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일이 지난 15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고 있다. 시노그라퍼 여신동의 무대·조명 연출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늘 무대 뒤에 있는 사람인데 이렇게 무대 앞에 서게 됐네요.”

작곡가 겸 연주가로 활약하고 있는 정재일(1982년생)이 쑥스러운 듯 첫말을 꺼냈다. 그렇다. 그는 보이지 않은 곳에서 항상 영화, 뮤지컬, 연극, 창극 등과 대중 음악가들을 빛내줬다. 그런 그가 자신의 넓고 깊은 음악세계를 펼쳐내는 대규모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지난 15일과 16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 섰다.

시간을 잠깐 앞으로 돌려본다. 정재일은 스스로를 ‘근본 없는 음악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셀럽이다. 열세 살 때다. 중학교 시절인 1995년 서울재즈아카데미에 들어가 본격적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싹수가 있었다. 곧 기타리스트 한상원에게 발탁돼 한상원 밴드의 베이시스트로 활동했다. 중학교 졸업 후에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음악의 길을 선택했다. 1999년 17세의 나이에 이적, 한상원 등으로 구성된 프로젝트 그룹 밴드 ‘긱스’로 데뷔했다.

박효신의 히트곡 ‘야생화’를 작곡하는 등 이미 천재 뮤지션으로 유명했지만 그의 이름 석자를 세계에 알린 것은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그리고 영화 ‘기생충’ ‘옥자’ ‘브로커’의 음악감독을 맡으면서부터다. 피아노와 기타를 자유자재로 연주한다. 클래식, 대중음악, 그리고 국악을 넘나들며 변화무쌍한 실력을 뽐내고 있다. 직접 노래를 부른 앨범까지 냈다. 한마디로 멀티 플레이어다.

정재일이 지난 15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정재일이 지난 15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16일 공연을 봤다. 세종문화회관 로비에 들어서자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포토월을 배경을 사진을 찍는 팬들이 가득했다. 정재일은 그동안 몇 차례 콘서트를 열었지만 이처럼 대규모 공연장은 처음이다.

무대 배치가 이색적이다. 그와 오랫동안 케미를 맞춰온 스트링 오케스트라 ‘더퍼스트(the 1st)’가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한 줄로 죽 앉았다. 일직선은 아니고 반달 모양 형태다. 신디사이저 권지윤도 자리했다. 정중앙엔 피아노를 놓았다. 아무래도 첼로와 더블베이스 보다는 바이올린과 비올라 파트를 지휘해야 했기 때문에 왼쪽을 볼 수 있도록 피아노를 살짝 비틀어 놓았다.

조명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빛과 어둠만으로 단순하게 꾸몄다. 시노그라퍼(무대·조명 연출자) 여신동은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환상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둥근 모양의 조명은 그대로 바닥 아래로 내려왔다.

정재일은 먼저 세계적 음반 레이블 데카에서 발매한 EP ‘Listen’에 수록된 피아노곡 3곡을 연주했다. 연주할 곡을 직접 친절하게 소개하며 콘서트를 이끌었다. 그는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서로에게 귀를 기울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작곡했다”고 밝혔다. ‘Ocean Meets the Land’ ‘Esthesia’ ‘Listen’ 세 곡을 통해 정재일에게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악기인 피아노의 음색을 오롯이 느끼게 해줬다.

“‘아무도 모른다’라는 일본 영화를 보고 반했습니다. 금세 광팬이 됐어요. ‘어느 가족’에서도 엄청난 놀라움을 보여줬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입니다. 언젠가 꼭 만나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 한국에서 그가 영화를 찍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구구절절 메일을 보냈죠. ‘당신 영화의 음악을 내가 맡고 싶다’고. 그래서 결국 가장 성공한 팬이 됐습니다.”

어쿠스틱 기타를 멘 정재일은 영화 ‘브로커’에 나오는 ‘To Be a Bird(새처럼)’와 ‘Forgiven(용서)’을 들려줬다. 잔잔하고 은은하게 깔리는 기타 선율이 귀에 꽂혔다. 영화 속에 나오는 음악과는 다르게 라이브 연주의 현장감을 고려해 큰 규모로 편곡했다. 비록 송강호, 강동원, 아이유, 배두나, 이주영은 무대에 없었지만 어디선가에서 흐뭇하게 음악을 즐기는 풍경이 오버랩됐다.

정재일이 지난 15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정재일이 지난 15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영화 ‘남한산성’을 연출한 황동혁 감독이 ‘작품 하나 같이 해보자’고 러브콜을 보냈어요. 무조건 한다고 했죠. 그 즉시 ‘남한산성’을 몇 번이나 다시 봤는지 모르겠어요. 공개되고 2~3주쯤 지나니 폭발적인 반응이 몰려왔어요. 어안이 벙벙했죠.”

456억원의 상금을 놓고 의문의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는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음악을 맡았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영화는 보통 2~3시간이면 충분하지만 이것은 9시간짜리 작품이었다. 당황했다.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선율을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든든하게 믿는 구석’인 김성수 음악감독에게 SOS를 쳤다. 그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선율이 ‘Pink Solders’다. 정재일은 피아노 앞으로 가 ‘뚱~땅! 뚱~땅!’ 단조롭지만 중독성 있는 음을 쳐줬다. 김성수 감독은 작곡가로 일할 때 ‘23’이라는 예명을 쓴다. ‘오징어 게임’ OST를 보면 작곡가 ‘23’의 이름이 적혀있다.

정재일은 드라마에 어릴 때 하던 게임이 많이 나오는 까닭에 그 시절의 향수를 느낄 수 있도록 리코더, 소고, 멜로디언 등을 적절히 섞어 음악을 만들었다. ‘Round 1’ ‘Way Back then’ ‘Pink Solders’ ‘I Remember My Name’ ‘Round 6’ ‘Unfolded’를 차례대로 연주했다. 강렬한 일렉트로닉 기타뿐만 아니라 리코더로 3·3·7 박수 리듬을 연주하기도 했다. ‘전방위 뮤지션’ 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줬다.

그리고 ‘Listen’에 수록된 ‘Incendies’에 이어 ‘Those Who Crossed the River(강을 건너간 사람들)’을 잇따라 들려줬다. 특히 ‘Those Who Crossed the River’는 가야금 연주자 박순아와 듀엣으로 선사했다. 재일교포 3세인 박순아는 자신의 소리를 찾기 위해 북한과 한국을 가로질렀다. 북한의 가야금을 배우기 위해 북한으로 갔고, 이어 한국으로 건너와 다시 남한의 가야금을 공부했다.

두 사람은 하루아침에 정든 고향땅을 떠나야만 하는 사람들, 그리고 너무나도 작고 어린 몸으로 매섭고 차가운 강을 건너가야만 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서늘한 슬픔과 감동이 몰아쳤다.

정재일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 참여하게 된 ‘썰’을 풀어 놓았다. 평소에도 봉 감독의 엄청난 팬이었는데 음악을 맡아 달라고 ‘간택’을 받아 무척 기뻤다고 말했다. 하지만 창작이 어디 그렇게 만만한 일인가.

“감독님의 요구 사항은 ‘엉터리 바로크 음악’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어요. 며칠을 고민하다 하나 만들어 가면 캔슬, 또 며칠 고민 끝에 하나 만들어 가면 캔슬이었어요. 이 정도면 되겠지하고 슬쩍 들이밀면 어김없이 퇴짜를 맞았어요. 그러다 술을 잔뜩 마시고 일어나 숙취 속에서 시간에 쫓겨 쓱싹 쓱싹 만든 곡을 줬는데 OK를 하셨죠.”

그러면서 아카데미 작품상을 어시스트한 ‘Opening(시작)’ ‘Busy to Survive(동분서주)’ ‘Zappaguri(짜파구리)’ ‘The Belt of Faith(믿음의 벨트)’ ‘Water, Ocean(물바다)’ ‘Ending(끝)’을 차례대로 연주했다. ‘Zappaguri’와 ‘The Belt of Faith’가 바로 바로크 음악 스타일을 연상시키는 곡으로, 바이올린·비올라·첼로·더블베이스로 구성된 현악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선율을 타고 생생하게 전달됐다.

정재일이 지난 15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정재일이 지난 15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잠시 한숨을 돌린 뒤 하부무대가 위로 솟아오르며 국악팀이 등장했다. 소리 김율희, 대금 아이람, 아쟁 배호영, 그리고 출중한 실력의 사물연주팀 ‘느닷’(장구·소리 이준형, 꽹과리 권설후, 북·태평소 주영호, 징 표한준)이었다. 이들은 정재일이 최근 발매한 앨범 ‘A Prayer’에 수록된 ‘On the Road(길닦음)’와 ‘A Prayer(비나리)’를 연주했다. 지난 10월 런던 바비칸 센터 공연에서 관객들의 환호성과 기립박수를 받았던 곡들이다.

김율희는 ‘A Prayer’ 중간부분에 곧 새해를 맞이하는 관객들을 위한 축원을 넣었다. “오날 여기 오신 모든 분들 / 그저 1년 365일 내내 돌아갈지라도 / 온갖 재난의 액살은 다 비껴가서 / 백천 가지 일들이 맘과 뜻 먹은 대로 모두 이루어지고 / 말씀마다 향기 나고 걸음마다 꽃이 피고 / 어둔 데는 등 돌리고 밝은 대로 앞을 돌려 / 선인 상봉 귀인 상봉 하시라고 / 천만 축수 만만 발언으로 비옵니다” 2024년을 버티어 갈 에너지를 충전한 셈이다.

정재일이 지난 15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정재일이 지난 15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정재일이 지난 15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인터미션 없이 프로그램에 나와 있는 모든 곡의 연주를 마치자 브라보 환호가 쩌렁쩌렁했다. 퇴장했던 정재일이 다시 무대로 나왔다. 그리고는 “한때 싱어송라이터를 꿈꾼 적이 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직접 노래까지 해 음반을 발표했다”고 고백하며 앙코르 첫 곡으로 ‘주섬주섬’을 불렀다. 박창학이 쓴 가사에 정재일이 선율을 붙였다. 매끄럽고 세련된 보이스는 아니었지만 담백하고 순수한 정재일의 목소리는 가슴을 울렸다.

“10대 때 이적 선배님이 노래 한 곡을 들려주었습니다. 규모가 큰 사운드를 최고의 음악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달랑 기타 하나에 목소리 하나 만으로 연주하는 곡이었죠. 단순하고 소박했는데 100인조 오케스트라를 능가했습니다. 그 노래를 조금 편곡해 연주하겠습니다.”

정재일이 통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오케스트라도 함께 연주에 합세했다. 잔잔한 음악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수이자 대학로 소극장 학전의 대표를 맡고 있는 김민기가 부르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정재일은 노래를 부르기 전 김민기를 “어린 시절 여러 음악을 찾아 방황하던 시기에 저를 새로운 음악의 세계로 이끈 예술가다”라고 소개했다. ‘음악의 아버지’임을 고백한 것이다.

“어두운 비 내려오면 /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있네 /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 세찬 바람 불어오면 / 벌판에 한 아이 달려 가네 / 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 /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 새 하얀 눈 내려오면 / 산 위에 한 아이 우뚝 서있네 / 그 고운 마음에 노래 울리면 /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 그이는 아름다운 사람이어라”

김민기가 실제 무대에 등장한 것은 아니다. 미리 음반에서 따낸 그의 육성에 맞춰 정재일이 새로 편곡한 선율을 덧입혔다. 콧등 찡한 뭉클함이 콘서트장을 채웠다. 최근 학전의 폐관 결정과 함께 김민기의 위암 투병 소식이 전해진 터라 감동은 더욱 컸다. 담백한 목소리가 공연장에 울려 퍼지자 객석 곳곳에선 훌쩍이는 소리도 살짝 들렸다.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다. 세종문화회관 관계자는 김민기가 전날(15일) 공연장을 찾아 정재일의 무대를 직접 관람했다고 귀띔했다.

정재일이 지난 15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정재일이 지난 15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정재일이 지난 15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미국 국적으로 한국에 여행 온 50대 남성은 “한 무대에서 서양악기, 한국 전통악기, 기타가 만드는 하모니가 정말 놀라웠다”며 “‘오징어 게임’ ‘기생충’을 정말 재미있게 봤고 단순히 그 음악들을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오늘 정말 놀라운 연주를 경험했다. 앞으로 한국 전통음악에 더욱 관심을 갖고 싶어졌다”며 환호했다.

다국적 기업에서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는 성남 거주 40대 여성은 “정재일의 오랜 팬으로 공연장을 찾았다. 곡의 흐름에 따라 겹겹이 쌓아 올라가는 무대 연출과 음악적 완성도가 숨이 막힐 듯 먹먹한 감동을 느꼈다. 때로는 내가 호수 위에 떠 있는 듯했고 때로는 무한대로 펼쳐져 있는 우주에서 홀로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우리 소리와 서양의 현이 정재일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하나의 울림을 내는 것이 매우 놀랍고 감사한 경험이었다”고 설명했다.

거문고 연주자 박다울도 관객으로 이날 공연장을 찾았다. 그는 “음악적 완성도뿐만 아니라 무대 연출의 완성도가 너무 놀라웠다. 특히 마지막 앙코르로 김민기의 곡이 연주될 때는 그 감동에 객석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이 여운이 아주 오래 갈 것 같다”고 말했다.

/eunki@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