고도의 심리전이다. 2악장은 아다지오(느리게). 연못에 떨어지는 빗방울과 그로인해 파문이 일어나는 물결 같았다. 음을 다루는 감각적인 솜씨가 돋보인다. 알레그레토(조금 빠르게)의 3악장은 서정적인 속도감이 느껴졌다.

“이 시대 가장 중요한 예술가 중 한명”이라고 뉴욕타임스가 찬사를 보낸 이고르 레비트는 올 베토벤으로 관객 마음을 훔쳤다. 1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내한 리사이틀에서 심쿵 피아노 소나타 4곡으로 베토벤의 정수를 선사했다. 달릴 땐 힘껏 달렸고, 늦출 땐 살포시 걷는 완급조절의 신공 스킬을 선보였다.

베토벤 전문가로 이름을 높이고 있는 이고르 레비트가 첫 내한리사이틀에서 연주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그가 한국 팬들에게 처음 얼굴을 선보인 것은 2017년. 마에스트로 키릴 페트렌코와 함께한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 협연자로 나서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가졌다.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를 연주했는데, 깔끔하고 명료한 음색을 통해 그 어떤 레퍼토리도 자신만의 해석으로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음악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의 실력은 베토벤의 작품에서 나타난다. 2019년 소나타 32곡 전곡 음반을 발매하며 자신만의 음악관을 뚜렷이 드러냈다. 2020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베토벤 소나타 전곡 사이클 연주를 연달아 이어가며 같은 세대의 피아니스트 중 단연 돋보이는 행보를 보였다.

레비트는 17번 ‘템페스트’를 마친 뒤 퇴장하지 않고 바로 이어 8번 ‘비창’을 연주했다. 느린 서주로 출발하지만 결국엔 열정과 광란이 뒤섞인 속사포랩으로 전환하는 1악장, 한없이 깊은 슬픔이 끝없이 샘솟는 안단테 칸타빌레(천천히 노래하듯이)의 2악장, 그리고 프랑스 춤곡 형식인 론도의 3악장을 매혹적으로 펼쳐냈다.

베토벤 전문가로 이름을 높이고 있는 이고르 레비트가 연주를 마친 뒤 독특한 루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연주 자세도 눈길을 끌었다. 정통적인 스탠더드 포즈에서 벗어났다. 고개를 심하게 숙였고, 가끔 오른쪽 발을 아예 밖으로 빼내기도 했다. 오른손으로만 연주할 때는 왼손을 가위·바위·보의 가위 형태로 만들어 공중을 휘저었다. 자기 나름대로 최고의 소리를 뽑아내기 위한 독특한 연주 루틴이다.

25번 소나타는 밝고 경쾌했다. 이날 독주회 프로그램 4곡 중 가장 나중에 쓴 작품인 만큼 한층 깊이 있고 발전된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정작 어린아이로 돌아간 베토벤이 떠오를 정도로 천진난만했다.

레비트는 21번 ‘발트슈타인’을 피날레로 선물했다. 1악장은 뜬금없는 선율로 시작된다. 19세기 초의 표준을 벗어난 이 갑작스럽고 엉뚱한 선율은 베토벤이 소나타 형식을 어떻게 새롭게 정의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첫 악장을 끝낸 뒤 레비트는 슬쩍 관객의 눈치를 살피는 포즈를 취했다. 연주자의 집중력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악장과 악장 사이는 박수를 치지 않지만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웃음으로 화답했다.

2악장과 3악장은 스톱 없이 하나로 연결되는 아타카로 연주된다. 조용하게 흐르던 2악장이 빠른 템포의 3악장으로 연속해서 이어지며 풍부한 사운드를 선사했다. 레비트는 의자에서 살짝 엉덩이를 떼기도 하며 폭주기관차처럼 내달렸다. 격렬함이 빛나는 멋진 마무리다.

베토벤 전문가로 이름을 높이고 있는 이고르 레비트가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몇 차례의 커튼콜 뒤 레비트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피아노에 앉아 앙코르곡을 준비했다. 그 순간 귀를 거슬리는 전화벨 소리에 멈칫했다. 다시 컨디션을 끌어 올린 후 바가텔 25번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했다.

“음악이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자연스럽게 음악과 하나 되어 조건 없이 참여하고 공감하게 되며, 그 결과로 우리의 일상은 베토벤으로 채워지고 반대로 베토벤은 우리 각자의 이야기로 가득해진다. 연주자·음악·관객, 이 세 개의 점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레비트의 고백처럼 연주자·음악·관객이 하나가 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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