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솔로이스츠, 플루티스트 최나경, 기타리스트 드니 성호가 27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김택수의 ‘키메라 모음곡’을 연주하고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직접 대본을 쓰고 내레이션으로 참여했다. ⓒ세종솔로이스츠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첫 번째는 ‘에어리얼’이라는 이름으로, 인간과 박쥐의 혼종인 날 수 있는 인간입니다.”

프랑스의 세계적인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최근 출간한 신작 ‘키메라의 땅’에 나오는 한 부분을 프랑스어로 읽었다. 자신의 작품에서 중요한 텍스트를 뽑아내 직접 대본을 썼다. 길지 않은 1~2분 안팎의 짧은 글이다. 동시에 무대 위 스크린에는 한글 자막을 띄웠다.

내레이션이 끝나자 세종솔로이스츠와 플루티스트 최나경, 기타리스트 드니 성호는 한 팀이 되어 그 파트에 어울리는 음악을 연주했다. 모두 8개 악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제목은 ‘키메라 모음곡’. 8월 27일(수)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세계 초연했다.(엄밀히는 이에 앞서 8월 23일 대전 예술의전당에서 세계 초연)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에 어울리는 음악과 작가의 낭독이 결합돼 청중들에게 이전에 없던 새로운 클래식 콘서트를 경험하게 해줬다.

세종솔로이스츠는 올해 ‘제8회 힉엣눙크! 뮤직 페스티벌’을 맞이해 김택수 작곡가에게 곡을 특별 위촉했고, 그 결과물로 소설 ‘키메라의 땅’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줄거리를 토대로 작품이 탄생했다.

‘살아있는 21세기 클래식 음악의 현장을 보여준다’는 세종솔로이스츠의 모토를 올해도 충실하게 수행했다. 라틴어라 발음이 어려운 것처럼 보이지만 영어 ‘Here and Now’와 뜻이 같은 ‘힉엣눙크!(Hic et Nunc!)’는 ‘여기 그리고 지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세종솔로이스츠는 수백 년간 내려오는 전통 클래식 곡들을 연주하지만 동시에 현존하는 작곡가들에게 늘 신작을 위촉한다. 그래서 세종솔로이스츠의 프로그램에는 ‘세계 초연’ ‘아시아 초연’ 같은 설명이 자주 붙어있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27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김택수의 ‘키메라 모음곡’ 공연에서 직접쓴 대본으로 내레이션을 하고 있다. ⓒ세종솔로이스츠 제공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27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김택수의 ‘키메라 모음곡’ 공연에서 직접쓴 대본으로 내레이션을 하고 있다. ⓒ세종솔로이스츠 제공


‘키메라의 땅’은 제3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세상에서 새로운 종족 ‘키메라’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베르베르가 그린 키메라는 인간과 박쥐의 혼종 ‘에어리얼’, 인간과 두더지의 혼종 ‘디거’, 인간과 돌고래의 혼종 ‘노틱’ 세 종족이다. 이들은 구인류가 가지지 못한 능력이 있다. 하늘을 날 수 있고, 땅속을 팔 수 있고, 물속을 헤엄칠 수 있다. 세 종족 외에 ‘악셀’(인간+도롱뇽)도 있다. 악셀은 종족의 이름이 아니라 한 인간의 이름이다. 하늘, 땅 밑, 바다라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는 새 인류가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에 기존 인류는 과연 어떤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김택수 작곡가는 “소설이 인간과 동물의 혼종인 신인류(키메라)의 이야기라는 점에 착안해, 구인류(순혈인간)를 상징하는 바로크 음악의 형식을 ‘돌연변이같이’ 변주했다”며 “알르망드, 사라방드, 지그 등 바로크 음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리듬패턴을 사용하되 멜로디, 코드, 프레이징 등에 있어서는 현대적인 아이디어를 가미해 초현실적 느낌을 줬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소설 속 에어리얼, 노틱, 디거, 악셀은 각각 플루트, 기타, 저음 현악기(첼로·콘트라베이스), 고음 현악기(바이올린·비올라)와 관련된다”며 “각 종족은 그들의 캐릭터를 담은 라이트모티브로 대변되는 데, 이들은 표면적으로 대조되지만 결국 모두가 ‘인간’이라는 점을 반영해서 자세히 또는 반복해서 들으면 서로 연관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낯설 수 있는 음악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도록 팁을 줬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27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김택수의 ‘키메라 모음곡’ 공연에서 김택수 작곡가와 포옹을 하고 있다. ⓒ세종솔로이스츠 제공


1악장 ‘서주’, 2악장 ‘창조’, 3악장 ‘디거들’, 4악장 ‘노틱들’, 5악장 ‘에어리어들’, 6악장 ‘갈등들’, 7악장 ‘악셀’, 8악장 ‘울림들’ 등 모두 8개 악장은 약 40분 정도의 길이다. 현대음악이지만 어렵지 않았다.

‘창조’는 신성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플루트, 기타, 첼로·콘트라베이스로 표현한 에어리얼, 노틱, 디거의 등장은 생명을 담은 숨결처럼 느껴졌다. ‘디거들’은 현악기를 짧게 짧게 끊어 연주해 긴장감을 고조시켰고, ‘노틱들’은 가운데서 격렬한 기타 소리가 중심을 잡았지만 그 위쪽으로 현악기가 포개지며 감성적 선율이 흘렀다. ‘에어리얼들’은 현악기가 하늘을 날아오르듯 깃털처럼 가벼운 소리를 냈다. 플루트는 가녀린 음과 날카로운 음을 번갈아 토해냈다.

하이라이트는 ‘갈등들’. 각 종족들의 정착, 진화, 분열, 반목이 한꺼번에 분출됐다. 지금까지 나온 라이프모티브들이 뒤섞이며 다양한 장면이 쏟아졌다. 귀를 자극하는 금속성 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각 악장마다 가볍게 손을 흔들며 지휘하는 포즈를 취하던 베르베르는 “와우~”라고 외쳐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도 이 악장이 가장 마음에 들었나보다.

세종솔로이스츠가 27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메타모르포젠’을 연주하고 있다. ⓒ세종솔로이스츠 제공


세종솔로이스츠는 2부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메타모르포젠’을 연주했다. 귀로 들리는 소리는 풍성했지만, 그 속에는 깊은 침울함이 깃들어 있다. 조용하게 흐르는 음표 사이사이에 회한(悔恨)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억눌러왔던 뜨거운 것이 기어이 목구멍을 뚫고 나왔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80세 노장이었던 슈트라우스는 그동안 겪은 슬픔을 ‘메타모르포젠’에 담았다. 자신의 음악 인생에서 전부나 다름없었던 뮌헨 궁정극장, 드레스덴과 빈의 오페라하우스가 파괴되는 모습을 지켜봤다. 더욱이 ‘나치 부역자’라는 꼬리표도 붙었으니 막다른 골목에 갇혀있는 신세였다.

1945년 초반에 작품을 구상했다. 괴테의 전집을 읽던 슈트라우스는, 그의 후기 시 ‘온순한 크세니엔’에 담긴 자기 성찰에 매료됐다. ‘누구도 자신을 진정으로 알 수 없다’와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라는 두 편의 시 전문을 작품에 옮겨 적을 정도로 심취했다.

결국 ‘메타포르포젠’에 짙게 똬리를 틀고 있는 우울함은 전쟁이라는 비극을 넘어 한 위대한 예술가의 자기 성찰에서 비롯된 후회와 반성이다. 메타포르포젠이라는 제목 역시 괴테가 자신의 정신적 탐구를 묘사하기 위해 즐겨 사용했던 단어라고 한다.

슈트라우스는 ‘메타포르포젠’에 ‘23개의 독주 현악기를 위한 연습곡’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23개의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로 연주하는 곡이라고 못박아 놓았다. 23개의 파트는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하나로 소리를 모으기도 하면서 애간장을 녹였다. 마침내 절망이 극에 달하는 순간, 첼로와 베이스가 베토벤 ‘영웅교향곡’ 속 장송행진곡을 드러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비통함은 눈가를 촉촉하게 만들었다.

앙코르는 브람스의 ‘왈츠’. 슬픔으로 위로 받았으니, 기쁨으로 힐링하라는 친절한 배려다.

/park72@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