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그 스승에 그 제자 보여주겠다.” 전설적인 성악가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1925~2012)의 마지막 제자로 유명한 바리톤 벤야민 아플(1982년생)이 한국을 최초로 찾는다. 오는 9월 5일(목) 오후 7시 롯데콘서트홀에서 ‘2024 여름에 만나는 겨울나그네(Winterreise in Summer)’라는 타이틀로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의 연가곡 ‘겨울나그네’를 들려준다.
이번 공연은 올해 설립 10주년이 된 한세예스24문화재단이 마련했다. ‘열 살’을 맞아 그동안 전시·문학 분야에 집중됐던 문화예술사업을 음악 분야로까지 확장하겠다는 플랜을 밝혔는데 그 첫 걸음이다. 지난 4월 열린 10주년 기념식에서 백수미 이사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 ‘겨울나그네’를 시작으로 매년 정기적으로 양질의 음악 공연을 선보일 계획입니다. 한국에서 성악 공연은 대체로 오페라에 집중돼 있거나, 스타 음악가들의 리사이틀에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 이에 재단은 슈베르트나 슈만 등 유명 작곡가들의 가곡 작품을 선택해 위대한 시인들의 문학 작품에 아름다운 선율이 깃들여진 공연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한세예스24 그룹 내 문화 플랫폼인 예스24와 대표 의류기업인 한세엠케이 등과의 협업을 통해 세계적 음악가의 공연을 순차적으로 선보이고자 합니다.”
야심찬 시도다.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객석의 1/5 가량을 대중에게 오픈해 누구나 추첨에 응모해 뽑히면 초대받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미술, 문학,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프로젝트를 통해 대중들의 문화 경험을 확대하고, 궁극적으로는 한국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포부다.
공연 포스터에 쓰인 쓸쓸한 나무 그림이 눈길을 끈다. 재단이 주최했던 2015년 국제문화교류전 ‘베트남의 아우라’에 전시된 응웬 득 비에 작가의 ‘Tree and Lake’(2013)를 활용했다. 각각 따로 진행되는 문화예술사업이 아니라 미술, 문학, 음악이 하나로 통합돼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공연을 위해 한국을 처음 찾는 바리톤 벤야민 아플(1982년생)에게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는 전설적인 성악가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1925~2012)의 마지막 제자로 유명하다.
독일에서 태어난 아플은 두 명의 형과 함께 1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합창단인 레겐스부르크 돔스파첸(975년 창단)에서 활동했다.
음악에 대한 꾸준한 애정은 있었지만 먹고 사는 문제에 직면했다. 레겐스부르크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뒤 은행원으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 시절에 대해 “혼자서 세계를 돌아다니며 가방 하나만 가지고 사는 예술가의 삶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미련을 온전히 버릴 수는 없었다. 경영학 학위 코스를 밟는 한편 아우크스부르크 음악대학에서 소프라노 에디스 와인스가 가르치는 솔리스트 수업에 오디션을 봤다. 그의 지도 하에 2008년부터 뮌헨 음악대학교에서 성악 수업을 이어갔으며, 뮌헨 프린츠레겐텐테아터의 바이에른 테아터아카데미 아우구스트 에베르딩 오페라 과정에서 교육을 받았다. 또한 피아니스트 헬무트 도이치의 리트 수업에도 참여했다.
2010년 아플은 런던으로 이주해 길드홀 음악연극학교에서 루돌프 피어나이 밑에서 공부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브리기테 파스벤더, 제럴드 핀리, 크리스티안 게르하허, 토마스 햄프슨, 페터 슈라이어 등의 마스터클래스에도 참여했다. 2019년에는 영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아플은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를 멘토로 삼아 그의 지도를 받았으며, 그의 음악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2009년 아플은 오스트리아 슈바르첸베르크에서 열린 슈베르티아데 마스터클래스에서 피셔-디스카우를 만났다. 아플은 피셔-디스카우의 공연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음악적 표현력과 예술성에 매료됐다. 이 만남은 피셔-디스카우가 2012년 5월 사망할 때까지 그의 마지막 학생으로 개인 레슨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됐다.
피셔-디스카우는 아플의 재능을 인정하고 그의 성장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아플에게 노래 기법뿐만 아니라 음악 해석, 무대 표현 등 다양한 것을 가르쳤다. 피셔-디스카우는 아플에게 막대한 음악적 영향을 미쳤다. 아플은 스승의 섬세하고 감성적인 노래를 배우고자 노력했으며, 그의 깊이 있는 해석을 자신의 노래에 반영했다. 또한 무대 매력을 본받아 관객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웠다. 아플은 한 인터뷰에서 “디트리히는 단순한 스승이 아니라 멘토였다. 음악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고 말했다.
피셔-디스카우는 2012년 5월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플은 큰 슬픔을 느꼈지만, 그의 음악적 유산을 이어가기 위해 더욱 열심히 노력했고 그는 리트 스페셜리스트로 인정받으며 피셔-디스카우의 후계자로 평가받고 있다. 스승의 음악적 정신을 이어가며 자신의 스승이 그러했듯 오페라와 리트를 오가며 균형 있게 세계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2024 여름에 만나는 겨울나그네’로 명명된 이번 공연의 프로그램 ‘겨울나그네’는 슈베르트가 빌헬름 뮐러(1794~1827)의 시에 곡을 붙인 연가곡이다. 실연으로 인한 깊은 슬픔과 절망 속에서 방황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독일 리트의 정수로 평가받고 있다.
‘겨울나그네’는 24개의 곡으로 구성돼 있으며, 크게 3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분(1~12곡)에서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성에게 거절당한 후, 겨울 풍경 속을 방황하며 자신의 슬픔과 절망을 노래한다. 두 번째 부분(13~18곡)에서 주인공은 희망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좌절한다. 세 번째 부분(19~24곡)에서 주인공은 죽음을 맞이하며, 자신의 삶을 회상한다.
아플은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와 긴밀한 인연이 있는 성악가다. 팬데믹의 끝인 2022년 영국 BBC와 함께 ‘겨울나그네’를 독특하게 선보이는 영화 프로젝트 ‘겨울기행(Winter Journey)’에 출연했다. 스위스 알프스에 위치한 율리에르 패스(산악 횡단 도로)에서 촬영된 이 작품은 90분에 걸쳐 ‘겨울나그네’ 전곡 연주와 아티스트 인터뷰 등을 담았다. 데임 자넷 베이커,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요나스 카우프만 같은 예술가들의 다큐멘터리로 유명한 존 브리드컷이 연출했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콘서트 영화가 아니고, 원작의 감성적 흐름을 따라 가며 자연의 풍경 안에서 ‘겨울나그네’를 재해석했다. 시대를 초월하는 걸작에 대한 창의적인 탐구였으며, 슈베르트의 음악에 대한 시각적 표현과 함께 생각을 자극하는 해석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플은 또한 같은 해 런던에서 이어진 스튜디오 레코딩을 통해 ‘겨울나그네’(알파 클래식스) 앨범을 발표했다. 프랑스의 디아파종지 리뷰에서 “벤야민 아플은 이 연작의 모든 섬세한 부분을 독창적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두 음악가는 이 작품에 잊을 수 없는 해석을 선사한다”라는 평가와 함께 만점을 받았다. 앨범 발표 후 영국의 그라모폰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아플은 작품이 가진 매력을 설명했다.
“이 작품을 할 때마다 매번 다른 여행이 됩니다. 수많은 길잡이 표식이 나오며 –한 곡은 ‘이정표(Der Wegweiser)’라는 제목까지 붙어 있죠- 그리고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많은 선택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이 작품이 뛰어난 작품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여인과도 실제로 제대로 사귀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헤어졌을까요? 이 작품은 항상 작은 힌트만 제공하며 상상력을 열어줍니다. 수천 개의 질문을 할 수 있고, 각 질문은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멋진 일이며, 피셔-디스카우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음악가들이 왜 평생 이 연작을 다시 불렀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청중에게도 매력적인 이유며, 수백 개의 녹음이 나와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보람이 되는 것은 매번 연주가 다르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또한 겨울 여행의 텍스트 중 일부는 고립과 외로움, 그리고 삶, 타인과의 관계 등에 대한 질문과 매우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에 이번 어려운 시기에 BBC와 함께 필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슈베르트 전문가이자 정신분석학 교수인 제 친구와 이야기했습니다. 그에게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봉쇄 기간 동안 훨씬 더 많이 했던 걷기의 심리학에 대해 물었고, 그는 그것을 슈베르트와 프로이트와 연관 지었습니다. 연결할 수 있는 점이 너무 많습니다.”
‘겨울나그네’서 피아노는 단순한 반주 악기가 아닌, 작품의 음악적·정서적 표현에 필수적인 요소며, 주인공의 내면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노래와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영국왕립음악원 교수인 피아니스트 사이먼 레퍼(1974년생)가 이번 공연을 위해 역시 최초로 내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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