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예전에는 큰 공연장에서 유명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게 행복했다면, 지금은 작더라도 의미 있는 연주에서 더 큰 행복을 느껴요. 정말 중요한 것은 청중과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함께 호흡하는 것 같은 연주입니다. 그런 공연은 마법처럼 기억에 남습니다.”
내년 데뷔 35주년을 맞는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이 9일 서울 서초구 코스모스아트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20대 때보다 40대가 된 지금 음악을 더 즐기는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엄마, 아빠, 매니저, 튜터(개인 과외 선생님)와 함께 굉장히 바쁘게 다녔다. 연주와 레코딩 스케줄로 정신이 없었다”라며 “하지만 요즘은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하고, 함께하고 싶은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추고, 또 듀오 파트너와 레퍼토리를 구상할 수 있어 무대가 더 즐겁다”고 말했다. 음악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더 성숙해졌음을 보여주는 멘트다.
사라 장은 클래식 음악계 수많은 ‘신동’ 중에서도 원조였다. 만 9세였던 1990년 주빈 메타가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 신년음악회에서 고난도의 파가니니 협주곡을 협연하며 데뷔했다. 10분의 기립박수와 여섯 번의 커튼콜은 지금도 화제다.
이듬해에는 EMI 레이블의 최연소 레코딩 기록을 세웠고, 1994년에는 세계 최정상 교향악단 베를린 필하모닉과 협연했다. 쿠르트 마주어, 리카르도 무티, 마리스 얀손스, 사이먼 래틀 등 저명한 지휘자들과 호흡을 맞췄다.
사라 장은 국내에서 ‘디셈버 우먼(December Woman)’으로 통한다. 12월이면 늘 한국에서 공연한다. 올해도 서울을 비롯해 성남, 울산, 고양, 익산, 청주, 인천, 대구, 경주, 평택, 부산, 광주, 강릉 등 13개 도시에서 팬들을 만난다. 5년 만의 내한 독주회다. 서울 공연은 29일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다.
이번 투어는 브람스와 프로코피예프의 작품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브람스의 초기작인 ‘스케르초 c단조('F.A.E 소나타' 중 3악장)’와 그의 마지막 바이올린 소나타인 ‘3번’, 그리고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2번’을 연주한다.
‘F.A.E. 소나타’는 디트리히, 슈만, 브람스가 바이올리니스트 요하임과의 우정을 기리며 작곡한 곡이다. 세 작곡가는 요하임의 음악적 모토였던 ‘Frei aber einsam(자유롭지만 고독하게)’에서 ‘F.A.E. 소나타’라는 제목을 따왔다. 1악장(알레그로)은 디트리히, 2악장(인터메조)은 슈만, 3악장(스케르초)은 브람스, 4악장(피날레)은 슈만이 작곡했다. 사라 장은 브람스를 가장 사랑하는 작곡가로 꼽았다.
“브람스는 너무 너무 로맨틱해서 좋아요. 바흐와 모차르트는 구조가 딱딱 정해져있는데, 브람스는 마음에서 쏟아져 나오는 대로 연주해도 괜찮아요. 브람스는 곡을 쓰다가 마음에 안들면 그냥 버렸다고 합니다. 한쪽에 '저장'해 놓았다가 나중에 다른 데에 활용한 다른 작곡가들과 확연하게 다른 점이죠. 브람스는 그만큼 완벽주의자고, 그게 또 제 캐릭터와도 맞는 거 같아요.”
이번 리사이틀 투어는 10년 동안 호흡을 맞추고 있는 피아니스트 훌리오 엘리잘데와 함께 한다. 두 사람은 줄리어드 동문이지만 재학 당시에는 서로 모르고 지냈다고 한다. 엘리잘데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사라가 쇼스타코비치 곡을 연주하는 모습을 처음 봤는데, 그때 그가 정말 최고라고 생각했다”며 “긴 시간동안 함께 음악을 하면서 매번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는 늘 다채롭게 해보고 있다”고 말했다.
엘리잘데는 사라 장에게 고마운 마음도 내비쳤다. “바이올린만 드러나는 음악이 아니라, 피아노와 함께 빛나는 음악을 보여주고 있다”라며 “이렇게 세계적 연주자인 사라 장이 피아니스트를 신뢰해서 정말 대등하게 연주할 수 있는 것은 영광이다”고 덧붙였다.
사라 장은 엘리잘데의 비밀도 공개했다. “저도 그렇지만 음식 먹는 것을 너무 좋아해 어느 도시를 가든 레스토랑 리스트를 꿰고 있다”며 “얼마 전 일본 공연을 했는데 1년 전부터 이 식당을 꼭 예약하라고 닦달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서로 음악만 공유하면 친해지지 않는다. 이런 부수적인 것도 함께 해야 더 친해진다”라며 환상케미의 비법을 고백했다.
사라 장은 코로나19 이후 세상을 보는 눈이 살짝 달라졌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
“코로나 때문에 엄마 생일, 제 생일, 추석, 크리스마스를 처음으로 같이 보낼 수 있었어요. 아무리 바쁘게 다녀도 개인적으로 행복하고 균형이 잘 잡혀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가족과 함께하는 것과 연주하는 것의 밸런스를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아직 완벽하게 찾지는 못했지만요.”
이번 투어에서 사라 장은 거장 아이작 스턴(1920~2001)이 쓰던 1717년 제작 ‘과르네리 젤 제수’로 연주한다. 열네 살 때 물려받았다.
“스승님이 어느 날 자신의 악기들을 보여줬어요. ‘너도 나처럼 손이 작으니, 이것이 잘 어울리겠다’라며 과르네리 중에서도 크기가 작은 편에 속하는 것을 골라줬습니다. 허리 부분도 가늘어 저에겐 안성맞춤입니다.”
악기가 같아도 활이 다르면 소리가 달라진다. 그래서 브람스를 연주할 때와 프로코피예프를 연주할 때 각각 다른 활을 쓴다. 그는 이번에 풍성한 소리를 전해주기 위해 활을 4개 준비했다고 덧붙였다.
한국 청중들의 특징에 대해서는 다양한 연령대를 꼽았다. 그는 “몇 십 년 동안 클래식 음악을 지원해 주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아주 어린 아이들도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공연장에 온다”며 “따뜻한 환호에 감사하고, 어느 곳보다 음악을 사랑하는 나라라는 점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사라 장은 어린 시절 앞선 세대의 명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조언을 잊지 못한다. 정경화는 굳이 시간을 내 어린 사라 장에게 국제 음악계에서 활동하는데 도움이 되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사라 장은 “해외의 학교에서, 콩쿠르에서 젊은 한국 연주자들을 볼 때마다 자랑스럽다”며 “한국 출신 음악가들끼리 조언을 주고 받으며 한국을 빛내고 국제적으로도 주목받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예상하지 못한 비상계엄 사태로 공연예술계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우려에 대한 입장을 묻자 그는 담담하게 답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또한 어떤 개인사가 있든 무대에 서서 연주를 하면 음악 앞에서는 단순하고 순수해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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