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손열음(오른쪽)이 클라리넷 연주자 조인혁(왼쪽 두번째)과 호흡을 맞춰 앙코르곡 ‘파리의 미국인 블루스’를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박정옥 기자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손열음의 등장은 이채로웠다. 출입문이 아닌 무대 왼쪽 구석에서 걸어 나왔다. 지휘자도 없고 팀명도 없이, 그냥 ‘고잉홈프로젝트(Going Home Project)’라는 간이 이름으로 불리는 어벤저스 오케스트라의 멤버로 참여해 첫 곡을 연주했다. 레너드 번스타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중 심포닉 댄스에서 피아노를 쳤다.

그리고 두 번째 곡에서는 솔리스트 연주를 맡아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췄다. 무대 매니저들이 피아노 세팅을 끝내자 구석에서 빠져나와 중앙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아주 인상적인 ‘니가 왜 거기서 나와’다.

손열음이 터치한 곡은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 클래식 음악에 재즈 요소를 결합한 이색적인 곡이다. 클라리넷의 글리산도(높이가 다른 두 음 사이를 미끄러지며 소리 내는 기법)에 이어 스윙감 넘치는 피아노 사운드가 배턴을 이어 받았다.

클라리넷 연주자 조인혁이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호흡을 맞춰 앙코르곡 ‘파리의 미국인 블루스’를 연주하고 있다. ⓒ고잉홈프로젝트 제공


거슈윈은 뉴욕의 한 악보사에서 일했다. 당시 그가 맡은 일은 ‘송 플러거(Song Plugger). 악보를 사러 온 고객에게 악보에 적힌 음악을 그대로 연주해주는, 한마디로 인간 주크박스였다. ‘랩소디 인 블루’는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빅히트곡이다. 가장 미국적인 음악, 가장 20세기적인 음악, 신세기를 열어젖힌 음악이다.

손열음은 가벼운 터치로 시작해 오케스트라 사운드에 선명한 색채를 덧입혔다. 자신의 스타일대로 음악을 몰고 가며 순식간에 집중도를 끌어올렸다. 쉼 없이 변하는 리듬을 자유자재로 구사해 재즈 특유의 다이내믹과 즉흥성을 살렸다. 그리고는 한순간 건반을 세게 내려치며 격정적인 선율을 뽑아냈다. 화산 폭발 같았다. 손열음은 지난해 고잉홈프로젝트에서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들려줬는데, 2년 연속 ‘클래식 재즈’를 선보였다. 롯데콘서트홀을 재즈바로 만든 ‘갓열음’이다.

연주를 마치고 퇴장한 손열음이 악보 패드를 가지고 다시 들어왔다. 피아노에 앉은 그는 클라리넷 연주자 조인혁과 케미를 이뤄 조지 거슈윈·헹헬 구알디의 ‘파리의 미국인 블루스(Blues from an American in Paris)’를 연주했다.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클라리네티스트가 돋보이는 곡을 선택한 ‘거장의 품격’을 보여줬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고잉홈프로젝트와 호흡을 맞춰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를 연주하고 있다. ⓒ고잉홈프로젝트 제공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고잉홈프로젝트와 호흡을 맞춰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를 연주하고 있다. ⓒ고잉홈프로젝트 제공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고잉홈프로젝트와 호흡을 맞춰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를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고잉홈프로젝트 제공


2023고잉홈프로젝트 오프닝 공연이 1일 오후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렸다. ‘음악계의 게릴라’와도 같은 이 프로젝트 그룹은 피아니스트 손열음, 플루티스트 조성현을 비롯해 각 악기의 실력자들이 모두 모였다. 유성권(바순)·함경(오보에)·김두민(첼로)·김홍박(호른)·조인혁(클라리넷)은 각각 베를린·헬싱키·뒤셀도르프·오슬로·뉴욕의 오케스트라에서 현재 수석 연주자이거나 역임했던 사람들이다. 올해 고잉홈에 참여한 연주자 87명은 총 14개국 40개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들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연주해 ‘고잉홈’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스베틀린 루세브가 리더 역할을 맡았다.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캔디드’의 흥행 대참패로 엄청난 좌절을 맛본 번스타인의 삶을 일으켜준 인생작이다. 서양 정통 고전 교향악과 유대 종교 음악, 재즈와라틴 음악이 한데 공존하는 음악적 멜팅팟이다.

고잉홈프로젝트의 리더 스베트린 루세브가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을 연주한 뒤 첼리스트 김두민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고잉홈프로젝트 제공
고잉홈프로젝트의 리더 스베트린 루세브가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을 연주한 뒤 단원들과 함께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고잉홈프로젝트 제공


고잉홈프로젝트가 첫 곡으로 초이스한 ‘심포닉 댄스’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핵심 장면을 발췌해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수 있도록 만든 모음곡이다. 프롤로그-섬훼어-스케르초-맘보-차차-미팅 신-쿨 푸가-럼블-피날레 등 9개의 작은 악장이 멈춤 없이 하나로 묶여 흘렀다. 현악 주자들이 잠시 보잉을 멈추고 탁탁 손가락을 튕기거나, 잇따라 “맘보”라고 큰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손가락 피치카토 연주를 선사하는 등 이색적 느낌을 곳곳에 배치해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마지막 곡은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 뉴욕에 신설된 국립음악원의 원장 자리를 맡아 신대륙에 입성한 드보르자크는 인디언 음악과 흑인 영가 등에서 모티브를 얻어 ‘신세계로부터’를 작곡했다. 포디움에 서서 전체를 컨트롤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서로의 몸짓과 손짓, 그리고 소리에 온 신경세포를 집중해 하나의 거대한 선율을 만들어냈다.

1악장은 현의 거친 활긋기가 팀파니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흥겨움과 밝음이 교차됐다. 2악장은 애수 깃든 선율이 가슴을 적셨다. 중간 중간 보헤미안 사운드가 연상된 3악장을 지나, 격정적 역동적인 4악장으로 마무리됐다. 앙코르는 2악장을 축약해 한 번 더 연주했다. 드보르자크의 제자 윌리엄 암스 피셔는 스승의 사후에 2악장 선율에 가사를 붙였다. 이 노래의 제목이 ‘고잉홈’이다.

고잉홈프로젝트가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을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고잉홈프로젝트 제공
고잉홈프로젝트가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을 연주하고 있다. ⓒ고잉홈프로젝트 제공


류태형 평론가(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는 첫 곡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심포닉 댄스’에 대해 “핑거 스냅과 발로 박자를 맞춰 가며 지휘자 없이 영점을 맞춰나갔다. 과감하고 자유로운 운궁이 돋보였다. 번스타인 관현악의 움직임은 덩어리가 컸다. 타악기의 리듬은 컬러풀했다. 자유로운 에너지의 발산은 ‘맘보’에서 한껏 달아올랐다. 즉흥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의 연주는 통상적인 볼륨을 웃돌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두 번째 곡 ‘랩소디 인 블루’에 대해서는 “손열음의 피아노에 스윙감이 더 실렸다. 민첩하고 유희적인 리듬감을 자유자재로 발산했다”라며 “독주 부분에서 싱커페이션과 루바토로 주도적인 연주를 펼쳤다. 솔로 위를 뒤덮은 낭만적인 현악군의 연주 뒤에 악장 스베틀린 루세브의 청아한 바이올린 솔로가 돋보였다”고 설명했다.

류 평론가는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2악장은 그야말로 ‘고잉홈’이라며, 이들 오케스트라의 정체성이자 타이틀 같은 선율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잉글리시호른의 따뜻한 선율이 흘러나오고 현악군이 꿈속인듯 점선 같은 미완성의 악구를 연주했다. 뭉근한 관악이 꿈에 그리던 고향을 구름 위로 띄워 보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3악장에서 팀파니가 작열하고 관현악이 도드라졌다. 중간의 민요적인 부분도 잘 살렸다”며 “4악장은 자신감 있고 당당한 금관의 위용이 다시 한 번 모습을 뽐냈다. 막판에 디테일을 맞춰줬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날레 전 넓게 펼쳐지는 앙상블은 일품이었다”고 평가했다.

/park72@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