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간 소키예프가 이끄는 빈 필하모닉이 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 5번을 연주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프로그램이 색달랐다. 이례적이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은 그동안 주로 브루크너(2019년·지휘자 크리스티안 틸레만), 멘델스존(2021년·지휘자 리카르도 무티), 브람스(2022년·프란츠 벨저-뫼스트) 등 독일·오스트리아 계열 교향곡을 선보였다. 오스트리아 ‘국가대표 악단’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낸 최상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프랑스와 러시아 작곡가의 곡으로 낯설게 구성했다. “우리는 다른 것도 잘해요”를 보여주려는 자부심의 표현이다.
투간 소키예프가 이끄는 빈 필하모닉이 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한국 팬들을 만났다. 그들은 생상스와 프로코피예프로 승부했다. 러시아 출신의 소키예프는 프랑스의 툴루즈 카피톨 국립 오케스트라 지휘자(2008~2016)와 ‘러시아의 자존심’으로 통하는 볼쇼이 극장의 음악감독(2014~2022)을 역임했다. 최고의 프로코피예프 해석자인 데다 프랑스 레퍼토리에도 정통하다. 이번 선곡에 믿음이 가는 이유다.
피아니스트 랑랑이 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생상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민은기 기자
피아니스트 랑랑이 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생상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민은기 기자
피아니스트 랑랑이 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생상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민은기 기자
‘클래식계 슈퍼스타’ 랑랑이 협연자로 나섰다. 1부에서 랑랑과 소키예프는 손을 맞잡아 들어 올리고는 객석을 가득 채워준 관객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생상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 g단조(Op.22)’를 터치했다. 젊은 생상스의 패기와 다채로운 감수성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랑랑은 바흐의 판타지아를 떠올리게 하는 도입부, 베토벤을 연상시키는 화성 진행, 슈만처럼 재기 발랄한 리듬, 쇼팽 특유의 찬란한 아르페지오의 단편들을 살려냈다.
‘느리게, 한음 한음 깊이 눌러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안단테 소스테누토’를 충실하게 따르며 1악장을 전개했다. 비장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타고 슬로우 템포로 찬란한 선율이 교차했다. 서로 가녀린 숨결을 주고받듯 조심스러웠다.
1악장을 지나니 익살스러운 2악장 알레그로 스케로잔도다. 가벼운 타악 전주로 시작했고 건반 위를 자유자재로 뛰어다니는 탄력적인 움직임을 보여줬다. 마지막 3악장 프레스토는 날카롭고 예리한 송곳을 닮은 음형들을 쌓아 장대한 피날레를 만들었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생상스는 초연 당시 직접 협연했다. 하지만 정작 작곡가 자신에게도 이 곡은 상당히 어려워 첫 공개는 만족할 만한 성공이 아니었다. 하늘의 생상스가 지금의 랑랑을 봤다면 브라보를 외쳤으리.
팔을 양쪽으로 쫙 벌리거나 오른손이 연주하면 왼손을 공중에서 둥글게 돌리고, 왼손이 연주하면 오른손을 가슴에 대는 ‘랑랑표 제스처’는 여전했다. 다소 과장된 몸짓이지만 그것 역시 음악이 되어 흘렀다. 랑랑은 퇴장과 입장을 반복하는 커튼콜을 오래하지 않았다. 뜸 들이지 않고 곧바로 앉아 영화 ‘머펫 무비’의 주제곡으로 쓰인 ‘레인보우 커넥션’을 앙코르로 연주했다.
투간 소키예프가 이끄는 빈 필하모닉이 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 5번을 연주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제공
2부에서 소키예프와 빈필은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5번 내림B장조(Op.100)’로 다채로운 구조와 음향을 펼쳐냈다. 음 하나도 어설픈 모습으로 새나가지 못하도록 촘촘하게 거르고 걸렀다. 1악장부터 4악장까지 빈틈이 없었다. 관악기와 현악기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더니, 또 어느 순간은 긴장감 넘치는 밀당을 주고받으며 풍성한 선율을 뽐냈다.
플루트·첼로가 1악장의 처음을 이끌며 느리게 흘렀다. 점점 그 안에서 밀도 높은 패턴과 화성을 층층이 쌓아 올렸다. 팀파니, 베이스 드럼, 심벌즈. 공(탐탐), 탬버린 등 퍼커션이 중간 중간 동시 가세해 분위기를 돋웠다. 애상적 선율이 얼핏, 아주 짧게 얼굴을 내밀더니 이내 급박하게 마무리됐다.
2악장은 묘한 긴장감 속에서 컬러풀 음색이 어지럽게 얽혔다. 관과 현의 앙상블이 견고하게 솜씨를 뽐냈다. 무엇인가 더 이어질 것 같았는데,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단박에 악장을 끝냈다.
비극적이면서 우아한 서정성이 깊게 감돈 3악장은 살짝 하프소리가 더해져 목가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이번엔 앞선 두 악장과 다르게 슬며시 조용하게 자취를 감췄다.
4악장은 활기찬 민요풍의 진행이지만 속내는 여유롭고 한적했다. 지루할 수 있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감칠맛에 가까웠다. 종결은 거칠게 한방에 끝냈다.
프로코피예프는 교향곡 5번을 ‘자유롭고 행복한 인간의 찬가’라고 셀프평가했지만, 절묘한 조합의 음악에는 비극과 아이러니가 뒤섞여 있다. 그럼에도 약간의 기쁨으로 이루어진 묘한 삶의 풍경도 엿보였다.
투간 소키예프가 이끄는 빈 필하모닉이 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 5번을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제공
소키예프의 지휘도 눈길을 끌었다. 지휘봉을 들지 않고 맨손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손을 휘젓는 동작보다는 몸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살짝 살짝 돌리거나, 가볍게 다리를 구부리고 펴는 행동으로 단원들을 리드했다. 강렬한 카리스마로 압도하기 보다는 “잘 가고 있어요. 계속 그렇게 가면 되요”라는 칭찬의 말을 건네는 지휘였다.
앙코르는 “우리 빈에서 왔어요”를 일깨워주려는 듯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초이스했다. 오페레타 ‘인디고와 40인의 도둑’ 서곡을 연주한 뒤 손가락 하나를 보여주며 “한곡 더 할까요”라는 시그널을 보냈다. 그리고 유명한 폴카 ‘천둥과 번개’를 들려줬다. 그들의 전매특허인 빈의 흥취를 배달했다.
<백브리핑> 투간 소키예프가 이끄는 빈 필하모닉은 8일 공연에서는 다른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랑랑은 협연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특기인 독일 사운드를 초이스해 베토벤 ‘교향곡 4번’과 브람스 ‘교향곡 1번’을 연주했다. 빈 필 고유의 색깔을 보여준 무대였다.
음악칼럼니스트 허명현은 한 신문에서 “결정적으로 큰 감동을 만들어 낸 것은 투간 소키예프였다. 빈 필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휘자였다. 필요한 순간에만 개입했을 뿐 빈 필의 색깔이 필요한 순간에는 단원들에게 맡겼다. 빈 필이 어떤 오케스트라보다도 아름다운 소리를 갖고 있기에 가능한 방법이다. 빈 필과 좋은 성과를 보여준 지휘자들이 선택해 온 방식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언터처블 앙코르도 선사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봄의 소리 왈츠’와 ‘트리치 트라치 폴카’를 준비했다. 허 칼럼니스트는 “왈츠를 그저 쿵짝짝의 음악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라는 걸 알려줬다”며 “단원들은 마치 한 몸처럼 리듬을 탔고 이들이 아니면 따라하기 어려운 음악을 완성했다”고 찬사를 보냈다.
/eunki@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