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겨울나그네’ 70분 순삭...거꾸로 한번 더 듣고 싶었던 벤야민 아플의 매직

피셔-디스카우의 마지막 제자 첫 내한 공연
​​​​​​​사이먼 레퍼 피아노와 환상적 감동케미 선사

민은기 기자 승인 2024.09.08 10:02 | 최종 수정 2024.09.09 15:37 의견 0
바리톤 벤야민 아플이 한세예스24문화재단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열린 슈베르트 연가곡 ‘겨울나그네’ 콘서트에서 노래하고 있다. ⓒ한세예스24문화재단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한 자리에 서서 프란츠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전곡을 쉬지 않고 노래하는 일은 고행이다. 비록 앉아 있지만 듣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가수도 청중도 고도의 집중력으로 긴 시간을 버텨야한다. 작품 전개 흐름에 따라 몇 파트로 나눠 부를 수도 있지만, 성악가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옴짝달싹 않고 노래한다. 특정한 테마나 스토리에 기초해 몇 개의 곡을 묶어 놓은 연가곡이라는 장르의 특성 때문에, 중간에 멈추면 느낌이 깨진다. 계속 이어 불러야 제 맛을 음미할 수 있다.

5일 롯데콘서트홀. 바리톤 벤야민 아플(1982년생)이 첫 번째 곡 ‘안녕히’부터 마지막 곡 ‘거리의 악사’를 끝마치자 오히려 시간 순삭이 아쉬웠다. 24곡 모두를 부르는데 70분 정도 걸렸는데, 24번부터 1번까지 거꾸로 다시 한 번 더 듣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였다. 아플은 리트(독일 예술가곡) 스페셜리스트로서 진가를 드러냈다. ‘불멸의 가수’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1925~2012)의 마지막 제자라는 타이틀이 헛말이 아니었다.

슈베르트(1797~1828)는 서른한 살 짧은 생을 살았다. ‘겨울나그네(Winterreise)’는 슈베르트가 죽기 1년 전인 1827년 서른 살 때 썼다. 빌헬름 뮐러(1794~1827)의 시에 선율을 붙여 완성했다. 원래 독일어 ‘디 라이제(Die Reise)’는 ‘나그네’가 아니라 ‘여행’이라는 뜻이지만, 모두의 고개가 끄덕여지게 멋지게 의역을 해서인지 지금도 그냥 ‘겨울나그네’로 불린다.

바리톤 벤야민 아플이 슈베르트 연가곡 ‘겨울나그네’ 콘서트에서 사이먼 레퍼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하고 있다. ⓒ한세예스24문화재단 제공
바리톤 벤야민 아플과 피아니스트 사이먼 페퍼가 슈베르트 연가곡 ‘겨울나그네’ 콘서트를 마친뒤 관객에게고 인사하고 있다. ⓒ한세예스24문화재단 제공


벤야민 아플은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지금은 영국 시민권자다. 리사이틀에 앞서 3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시와 음악이 결합한 리트는 독일이 가지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예술의 형태이자 독일 최고의 문화수출품이다”고 말했다. 그는 첫 내한공연에서부터 연인과 이별한 청년의 고통과 슬픔을 때로는 쓸쓸하게, 때로는 절절하게, 때로는 비장하게 풀어 놓으며 한국 관객을 사로잡았다.

리트의 묘미는 피아노다. 그냥 반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수와 끊임없이 음악으로 대화하며 곡을 이끌어 가는 ‘왼쪽 날개’의 역할을 맡는다. 피아니스트 사이먼 레퍼는 ‘오른쪽 날개’ 벤야민 아플과 환상케미를 이뤘다. 이심전심(以心傳心), 지음(知音), 염회시중(拈華示衆). 그런 영역을 눈앞에서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안녕히’(제1곡)는 사랑에 버림받은 한 남자가 연인의 집 문에 ‘구테 나흐트(Gute Nacht)’라는 밤 인사를 적어 놓고 먼 길을 떠나는 내용이다. “어차피 낯선 이방인으로 왔다가 다시 낯선 이방인으로 떠나네”라는 첫 구절이 허허롭다. 동양의 사상과 맞닿아있음이 신기하다. 아플의 목소리는 정처 없는 방랑길·유랑길을 떠나는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셀프 인사다.

‘풍향기’ ‘얼어붙은 눈물’ ‘동결’을 거쳐 ‘보리수’(제5곡)에 이르렀다. 중·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도 실려 있어 귀에 익숙한 곡이다. 사실 교과서에 실린 곡은 슈베르트의 원곡이 아니라 프리드리히 질허(1789~1860)의 편곡버전이다. 오리지널을 손질해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도록 대중적인 곡으로 바꾼 것. 아플은 독일어로 노래했지만, 곡을 알고 있는 관객들은 속으로 조용히 한국어 가사로 따라 불렀으리라. “성문 앞 우물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서 단꿈을 꾸었네/ 수많은 사랑의 말들을 가지에 새기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곳을 찾았었지/ 오늘도 밤이 깊도록 헤매고 다녔다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았지/ 그러자 가지가 바스락거렸네, 마치 나를 부르듯이/ 내게로 오게나, 친구여/ 여기서 이제 안식을 찾게나/ 차가운 바람이 자꾸만 내 뺨을 때리고 있네.”

바리톤 벤야민 아플이 한세예스24문화재단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열린 슈베르트 연가곡 ‘겨울나그네’ 콘서트에서 노래하고 있다. ⓒ한세예스24문화재단 제공
바리톤 벤야민 아플이 슈베르트 연가곡 ‘겨울나그네’ 콘서트에서 사이먼 레퍼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하고 있다. ⓒ한세예스24문화재단 제공


아플은 노래 속 주인공과 함께 겨울나그네가 되어 눈과 얼음이 뒤덮인 벌판으로 떠났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눈 위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차디 찬 눈송이가 목마른 듯이 냉큼 눈물을 집어 삼켰다.(제6곡 ‘넘쳐 흐르는 눈물’) 어떤 때는 살짝 희망의 봄을 기대하기도 했다. 다채로운 꽃의 꿈을 꾸었다. 마치 5월처럼 활짝 피었다. 아름다운 소녀와의 포옹과 입맞춤을 그리며 더없는 기쁨과 행복을 생각하기도 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생기 넘치는 멜로디와 아련한 선율이 반복되는 피아노 소리는 계속 귀에 남았다.(제11곡 ‘봄날의 꿈’)

공연에 앞서 김성현 기자가 렉처(강의)를 진행했는데, 특히 ‘우편마차’(제13곡)의 감상팁을 알려줘 도움이 됐다. 앞부분에 나오는 긴박한 피아노 리듬은 말발굽·마차바퀴 소리를 연상시킬 뿐만 아니라 연인의 편지를 기다리는 들뜬 마음까지 고스란히 표현했다. 하지만 주인공이 편지가 없음을 알고 실망하는 부분에서 피아노 소리는 저음으로 뚝 떨어졌다. 음표로 세밀하게 심리를 묘사한 슈베르트의 스킬이 놀랍고, 그런 슈베르트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으며 노래한 아플의 테크닉도 놀랍다.

‘여관’(제21곡)에서 보여준 사미먼 레퍼의 피아노는 엑설런트했다. 슈베르트의 또 다른 피아노 소나타와 같았다. 하나의 독립된 피아노곡으로 연주해도 될 만큼 귀를 사로잡았다.

이번 무대는 한세예스24문화재단이 창립 10주년을 맞아 준비한 공연이다. 그동안 회화(전시)와 출판에 집중했는데, 열 살이 되어 앞으로 클래식 음악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하겠다며 마련한 첫 콘서트다. 객석의 1/5 가량을 대중에게 오픈해 누구나 응모하면 추첨으로 뽑아 초대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다 보니 평소의 클래식 공연장에 비해 ‘소음’이 많았다. 옥에 티였다. 깜빡 졸음 탓에 떨어지는 휴대폰 소리, 곡과 곡 사이에 쏟아진 기침 소리는 방해가 됐다. ‘환영의 태양’(제23곡)에서는 기어코 벨소리 테러가 발생하기도 했다.

바리톤 벤야민 아플이 한세예스24문화재단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열린 슈베르트 연가곡 ‘겨울나그네’ 콘서트에서 노래하고 있다. ⓒ한세예스24문화재단 제공


공연 시작 전 해설자는 미리 당부의 말을 건넸다. 처연한 분위기의 곡 특성을 감안해 노래가 모두 끝나면 잠시 침묵을 즐겨달라고 요청했지만, 이를 주의 깊게 듣지 않은 일부 관객 탓에 감동이 상처를 입었다. 마지막 곡 ‘거리의 악사’(제24곡)가 끝나고 아플이 여운을 느끼며 얼음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성급하게 박수가 터져 나왔다. 70분 동안 쌓은 공든 탑이 무너져 안타까웠다. 무대 위 아플은 그래도 관객에게 환한 웃음으로 답하며 프로의 자세를 잊지 않았다.

앙코르는 한국 동요 ‘오빠생각’(최순애 시·박태준 곡)을 불렀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라는 가사를 어색하게 발음하기는 했지만, 비단 구두 사가지고 돌아올 서울 가신 오빠를 기다리는 여동생의 마음을 잘 담아냈다. 이 곡 역시 너무 빨리 나온 박수 때문에 스크래치가 생겼다. 가사를 다 부른 뒤 마지막 반주에서 허밍파트를 준비했는데 박수 소리에 묻혀버렸다.

한세예스24문화재단 백수미 이사장은 “앞으로도 위대한 시인들의 문학 작품에 훌륭한 선율이 깃든 가곡 위주의 공연에 집중할 계획이다”라며 이어 “내년에는 거장급 아티스트 섭외를 고려 중이다”라고 밝혔다.

/eunki@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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