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가곡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정선화 회장은 오는 5월 29일 세종문회회관 체임버홀에서 ‘제58회 정기연주회’를 연다. ⓒ한국가곡연구회 제공
[클래식비즈 김일환 기자] “한국 가곡은 우리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하는 장르입니다. 가곡에는 깊이가 있어요. 그 힘든 시대를 반영한 곡들, 예를 들면 ‘보리밭’ ‘가고파’ 등에서 느끼는 깊이는 정말 특별합니다. 팝음악과 비슷한 요즘 가곡은 살짝 가벼운 면도 있지만, 여전히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특별한 깊이를 되찾아보자는 것이 ‘어게인(Again)’의 취지입니다.”
한국가곡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정선화 회장은 오는 5월 29일(목) 오후 7시30분 세종문회회관 체임버홀에서 ‘제58회 정기연주회’를 연다. 정상의 성악가 12명이 무대에 선다. 피아니스트 정영하와 김건와가 번갈아 가며 반주를 맡는다. 이번 공연의 주제는 ‘Again’. 청량한 하늘색 포스터에 흰 글씨로 쓴 ‘Again’이 눈에 확 들어온다.
정 회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매년 연주회의 테마를 새롭게 정한다. 코로나 직후에는 ‘회복’이라는 주제를 골랐다”라며 “올해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올라온 주제는 ‘어게인’, 즉 ‘다시’였다. 점점 잊히고 있는 한국 가곡을 다시 살려보자는 목적이 1순위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살짝 개인적 사연도 들어 있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연구회를 운영하면서 사람에 대한 실망을 많이 겪었다”며 “그런 아픔을 딛고 올해는 연구회가 더욱 분발하는 성장 모멘텀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에 ‘어게인’으로 결정한 이유도 있다”고 말했다.
결국 ‘어게인’이라는 타이틀은 ‘단순한 다시’가 아니라, ‘복합적인 다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정 회장은 “세월의 바람을 맞으면서 초심에서 퇴색했음을 느끼는 순간에도, 이렇게 계속 빈둥빈둥 살면 안되겠다고 자각했을 때에도,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관계를 정리해 이젠 점프해야 겠다고 결심했을 때에도 ‘다시’는 강력한 만병통치약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가곡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정선화 회장은 오는 5월 29일 세종문회회관 체임버홀에서 ‘제58회 정기연주회’를 연다. ⓒ한국가곡연구회 제공
한국가곡연구회는 ‘뼈대 있는’ 단체다. 1993년 5월에 론칭했다. 올해로 32년째다. 2017년 가을에 열린 제50회 정기연주를 마친 뒤, 정선화 소프라노가 회장 배턴을 이어 받았다. 회장으로서 가장 신경 쓰는 것 중 하나는 역시 프로그램 구성. 전체의 줄기를 확실히 잡아줘야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정 회장은 그런 가운데 최근 의미 있는 곡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이안삼 작곡가가 유작으로 남긴 ‘아내의 일생’의 노랫말을 쓴 시인 이상윤 장로의 ‘민들레 추억’이다.
“80대 중반의 장로님은 찬송시를 참 많이 쓰셨습니다. 그분의 아내가 돌아가신 후 아내를 그리워하면 쓴 시입니다. 이분의 시 ’민들레 추억‘에 김성희 작곡가님이 선율을 붙여 아름다운 노래가 탄생했습니다. 이번에 초연합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인 바리톤 김동섭 선생님이 부를 계획입니다.”
정선화에게 ‘어게인’은 성악 능력과 열정에도 적용된다. 보통 50세를 넘어서면 노래의 힘은 서서히 퇴화한다. 하지만 정선화는 역주행했다. 성대의 탄력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노래의 폭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넓어졌다.
“사실 성악가에게 하루하루는 늘 ‘어게인’의 연속입니다. 어제의 파워와 테크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운동이나 연습을 게을리 할 수 없어요. 팔순이 넘은 성악가들이 활동하는 것이 얼마나 피나는 노력 끝에 얻어진 결과인지 잘 몰랐거든요. 나이가 들어서야 그분들의 땀방울을 알게 됐습니다. 늙어서 열정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열정이 없어서 늙는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유학 당시 스승이 70대였는데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를 호흡 한번 딸리지 않고 능히 불러냈던 것을 기억하는 정선화. 정선화도 스승처럼 노래하고 싶다. 그러나 그 곁에 아무도 없으면 무슨 재미로 노래를 부를까? 동고동락할 수 있는 한국가곡연구회 회원들이 함께 하기에 더욱 살맛이 난다며 웃었다.
정 회장은 얼마전 김효근의 가곡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부른 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줬고, 정 회장 또한 그 곡으로 스스로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밝혔다. 오래 전에는 ‘보리밭’ ‘가고파’ 등의 명곡들이 그랬고, 그다음에는 ‘그대 어디쯤 오고 있을까’ ‘첫사랑’ 등이 어느 순간 정선화의 삶과 인생에 접목돼 절친처럼 말을 걸어왔다.
“교회에서 젊은 암환자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분은 오늘 하루가 너무 소중하고 자기의 소원은 할아버지가 되는 거라고 말했어요. 쓸데없는 걱정으로 힘들어했던 ‘오늘 하루’가 누군가에겐 ‘절실한 하루’였던 겁니다. 이 하루는 나에게 선물 같은 하루인데 왜 그렇게 힘들게 보낼까 반성했죠. 그날 이후 두려움보다 소망을 바라보고 다시 힘을 얻는 계기가 됐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언어를 동원해도 언어만으로 전달되지 않는 게 있다. 그때 언어를 초월한 가곡 한 곡이 마음을 더 따듯하게 해준다. 우리 가곡의 마법이다. ‘너무 힘들어’라는 말보다, 그 고통의 파동을 노래로 표현하면 그 울림은 그야말로 힐링이 된다. 이처럼 가곡 한 곡은 꺼져가는 불꽃을 소생시키는 기름이 된다.
“감동 받았다는 말을 들으면 제가 도리어 감동을 받습니다. 아름다운 소리를 유지하기 위해 힘들게 연습하고는 하지만 이런 반응이 올 때는 큰 보람을 느낍니다. 생각해보면 노래도 제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음색 덕분이기에 또 감사합니다.”
정상의 성악가 12명이 출연하는 한국가곡연구회 제58회 정기연주회 ‘어게인’이 오는 5월 29일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열린다. ⓒ한구가곡연구회 제공
이번 정기연주회에는 어떤 노래들이 객석을 사로잡을까? 정 회장은 레퍼토리 선곡 자체보다는 어떤 곡을 부르더라도 진정성 있게 부를 때 더 큰 감동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정 회장뿐만 아니라 이번 연주회에 참여하는 모든 성악가들이 진정성 있게 무대에 서는 까닭에 무한대 감동은 이미 예정돼 있다.
2부에서 옛 가곡과 신작 가곡을 적절하게 믹스했다. ‘그리운 금강산’(소프라노 한동희), ‘알고 있을까’(바리톤 박경준), ‘아리랑 연가’(소프라노 송정아), ‘어느 날의 사랑’(테너 정찬혁), ‘첫사랑’(소프라노 박선영), ‘누군들 그립지 않으랴’(바리톤 이안), ‘님마중’(테너 임홍재), ‘진달래’(소프라노 류문규), ‘어느날 내게 사랑이’(테너 이정원), ‘보리밭’(소프라노 이윤숙), ‘민들레 추억’(바리톤 김동섭), ‘가고파’(소프라노 정선화) 등을 준비했다.
1부는 러시아 가곡으로 구성했다. 러시아 유학 1세대인 정 회장은 지난 35년간 수교를 맺은 러시아와의 음악적 우정을 ‘다시’ 회복하자는 차원에서 로망스를 레퍼토리로 꾸몄다. 그는 “러시아와 정치적으로 안좋은 관계지만 다행히 최근 들어 다시 관계를 회복하고 있는 분위기여서 1부는 러시아곡으로 준비했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작곡가인 림스키-코르사코프,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을 선곡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 작품으로는 소프라노 한동희가 ‘위에서 불어오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네’를, 테너 정찬혁이 ‘옥타브’를, 테너 이정원이 ‘그루지야 언덕에서‘ 를 노래한다.
차이콥스키 작품은 바리톤 이안이 ‘돈주앙의 세레나데’. 소프라노 이윤숙이 ‘한마디 말에 담고 싶소’, 바리톤 김동섭이 ‘다시 또 외로이’, 소프라노 정선화가 ‘나무 그늘에서 말해주오’, 바리톤 박경준이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를 부른다.
끝으로 라흐마니노프 작품으로 소프라노 송정아가 ‘얼마나 아름다운 곡인가’, 소프라노 박선영이 ‘노래하지 마요, 아름다운 이여’, 소프라노 류문규가 ‘꿈’, 테너 임홍재가 ‘봄의 물결’ 등을 선사한다.
주한 러시아 대사 게오르기 지노비예프는 “이번 콘서트는 한·러 양국의 아름다운 로망스 음악을 한국의 유명 예술가들이 함께 연주하는 뜻 깊은 자리다”라며 “단순한 문화 공연을 넘어 한·러 수교 35주년을 기념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축하의 뜻을 밝혔다. 한·러교류협회 방교영 회장 또한 “한·러 수교 35주년 연주회를 계기로 모든 것이 ‘어게인’ 활성화 되리라 믿는다”고 축하글을 보내왔다.
정 회장은 우리 가곡 사랑이 예전에 비해 조금 줄어든 듯해 안타깝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우리 가곡이 국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앞장서겠다고 강조했다. 그 솔루션은 역시 진정성에 있다고 말했다. 그것이 관객에 대한 배려며 참다운 울림을 준다고 덧붙였다.
“한국가곡연구회 이재승 이사장님을 비롯한 이사님들께도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리더십에도 늘 뜻을 함께 해주는 임원 및 연주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를 전합니다. 한국가곡의 아름다움과 저희 연구회의 우정과 사랑을 청중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꼭 오시기 바랍니다.”
/kim67@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