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애써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흑백사진...이호준 작가 ‘직조’ 출간

뚜벅이 방랑 카메라맨 ‘20년 찰칵의 시간’ 엮어
도시가스 계량기·때묻은 목장갑 등 섬세하게 포착

민은기 기자 승인 2024.12.17 17:30 | 최종 수정 2024.12.17 17:35 의견 0
이호준 작가가 길 위에서 만난 순간을 포착한 흑백사진을 엮어 포토에세이 ‘직조’를 펴냈다. ⓒ궁편책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40대 중반을 넘어서던 때였다. 삶의 스트레스 탓에 몸과 마음에 문제가 생겼다.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뗄 때마다 눈에 익은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DSLR 카메라를 구입해 사진을 찍게 됐다. 어느덧 서대문우체국장을 마지막으로 30여 년의 공직 생활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지금도 늘 ‘찰칵의 시간’이 가장 설렌다.

주말이나 공휴일, 그리고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휴일 새벽 카메라를 들고 일출맞이에 나선다. 이렇게 해돋이 의식을 치른 지 벌써 20년이 됐다. 뚜벅이 방랑 카메라맨이다. 부암동에서 출발해 인왕산 자락을 따라 걷다가 서촌으로 방향을 튼다. 효자동을 지나 청와대, 삼청동을 거쳐 북촌 언저리를 둘러본 후 종로3가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 코스의 특징은 동네를 넘나들 때마다 서로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산동네답게 꾸밈없는 부암동,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주거 형태가 섞여있는 서촌, 격조 있는 삼청동, 전통미 넘치는 북촌. 생각해 보니 이들 동네는 아파트가 거의 없다. 그래서 풍경이 다채롭고 깊이가 있다.

이호준 작가가 길 위에서 만난 순간을 포착한 흑백사진을 엮어 포토에세이 ‘직조’(궁편책·208쪽·3만5000원)를 펴냈다. 엄청난 시간과 돈을 들여, 사진빨 좋은 곳을 찾아가 찍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위의 흔한 풍경이지만, 그 속에 깃든 핵심을 찾아낸다. 낡을수록 더 빛나는 것들을 발견한다.

그는 “좋은 사진은 꼭 유명한 장소에서만 나오란 법은 없다. 오히려 집 주변, 늘 오가는 거리와 골목에서 얻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렇게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나만의 사진 영토를 만들어보는 게 좋다”고 말한다. 추천사를 써준 정길화 동국대 한류융합학술원장은 “그에게 출사(出寫)는 출사(出思), 즉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라고 명쾌하게 정의했다.

도심 벽면을 무심하게 채우고 있는 도시가스 계량기,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기름때 묻은 목장갑, 철공소에 걸려 있는 멍키스패너와 드라이버, 낡은 아파트의 외벽, 좁은 골목길 등 소소한 것들이 그의 렌즈를 통과하면 특별한 것이 된다. 모든 사물을 오브제로 바라보는 애정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흑백 사진, 이 무채색의 이미지는 언뜻 무미건조해 보이지만 컬러 사진과는 다른 이끌림이 있다. 색의 부재는 피사체의 부족한 틈을 메우고 은근하게 가림으로써 핵심에 바로 다가갈 수 있게 한다.”(39쪽)

책의 제목이 ‘직조’다. 기계나 베틀 따위로 천을 짜는 직조(織造)와 곧바로 비춘다는 뜻의 직조(直照), 두 명사를 아우르고 있다. 빛과 그림자라는 씨줄과 날줄로 짜인 이호준 작가의 흑백 사진은 우리의 일상을 곧게 비추고 있다. 이런 이유로 ‘명암으로 직조한 사진, 사진으로 직조한 일상’이라는 부제목을 달았다.

편집자의 센스도 돋보인다. 흰 지면을 전시실 벽면으로 삼아, 지면을 넘길 때마다 전시실의 거닐며 작품을 관람하듯 각각의 사진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이에 따라 목차도 ‘관람 순서’, 각 갈래는 ‘전시실’이라고 표현했다. 전시실은 선을 주제로 점선, 평행선, 겹선, 직각선, 동선, 포물선 등 6개로 이루어져 있다.

배기형 KBS프로듀서는 추천사에서 “속도와 효율이 지배하는 오늘날, 이호준 작가에게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의 집적이 아닌 시간의 결을 읽어 내는 창이다”라고 평가했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제6전시실(포물선)이 눈에 띈다. 우체국장이라는 그의 직업과 관련된 우편함 사진이 여러 장 들어있다. 지금은 이메일에 자리를 빼앗겼지만 우편함은 기대, 바람, 간절함 같은 감정이 모이고 흩어지는 장소였다. 사랑을 속삭이고, 기다리던 합격 소식이 들려오는 공간이었다.

“이제는 고지서나 관공서 알림장, 또는 상업적 홍보물처럼 기다림과는 거리가 먼 우편물이 모이는 상자가 됐지만, 그럼에도 우편함의 낭만은 여전히 골목골목 묻어있다. 직접 손으로 만든 듯한 멋들어진 우편함도 심심찮게 보인다. 아직 사람들의 마음속엔 손 편지에 대한 추억이 남아 있나 보다. 장식품으로 전락했지만 언젠가 정겨운 소식이 날아들 거라는 애틋한 기대를 하나 보다. 오늘도 우편배달부가 반가운 이야기를 가지고 나타날 것만 같다.”(193쪽)

이 책은 이호준 작가가 우체국장으로서 전하는 마지막 우편물이다. 그가 찍은 사진과 글을 읽다보면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전남 목포의 밤 풍경에서는 ‘삶은 저절로 살아지기도 하지만, 애써 살아가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깨우침을 얻고, 인천 북성포구에서 그물을 수선하는 어부의 모습에서는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꾸준함만 한 게 있을까’라는 삶의 지혜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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