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1. 중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집에 75장의 LP로 된 ‘세계 명곡 대전집’이 있었다. 음질은 열악했지만 제법 잘 쓴 해설서가 붙어있었다. 중학 3년 내내 듣고 또 들었다. 심지어 학교에서도 ‘빨리 집에 가서 다음 음반을 들어야지’라고 생각하며 쏜살같이 컴백홈하기도 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그렇게 독학했다. 나도 모르게 귀가 뚫렸다. 지금도 콘서트에 가서 한 곡의 연주가 끝나고 나면, 귓전에는 당시 LP에 수록됐던 그 다음 곡의 시작 부분이 환청처럼 들려올 때가 있다.
#2.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용돈을 모아 직접 음반을 구입했다. 나름대로 음반 컬렉션에 입문했다. 집에 있는 ‘세계 명곡 대전집’에 베토벤 교향곡은 부제가 붙은 3(영웅), 5(운명), 6(전원), 9(합창)번만 있었다. 나머지 1, 2, 4, 7, 8번이 궁금했다. 그래서 전집에 없는 음반을 하나씩 사서 들었다. 그렇게 라이브러리가 만들어지자 한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갔다. 전집에 있는 곡인데도 다른 연주의 세계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집에 있는 베토벤 ‘열정’ 피아노 소나타는 빌헬름 박하우스의 연주였는데, 빌헬름 켐프의 것이 궁금해 음반을 득템했다. 그동안 듣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신세계였다. 그렇게 해서 음반 ‘편력(編曆)’이라는 것이 시작됐고, 이와 더불어 ‘취향(趣向)’이라는 것이 형성됐고, 자연스럽게 ‘안목(眼目)’이라는 것이 생겼다.
본업은 정신과 의사지만 평생을 클래식 애호가로 살아온 박종호는 최근 펴낸 ‘클래식을 처음 듣는 당신에게’(풍월당·244쪽·1만6000원)에서 음악과의 찌릿했던 첫 만남과 사랑의 과정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클래식 감상은 세상에 있는 가장 찬란한 즐거움이자, 최고의 지적 도락의 하나”라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은 클래식의 처음으로 되돌아가 클래식을 제대로 알고 듣는 법을 이야기한다. 제대로 들으려면 ‘왜 들어야 하는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가 중요하다. 그래서 클래식의 정의와 역사, 클래식의 가치와 정신을 되짚어 보면서 클래식 감상이라는 분야가 발전해온 발자취와 더불어 우리 사회 잘못 뿌리내린 클래식 문화도 반성한다. 음악 애호가가 되어야 하는데 ‘장비빨’에만 관심을 두는 오디오 애호가를 향해 쓴소리를 한다.
중학교 시절부터 스스로 클래식 음악을 찾아 듣기 시작한 저자는 오랜 세월 레코드 컬렉터(Record Collector)와 콘서트 고어(Concert Goer)를 넘나들며 클래식 감상의 정도를 탐색해왔다. 저자의 산 경험들이 곳곳에 묻어나는 이 책은 포복절도할 유머로 가득하다. 동시에 클래식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조장하는 겉멋 든 클래식 문화를 촌절살인의 언어로 꼬집는다.
클래식의 기본부터 현장의 목소리까지, 클래식 음악회에서 지켜야 할 예절부터 음악 감상의 방법까지, 클래식의 참 의미를 알려주고 올바른 길을 비춰준다. 이 책과 함께 클래식의 세계로 들어선다면, 클래식은 더 이상 어렵고 지루한 옛 음악이 아니라 나를 성장시켜 주는 세상 즐거운 공부가 될 것이다.
저자는 클래식 음악은 단순히 옛날의 대중음악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사람들의 유행과 입맛에 맞춘 음악이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는 가치와 의미를 전하는 음악의 고전이라고 강조한다. 클래식에는 음악 아래 모두가 한 인류가 되어야 한다는, 그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는 위대한 정신이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소외된 사람들을 하나로 껴안으려 했던 베토벤의 정신을 모르고는 교향곡 9번 ‘합창’을 모두 이해했다 할 수 없고, 이탈리아 독립의 열망을 음악에 담아내려 했던 베르디의 정신을 모르고는 그의 오페라를 오롯이 느낄 수 없다. 이러한 정신에 대한 탐구나 의식 없이 멜로디의 장중함과 아름다움만 느낀다고 해서 클래식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클래식 음악 감상은 인간 정신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최고의 인문학 공부다. 클래식 음악 감상은 사람에 대한 즐거운 공부다. 클래식의 본질과 의미에도 맞지 않는 ‘클래식의 대중화’를 추구할 게 아니라 오히려 ‘대중의 클래식화’를 이루어야 한다.
대중이 클래식을 공부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남의 판단과 잣대에서 벗어나 나만의 취향과 선택 기준을 세워나갈 때 비로소 클래식의 가치를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조금 늦고 힘들더라도 이것이 클래식 감상의 ‘정도(正道)’다.
이 책에 담긴 저자의 경험담은 한편의 소설처럼 술술술 읽힌다. 1975년 중학교 3학년 때 부산에서 처음 들은 ‘광복 30주년 기념음악회’의 추억은 지금도 또렷이 생각난다고 고백한다. 1997년 라 스칼라 극장에서 도니제티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관람했던 스토리도 눈길을 끈다. 원래 보려고 했던 프라마돈나의 공연이 취소되면서, 아예 4일 동안 네 명의 소프라노와 네 명의 테너가 같은 배역을 각기 다르게 노래하는 것을 모두 감상한 이야기는 감동이다. 그러면서 주지 데비누와 주세페 사바티니의 공연은 정말 최고였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학교 교육 12년(초등 6년+중등 3년+고등 3년) 동안 입시에 밀려 음악 한 곡 제대로 감상할 여유도 없었고, 사회에 나와서는 돈과 밥만 우선시하는 경제 논리에 밀려 음악 감상을 위한 기본 소양을 갖출 기회를 갖지 못했다. 오로지 사는 데 ‘쓸모’만을 따지며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쉼 없이 달려왔다. 그러나 이제는 ‘쓸모’의 강박을 내려놓고 오롯이 삶의 기쁨과 행복을 누려야 한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 클래식의 이상으로 시야를 넓히면, 우리는 남의 기준에 나를 맞추느라 애쓰지 않고 나만의 속도에 맞춰 걸을 수 있다. 뛰고 싶을 때 뛰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다. 클래식을 듣는다는 것은 인생이라는 긴 레이스를 내가 원하는 속도로 순조롭게 완주할 수 있게 해주는 강력한 무기가 되어주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아가 성장하는 기쁨을, 대단한 성취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을 한다는 것은 연주할 줄 아는 것이 아니라, 들을 줄 아는 것을 의미한다.”--클라우디오 아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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