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서혜경이 지난 29일 푸르지오 아트홀에서 열린 60주년 기념 리사이틀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라음아트&컴퍼니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피아노는 경험이 많을수록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입니다. 산전수전 경험은 쇠붙이를 금으로 만듭니다. 가끔 쇠에 붙은 금박(金箔)을 금으로 착각합니다. 성실한 연습이 없으면 결국 쇠만 드러납니다. 지금 연주에 만족하면 그저 금박일 뿐입니다.”

5세에 피아노를 처음 시작한 ‘1세대 피아니스트’ 서혜경이 연주 60주년을 기념해 5월 세 차례 릴레이 콘서트를 연다. 지난 29일 서울 중구 푸르지오 아트홀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그는 ‘쇠붙이 금박론’을 펴면서 자신의 음악 인생을 돌아봤다.

“예술은 기술이 아니고 인생입니다. 인생은 세월의 깊이와 관련이 있어요. 피아노를 뛰어나게 연주한다고 해서 그 안에 아직 살아보지도 않은 인생이 담길 수는 없습니다. 60년이 녹아있는 연주는 젊은 혈기의 피아니즘(피아노 연주 기법)과 다릅니다. 20대 연주하던 곡과 40년이 지난 지금의 연주는 같을 수 없죠.”

서혜경은 1980년 이탈리아 부조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로 최고상(1위없는 2위)을 차지하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노골적인 서양 텃세를 뛰어넘고 거든 성과다. 여성 피아니스트 최초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전곡과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를 포함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녹음해 낭만주의 러시아 작곡가의 탁월한 해석자로 꼽힌다.

꽃길만 걷는 삶은 없다. 서혜경도 울퉁불퉁 자갈길을 걸었다. 돌싱으로 홀로 두 자녀를 키웠던 일부터 유방암 투병 끝에 회복해서 다시 무대에 올랐던 일 등 험난 라이프를 고백했다. 살짝 눈물을 보이기도 했고, 뜨거운 것이 올라와 울컥하기도 했다.

“2006년 오른쪽에서 암이 두 덩어리 발견됐는데 겁이 났어요. 죽음보다는 오른손을 쓰지 못해 영영 연주를 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더 무서웠습니다. 방사선 치료 33번, 항암치료 8번을 거치면서 ‘피아노 근육’이 망가졌지만, 은행에 차곡차곡 저금하듯 그동안 ‘연습 저축’한 게 있는데 못할게 뭐야라는 배짱이 생겼죠.”

피아니스트 서혜경이 지난 29일 푸르지오 아트홀에서 열린 60주년 기념 리사이틀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라음아트&컴퍼니 제공


암투병 후 2008년 46세에 예술의전당에서 했던 공연을 가장 감동적인 무대로 꼽았다. KBS교향악단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3번을 잇따라 연주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피아노 없는 삶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며 “다시 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인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다른 유명한 세계적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공연보다 더 벅찼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자신만의 뚜렷한 피아노 기준도 밝혔다. “요즘 잘 나가는 유자왕과 랑랑의 연주는 아크로바틱, 살짝 서커스 같기도 하다”며 “저는 노래하는 성악가와 같은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다. 사람의 영혼과 감정을 건드리는 로맨틱 스타일 피아니스트가 목표였다”고 말했다.

서혜경은 이번에 모두 세 차례 리사이틀을 연다. 서혜경표 로맨틱 피아니즘을 직접 감상할 수 있는 기회다, 5월 7일과 27일은 용산구 일신홀에서, 5월 21일은 서초구 가와이홀(옛 코스모스아트홀)에서 연주한다.

피아니스트 서혜경이 지난 29일 푸르지오 아트홀에서 열린 60주년 기념 리사이틀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왼쪽은 진행을 맡은 김종섭 리음아트&컴퍼니 대표. ⓒ라음아트&컴퍼니 제공


날짜별로 프로그램이 다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주려는 욕심 때문이다. 7일은 류재준 ‘녹턴Ⅱ’,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한다. 21일은 류재준 ‘녹턴Ⅱ’,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주제에 위한 랩소디’, 생상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들려준다. 27일은 류재준 ‘녹턴Ⅱ’, 라벨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생상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터치한다.

눈길을 끄는 것은 오케스트라 반주가 아니라 투 피아노로 연주한다는 점. 서혜경이 메인을 맡고 두 후배 피아니스트(7일·27일 서형민, 21일 강성애)가 오케스트라 파트를 맡아 호흡을 맞춘다. 요즘말로 티키타카 케미를 맛볼 수 있는 귀한 연주회다.

서혜경은 특히 ‘황제 협주곡’에 대해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50년을 연주한 곡이라 오케스트라 파트까지 모두 외우고 있다”라며 “6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무척 좋아했던 곡이다. 아버지가 피아노를 시켜준 덕분에 지금까지 연주자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며 사부곡(思父曲)으로 연주하겠다고 설명했다.

류재준의 ‘녹턴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류 작곡가의 어머니도 최근에 돌아가셨다”면서 “우리 음악가들을 키워주신 하늘에 계신 모든 부모님들께 바치는 노래라는 생각이 들어 프로그램에 넣었다”고 말했다.

녹턴Ⅱ는 류재준의 ‘피아노 모음곡 2번’에 들어있는 곡이다. 모음곡 2번은 ‘인벤션-토카타-프렐류드Ⅰ,Ⅱ-토카타Ⅱ-녹턴-인벤션Ⅱ-녹턴Ⅱ-에튀드-캐논-녹턴Ⅲ’ 등 총 11곡으로 구성됐다.

서혜경은 후배들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콩쿠르가 영광의 정점이 아니라는 점을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콩쿠르 수상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라며 “상업적으로 몸값을 거래하는 거간꾼들에게 속지 말고 ‘나는 아직 최고가 아니며, 깊은 피아니즘을 향해 순례하는 초보자’임을 직시했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강조했다.

/eunki@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