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자신만의 확실한 색깔이 있다. ‘트레몰로와 상승’으로 대표되는 전형적인 오프닝이다. 현악기의 활을 앞뒤로 빠르게 움직여 하나의 음을 연주해 잔잔한 소리를 내고(트레몰로), 그 소리를 뚫고 다른 악기들이 점차 크고 웅장하게 몸집을 키운다(상승).
얍 판 츠베덴이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은 12일과 13일 롯데콘서트홀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을 연주했다. 13일 공연을 감상했다. 1884년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초연을 이끌었던 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슈는 “베토벤 이후의 최고의 교향곡이다”라고 7번에 찬사를 보냈다. 객석에 앉아있던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역시 “압도적 악상으로 숨을 쉬기 힘들었다”며 7번에 감탄했다.
1악장(알레그로 모데라토)은 안개를 뚫고 태양이 떠오르듯 현악기 그룹의 불투명한 트레몰로를 관통해 첼로와 호른이 더 높고 밝은 영역을 향해 느리게 상승했다. “이게 바로 브루크너야”라는 시그니처 선언이다. 중간쯤에 들리는 오보에, 플루트, 클라리넷의 솔로 연주 파트가 귀를 사로잡았다. 호른의 혼자 연주에 이어 팀파니가 가세하자 공중에서 흩어지던 모든 음들이 땅에 바짝 깔렸다.
“바그너가 머지않아 세상을 떠날 거라 직감했을 때 아다지오(7번 교향곡의 2악장) 올림c단조의 주제가 떠올랐다.” 브루크너가 동료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내고 한 달 뒤, 실제 바그너는 고인이 됐다. 부르크너는 바그너보다 열한 살 아래였다.
브루크너는 39세 때인 1863년 바그너의 ‘탄호이저’ 린츠 초연을 본 뒤 ‘바그너 키즈’가 됐다. 브루크너에게 바그너는 두 번째 신이었다. 첫 교향곡에서는 바그너의 선율을 빌려 썼고, 트럼펫으로 주제 선율을 시작하는 3번 교향곡은 바그너에게 헌정했다.
그리고 7번 교향곡 2악장에서는 바그너가 발명한 악기인 ‘바그너 튜바’를 4대나 등장시켰다. 이 악기는 호른과 트럼본 소리가 적절히 믹스된 소리를 냈다. 서울시향은 더 폭넓은 사운드를 선사하기 위해 여러 파트에 용병을 합류시켰다. 바그너의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을 어두운 음색으로 표현해 더욱 신성한 느낌을 줬다. 느리게 움직였지만 그만큼 강렬하고 숭고한 절정을 구현한 알레그로 악장은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삽입돼 대중적 인지도를 얻기도 했다.
시골의 소박한 민속춤을 연상시키는 3악장(스케르초)은 이전 악장의 짙은 감정적 밀도와 훌륭한 대비를 이뤘다. 현악기군이 단단-장-장의 3박자 리듬을 흥겹게 탔다. 수탉의 울음소리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트럼펫이 활기를 더했다. 중간부 트리오에서는 느슨한 바이올린이 평화로운 전원의 악상을 펼쳤다.
마지막 4악장은 브루크너의 피날레치고는 짧은 길이에 무겁지 않은 악상이라 이례적이다. 각자 알아서 해석하라고 여유를 준 악장이다. 어떤 지휘자는 템포에 가속을 붙여 긴장을 더블로 만들었지만, 판 츠베덴은 템포를 느리게 잡아 장엄하고 거대한 음향 건축물을 쌓았다. 바그너 튜바가 2악장에 이어 피날레 악장에서도 돋보였다. 1악장에서 중요한 음향 장치로 활약한 트레몰로가 재등장해 수미상관을 이루고 금관 팡파르의 활약이 눈부셨다.
전체적으로 판 츠베덴은 몰아치기 폭주를 잠시 내려놓고 숨을 고르는 연주를 선사했다. 브루크너다운 느낌을 살리려 애쓴 흔적이 두드러졌다. 한꺼번에 확 질주하지 않고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며 브루크너에게 다가갔다.
성용원 평론가는 “포디움에 서면 궁금증과 화제성을 몰고 오는 칼춤을 추는 판 츠베덴은 오늘 브루크너와 모차르트에서 격렬한 사랑 행각 후 몰려오는 한없는 허무함 대신 안도와 온화함을 안겨주는 코스모폴리탄적 세련미를 전해줬다”고 밝혔다.
1부에서는 피아니스트 콘래드 타오(1994년 출생)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을 협연했다. 서울시향 데뷔 무대였다. 작곡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바이올린에서도 활약하고 있는 다재다능 21세기형 음악가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렀고, 검정 재킷 속에 셔츠가 아니라 커다란 꽃이 그려진 라운드티를 입어 눈길을 끌었다. 얍 판 츠베덴과는 댈러스 심포니와 뉴욕 필에서 이미 호흡을 맞춰본 경험이 있었다.
모차르트는 정식으로 번호가 붙은 피아노 협주곡을 27곡 남겼다. 그중 23번은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과 동시에 작곡됐다. 그러므로 오페라의 연극성과 성악적 특성이 투영돼 있다. 오케스트라 악기 편성은 단출했다. 현악기와 함께 플루트 1대, 클라리넷 2대, 바순 2대, 호른 2대였다.
1악장은 밝고 경쾌했다. 타오는 봄날의 햇살을 움켜잡으려는 듯 정성스럽게 터치했다. 오른손은 유연한 인간이 목소리를 모방했는데, 특히 발전부에 등장한 날렵한 멜리스마(성악곡에서 가사의 한 음절에 많은 음표를 장식적으로 달아 표정을 풍부하게 하는 기법)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를 떠올리게 했다.
타오는 2악장에서 오페라 주인공처럼 유려한 아리아를 들려줬다. 마음속에 똬리를 튼 슬픔을 한 스푼 내보내고, 다시 한 슬픔 떼어 밖으로 내보냈다. 밀도 높은 감정을 펼쳐 내는 유니크한 순간이다. 독주 파트로 흘러나온 오보에와 플루트도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피아니스트 찰스 로젠은 “슬픔과 절망, 뜨거운 우울이 살아있는 악상이다”라고 말했다.
3악장에서는 ‘피가로의 결혼’에 가득한 장난기와 유머를 엿볼 수 있었다. 타오는 오페라 주인공처럼 론도 주제를 뚜렷하게 각인시켰다. 주요 주제를 연결하는 에피소드에서는 주역의 역할을 오케스트라에 양보하고 뒤로 비켜나 해설자를 맡은 것도 흥미로웠다.
연주를 마친 타오는 두세 번의 커튼콜 후에 피아노 앞에 다시 앉았다. 객석을 돌아보고는 유창한 한국어 발음으로 “안녕하세요? 여러분”이라고 말한 다음 영어로 앙코르곡에 대해 소개했다. “해롤드 알렌의 ‘Over the Rainbow’(영화 ‘오즈의 마법사’ 주제곡)를 1953년 아트 테이텀이 레코딩한 것을 제가 편곡한 버전으로 연주하겠습니다.” 자유분방한 성격을 닮은 적절한 선곡이었다. 어느 재즈바의 피아니스트처럼 자연스럽게 흥을 불러일으키는 재즈적 요소를 잘 드러냈다.
성용원 평론가는 “타오의 연주는 프리드리히 굴다나 안젤라 휴이트 같은 모차르트의 정석과는 결이 달랐다”라며 “과도한 루바토와 낭만적 정서의 표출보다 다소 차가운 톤으로 건조하고 담백하게 전개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용병으로 투입된 로열콘세르트헤바우의 플루트 수석이었던 자크 준에게 더 눈길을 갔다며 “나무 플루트의 음색은 솔로에서 영롱하게 빛을 발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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