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전쟁 아픔 탄약고에 가득한 ‘평화 선율’...김은채·임희영·임미정·페데리코 감동 콘서트

파주 민간인통제구역 미군 기지서 미니 음악회
​​​​​​​‘DMZ오픈국제음악제’ 행사로 열려 뜻깊은 시간

박정옥 기자 승인 2023.11.07 17:49 | 최종 수정 2023.11.08 08:34 의견 0
경기도 파주시 캠프 그리브스에서 DMZ 오픈 국제음악제의 행사로 ‘탄약고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DMZ 오픈 국제음악제 예술감독인 피아니스트 임미정, 첼리스트 임희영, 바이올리니스트 김은채가 연주하고 있다. ⓒDMZ오픈국제음악제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바이올리니스트 김은채, 첼리스트 임희영, 피아니스트 임미정이 팀을 이뤘다. 솔리스트로도 유명한 그들이 앙상블로 연주한 곡은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트리오 2번 e단조(Op.67)’ 4악장. 쇼스타코비치가 친한 친구였던 음악학자 이반 솔러틴스키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를 추모하게 위해 작곡한 곡으로 알려져 있다.

알레그레토(조금 빠르게) 악장이다. 가벼운 피아노 반주 위로 현을 손가락으로 튕기거나 뜯어 소리 내는 바이올린의 피치카토가 얹혀졌다. 뒤를 이어 첼로도 살짝 피치카토로 가세했다. 조금 뒤 세 악기가 돌변했다. 바이올린은 활을 바짝 세워 같은 방향으로 거칠게 긁어댔다. 첼로도 손가락으로 줄을 한 방향으로 터치했다. 망치 내리치듯 둔탁한 사운드가 울렸다. 이에 질세라 피아노도 장작 패 듯 쿵쿵 소리를 토해냈다.

낯선 화음이 묘한 긴장감을 안겨줬다. 무엇인가 모순된 선율이다. 잠시 볼륨이 잦아들더니 다시 소리를 높여 흘렀다. 점점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드라마틱 드라마가 펼쳐졌다. 절친의 죽음이라는 개인적 아픔을 넘어 2차 세계대전의 비극인 홀로코스트가 오버랩됐다. 음표 하나하나에 전쟁의 비극과 슬픔이 새겨진 곡이다.

김은채, 임희영, 임미정, 그리고 로만 페레리코(피아니스트)가 6일 경기도 파주시 민간인통제구역 안에 있는 미군 반환기지 ‘캠브 그리브스’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경기도와 경기관광공사가 지난 4일 개막해 오는 11일까지 개최하는 ‘DMZ 오픈 국제음악제’의 하나로 준비한 공연이다. 어두운 역사를 넘어 평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한 클래식 음악 축제다.

음악회가 열린 장소는 아주 특별하다. 바로 탄약고다. 얼마나 많은 콘크리트가 들어갔을까. 한눈에 봐도 견고하다. 곳곳 철제 구조물에는 녹이 슬어 있다. 일부러 이런 곳을 택한 것은 상처 가득한 역사의 현장에서 이젠 슬픔을 극복하려는 간절함 때문이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은채가 경기도 파주시 캠프 그리브스에서 열린 DMZ 오픈 국제음악제 ‘탄약고 음악회’에서 연주하고 있다. ⓒDMZ오픈국제음악제 제공


바이올리니스트 김은채가 첫 연주자로 나섰다. 지난 6월 칼 플레쉬 국제바이올린콩쿠르 우승과 함께 3개의 특별상 수상 후 첫 내한공연이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2번 a단조(BWV 1003)’ 3악장과 4악장을 들려줬는데, 우아하고 기품 있는 소리가 귀를 휘감았다.

피아니스트 로만 페데리코가 경기도 파주시 캠프 그리브스에서 열린 DMZ 오픈 국제음악제 ‘탄약고 음악회’에서 연주하고 있다. ⓒDMZ오픈국제음악제 제공


다음은 올해 19세인 우크라이나의 피아니스트 로만 페데리코의 무대. 스카를라티 ‘피아노 소나타 b단조(K.27)’에서 빠르고 세게와 느리고 약하게를 효과적으로 배분하는 음향 스킬로 귀를 사로잡았다. 쇼팽 ‘발라드 3번 내림A장조(Op.47)’ 연주를 마쳤을 때, 관객들은 “매너가 아닌 줄 알지만, 그래도 이건 못참지”라며 박수를 보냈다. 페데리코는 “그럼 저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요”라는 듯, 앞으로 나와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호프만 ‘캐릭터 스케치(Op.40)’의 4번 ‘만화경’을 연주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올해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호로비츠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한 실력을 제대로 뽐내며 브라보를 받았다.

첼리스트 임희영이 경기도 파주시 캠프 그리브스에서 열린 DMZ 오픈 국제음악제 ‘탄약고 음악회’에서 연주하고 있다. ⓒDMZ오픈국제음악제 제공


한국인 최초 로테르담필하모닉 첼로 수석을 지냈고 지금은 중국 최고 명문 베이징 중앙 음악원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임희영은 쇼팽 ‘에튀드 Op.25 No.7’(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글라주노프의 편곡 버전)을 연주했다. 첼로는 사람의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소리를 내는 악기다. 한때 탄약과 폭탄 가득했던 장소에 낭만 가득한 선율이 울려 퍼지자 마음이 더없이 편해졌다. DMZ 오픈 국제음악제 예술감독인 피아니스트 임미정과 호흡은 베스트였다.

경기도 파주시 캠프 그리브스에서 DMZ 오픈 국제음악제의 행사로 ‘탄약고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DMZ 오픈 국제음악제 예술감독인 피아니스트 임미정, 첼리스트 임희영, 바이올리니스트 김은채가 연주하고 있다. ⓒDMZ오픈국제음악제 제공


이어 김은채·임희영·임미정은 함께 무대에 올라 피아졸라의 명곡 ‘망각’을 삼중주로 연주했다. 바이올린의 가녀린 사운드와 첼로의 묵직한 선율이 하모니를 이뤘다. 그리고 세 사람은 파이널 곡으로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삼중주를 선사했다.

작은 소음도 크게 울려 퍼지는 콘크리트 창고에서 열린 음악회였기 때문에 관객 모두는 잡음을 내지 않으려 애썼고, 이런 노력은 음악에 더 집중하게 만들었다. 홈스쿨링을 하는 열 살 미만의 어린 관객도 눈에 띄었는데, 자세를 바로잡고 끝까지 음악을 들어 대견했다.

임미정 감독은 “오늘 공연은 클래식 음악채널 오르페오TV에서 곧 다시 볼 수 있다”라며 “관객 여러분도 어쩌면 화면에 잡힐 수도 있으니 모두가 주인공인 공연이다”고 말해 웃음을 안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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