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공연계를 대표하는 소리꾼이자 창작자 이자람이 새로운 창작 판소리 ‘눈, 눈, 눈’을 선보인다. 이자람이 지난 24일 ‘눈, 눈, 눈’을 연습하고 있다. ⓒLG아트센터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1800년대 성탄 축제가 한창인 러시아의 한 농가. 마을 상인회의 멤버로 여러 개의 상점을 소유한 바실리는 고랴츠키노 숲을 사기 위해 썰매를 끌고 길을 나선다. 큰 이윤을 떠올리며 길을 재촉하는 바실리는 일꾼 니키타와 동행한다. 이들을 태운 충직한 종마 제티는 두껍게 쌓인 눈길 위에서 계속 길을 잃어 낭패를 본다. 간신히 도착한 곳은 고랴츠키노 숲이 아닌 이웃 마을 그리슈키노. 그곳에서 잠시 숨을 돌린 뒤 다시 길을 나서지만, 해가 져서 더욱 차가워진 눈밭과 거세진 돌풍은 더욱 음산하기만 하다. 결국 그들은 또다시 알 수 없는 곳에서 길을 잃고 만다.
한국 공연계를 대표하는 소리꾼이자 창작자 이자람이 새로운 창작 판소리 작품으로 4월 LG아트센터서울 U+스테이지 무대(4월 7~13일)에 오른다. 이미 ‘억척가’와 ‘노인과 바다’ 등을 통해 ‘전회 매진·전석 기립’이라는 신화를 써낸 이자람. 그가 5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은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 ‘주인과 하인’을 원작으로 한 ‘눈, 눈, 눈’이다. 광활한 설원, 하룻밤 사이 펼쳐지는 생의 노래다.
● 이자람이 부르면 원작이 된다...인간 내면 탐구한 소설이 창작 판소리로
한국 공연계를 대표하는 소리꾼이자 창작자 이자람이 새로운 창작 판소리 ‘눈, 눈, 눈’을 선보인다. 이자람이 지난 24일 ‘눈, 눈, 눈’을 연습하고 있다. ⓒLG아트센터 제공
고전 문학을 전통 판소리로 변주하며 새로운 길을 개척해 온 이자람이 신작을 위해 선택한 작가는 톨스토이다. 19세기 러시아의 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상인 바실리와 일꾼 니키타가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는 여정을 담은 단편소설 ‘주인과 하인’을 판소리로 재창작했다.
원작에서 바실리는 이윤만을 추구하며 숲을 매입하기 위해 길을 떠나지만 결국 폭풍 속에서 길을 잃고 자신의 내면과 마주한다. 이자람은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이 원작에서 “우리는 내 눈앞의 사람들에게, 어떠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고민과 질문을 발견했고, 자신만의 재기 발랄한 상상력을 더해 쉽고 명쾌하게 풀어낸다.
이번 작품은 전작 ‘억척가’ ‘노인과 바다’와 마찬가지로 그가 직접 대본을 쓰고 작창하는 방식으로 창작됐다. 대본을 쓰고, 작창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기존 작업들보다 한층 밀도 있는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처음에는 바실리가 싫었습니다. 욕심이 많은 위선자로 보였죠. 그래서 그가 마땅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며 점점 바실리와 나 자신이 닮아 있음을 깨닫게 됐습니다.”
● 빈 무대 가득 채울 부채와 북...그리고 이자람의 목소리
소리꾼 이자람이 2011년에 판소리 '억척가'를 LG아트센터에서 초연하고 있다. ⓒLG아트센터 제공
이자람은 이번 작품에서도 ‘노인과 바다’를 시작으로 선보였던 전통 판소리 양식인 ‘바탕소리’를 차용해 북과 재담, 그리고 소리만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무대 위에는 부채를 든 소리꾼 이자람과 소리북을 치는 고수 한 명만이 존재하지만,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엄청난 에너지와 무대 장악력으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전통적인 ‘빈 무대’의 특징을 살리면서도 빛과 색을 이용해 서사를 풍성하게 표현하기 위해 무대 디자이너 여신동이 공연의 전반적인 미장센을 담당하는 시노그래퍼로 참여한다. 연출은 ‘이방인의 노래’ ‘노인과 바다’에서 드라마투르기와 연출을 맡았던 양손프로젝트의 박지혜 연출가가 맡았다.
이자람은 전통 판소리의 형식과 음악성을 깊이 연구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담아낸 창작 판소리를 꾸준히 만들어 왔다. “창작을 하지만, 결국 전통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그는 이번 작품에서도 판소리의 본질을 지키면서 자신만의 색깔을 더한 ‘이자람표 무대’를 선보인다.
“판소리는 수행자의 삶을 요구할 정도로 높은 경지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예술인 반면, 그 이야기의 내용은 우리 삶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마치 신성한 예술과 대중적 서사가 충돌하는 느낌이다. 그 괴리에서 오는 긴장감이 판소리의 가장 큰 매력이다.”
● ‘억척가’ ‘노인과 바다’ 등 통해 이자람표 무대 꾸준히 선보여
소리꾼 이자람이 2022년 LG아트센터서울 개관 페스티벌에서 ‘노인과 바다’를 공연하고 있다. ⓒLG아트센터 제공
국가무형유산 판소리 이수자이자 판소리, 뮤지컬, 연극, 밴드 등 전방위로 활약하고 있는 유일무이한 아티스트인 이자람은 국내외 문학작품을 판소리로 재창작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과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판소리로 재창작한 ‘사천가’ ‘억척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단편 ‘대통령 각하, 즐거운 여행을!’을 바탕으로 한 ‘이방인의 노래’, 그리고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원작을 판소리 무대로 옮긴 ‘노인과 바다’ 작품으로 국내에서 매진 행렬을 기록하며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한 프랑스, 루마니아, 폴란드, 영국, 브라질, 대만, 호주 등 다양한 문화권에서 초청되면서, 해외에서 각광받는 예술인으로 성장해 왔다.
이자람은 2011년부터 2013년까지 LG아트센터에서 3년 연속 ‘억척가’를 공연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2022년 LG아트센터 서울 개관 페스티벌 ‘노인과 바다’를 통해 한층 더 깊은 목소리로 감동을 선사했다. 또한 뮤지컬 서편제의 ‘송화’ 역으로, 인디밴드 ‘아마도 이자람 밴드’의 리더 겸 보컬로, 그리고 수필집 ‘오늘도 자람’을 발간한 작가로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해왔다. 그가 5년 만에 발표하는 신작 ‘눈, 눈, 눈’은 시대를 성찰하는 작가이자 탁월한 소리꾼, 다재다능한 배우이기도 한 이자람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특별한 무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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