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알렉산더 셸리가 지휘하는 캐나다 국립 아트센터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춰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처음엔 그리움이었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한음 한음 정성을 다해 건반을 누르자 잊고 있던 얼굴이 떠올랐다. 모리스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G장조(M.83)’ 2악장.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 가장 심쿵한 작품이다. 서정성의 끝판왕이다.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 40년 전으로 관객 마음을 훌쩍 이동시키는 매직 클래식이다.
여름 해질 무렵, 언덕 위에서 바라본 외갓집 굴뚝엔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고 그 속엔 밥 짓는 냄새가 가득했다. 지금도 매운 연기가 눈으로 들어오거나 밥물의 향긋함을 코로 느낄 때면 외할머니 모습이 오버랩된다. 손열음의 손가락을 타고 옛날 옛적이 슬금슬금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그 대상이 누구든, 관객 모두는 저마다의 기억속 그 사람을 떠올렸으리라.
손열음은 꼿꼿하게 정자세로 터치했다. 3분 남짓 조용하게 피아노 소리만 들렸다. 숨이 멎을 듯한 도입부다.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관객이 되어 고막정화의 순간을 같이 즐겼다. 뒤를 이어 살짝 플루트와 오보에가 가세했다. ‘아임 미싱 유(I’m missing you)’는 더 크게 확대됐다. 코흘리개 동네 친구들, 까까머리 고등학교 동창들, 야근하던 동료들 등 이젠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얼굴들까지 스쳐갔다.
향수를 불러오는 피아노 테마는 어느새 서글픔으로 바뀐다. 오케스트라 사이로 단순하지만 진심 가득한 잉글리시 호른 선율이 흘러나온다.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고, 만지고 싶어도 만지지 못하는 세상 모든 존재들에 대한 사무침이다. 러닝타임 9분 30초 정도의 2악장. 그리움과 서글픔 외에도 아련함, 애달픔, 쓰라림 등이 복합적으로 들어있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알렉산더 셸리가 지휘하는 캐나다 국립 아트센터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춰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손열음이 5월 3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캐나다 국립 아트센터 오케스트라(Canada’s National Arts Centre Orchestra·NAC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를 기반으로 한 NAC오케스트라는 1969년 창단했다. 이번이 첫 내한공연. 포디움에는 알렉산더 셸리가 섰다. 핀커스 주커만의 후임으로 2015년부터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손열음은 평소 재즈 연주도 자주한다. 그런 취향에 안성맞춤인 곡이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이다. 1929년에 작곡된 이 작품은 1927년 11월부터 1928년 4월까지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로 북미 순회공연을 했을 당시에 목격한 ‘풍경들’이 녹아있다. 그 중 하나가 재즈의 예술성에 대한 찬사다.
곡의 시작을 알리는 그 유명한 채찍 소리(폭죽소리 같기도 함)로 1악장은 출발한다. 서커스의 시작을 닮았다. 피콜로가 1번 타자로 등장한 뒤, 채 1분도 걸리지 않아 유쾌한 광채, 우울한 서정, 활기찬 기교, 아련한 색채 등이 재즈의 몸을 하고 팔색조 같은 캐릭터를 현란하게 나열한다. 솔리스트인 피아노의 기교와 더불어 관악기의 약진도 돋보인다. 독주자 못지않은 스킬을 뽐낸다. 복잡한 피아노 카덴차는 물방울 튕기듯 격정적이다.
그리움과 서글픔이 아로새겨진 2악장을 지나면 멈추지 않고 곧바로 3악장으로 이어진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배틀이다. 드럼 소리를 배경으로 금관악기가 짧게 시작을 알리면 피아노는 엄청나게 빠른 프레스토 템포로 폭발적 기교를 발산한다. 1악장보다 더 노골적으로 재즈의 성격이 드러난다. 날카로운 클라리넷 선율과 미끄러지는 트롬본 소리가 특히 귀에 꽂힌다. 그 와중에 여전히 빠르고 현란한 피아노는 타악기의 스텝과 정교하게 맞춰가며 피날레를 향해 치달았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알렉산더 셸리가 지휘하는 캐나다 국립 아트센터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춰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손열음은 피아노에도 공을 들였다. 그가 연주한 피아노는 이탈리아 ‘파지올리 F278’이다. 2021년 쇼팽 콩쿠르에서 1, 3, 5위 입상자가 연주했던 모델이다. 지난해 10월 열린 리사이틀 ‘더 피아니스츠(The Pianists)’에서는 길이가 무려 3m8cm인 ‘파지올리 F308’을 연주했다.
손열음은 앙코르 2곡도 모두 라벨로 골랐다. ‘쿠프랭의 무덤’ 중 제5곡 미뉴에트와 ‘소나티네’ 중 제2곡 미뉴에트의 악장을 들려줬다. 지휘자도 오케스트라 끝자리에 앉아 감상했다.
음악평론가 류태형(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은 “2016년 로열 필하모닉을 이끌고 왔던 알렉산더 셸리의 지휘를 오랜만에 봤다. 피아니스트 하워드 셸리의 아들로도 알려진 그는 부드럽고 민첩하면서도 역동적인 지휘를 선보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연의 백미는 손열음이 협연한 라벨 피아노 협주곡이었다. 탄생 150주년을 맞아 봤던 라벨(1875~1937) 연주들 가운데 단연 최고였다. 손열음의 즉흥적이면서도 재즈 친화적인 성향은 라벨과 잘 어우러졌다. 캐나다 국립 아트센터 오케스트라는 프랑스 오케스트라처럼 목관에서 좋은 향이 피어올랐고, 손열음의 파지올리 피아노는 음반에서 잘 들리지 않았던 곡의 비경을 명확하게 펼쳤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2악장에서는 아름다움과 함께 서글픔이 밀려와 눈물샘을 자극했다. 3악장의 아크로바틱하면서도 위트 있는 해석도 일품이었다”고 평했다.
알렉산더 셸리가 지휘하는 캐나다 국립 아트센터 오케스트라가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을 연주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알렉산더 셸리와 캐나다 국립 아트센터 오케스트라는 1부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돈 후안(Op.20)’을 연주했다. 공연 시작 5분 전쯤에 단원들이 하나둘씩 들어온 것이 아니라, 훨씬 전에 이미 모두 들어와 자리에 앉아 있는 점이 눈에 띄었다. 또한 안전바 없는 포디움도 이채로웠다.
돈 후안은 난봉꾼, 바람둥이, 호색한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 중세 스페인의 전설 속 인물이다.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도 돈 후안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하지만 19세기 오스트리아 시인 니콜라우스 레나우의 운문극 ‘돈 후안’은 다른 관점으로 이 사내를 바라봤다.
레나우는 돈 후안을 완벽한 여성을 찾고 싶은 이상주의적 열망을 품은 사람으로 그렸다. 사랑을 추구하는 방식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은 레나우의 관점은 젊은 슈트라우스에게 영감을 줬고. 이 영감은 1888년 교향시 ‘돈 후안’으로 탄생했다.
정열적인 D장조로 시작해 음울한 e단조로 마무리되는 조성은 낙천적으로 출발하지만 비극으로 끝나는 주인공의 운명과 궤를 같이한다. 격렬하게 위로 치솟는 웅장한 오프닝 선율은 “젊음의 맥박이 뛰는 한, 새로운 정복지로 나아가자”는 레나우의 외침을 음악적으로 표현했다.
돈 후안이 등장하고, 뒤이어 그가 만나는 여성들의 테마가 이어진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돈 후안을 따라가는 여성, 열렬한 구애에도 그를 거부하는 여성, 그의 유혹에 속아 몸을 주는 여성, 그러다가 배신당해 죽어버리는 여성 등이 나온다. 이 여성들을 만나며 돈 후안이 느끼는 모든 감정이 파노라마처럼 다채롭게 펼쳐진다.
그러나 그토록 활기차게 타올랐던 주인공의 열정과 인생은 결국 안타깝고 비루한 여운만 남긴 채 허무하게 사라진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음의 파도가 출렁거릴 때마다 관객도 그 음의 파도에 몸을 맡겼다.
알렉산더 셸리가 지휘하는 캐나다 국립 아트센터 오케스트라가 캐나다 작곡가 켈리마리 머피의 ‘어두운 밤, 빛나는 별, 광활한 우주’를 한국 초연했다. 이번 내한공연에 동행한 머피가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캐나다 국립 아트센터 오케스트라는 2023년 캐나다 작곡가 4명에게 신작을 위촉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원작에 담긴 정신, 서사, 사운드스케이프, 혹은 분위기에 대응하는 작품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그들 중 한 명이었던 켈리마리 머피는 ‘돈 후안’에 대응해 ‘어두운 밤, 빛나는 별, 광활한 우주’를 완성했다. 알렉산더 셸리와 캐나다 국립 아트센터 오케스트라는 이 작품을 한국 초연했다. 켈리마리 머피의 말을 들어보자.
“이 상징적인 교향시에 어떻게 응답할지 고민하다가 슈트라우스가 이 작품을 작곡하던 시기에 벌어진 사건들을 주목하게 됐다. 그 중 1889년 빈센트 반 고흐가 ‘별이 빛나는 밤에’를 완성한 일과 1888년 윌리어미나 플레밍이 말머리성운을 발견한 일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윌리어미나 플레밍은 본래 하버드 천문대장의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였다. 프레밍의 총명함을 알게 된 천문대장은 천체사진의 스펙트럼 분석일을 맡겼다. 플레밍은 9년 동안 1만개 이상의 별들을 분류했고, 플레밍의 연구를 기반으로 하버드 천문대는 중요한 논문들을 발표할 수 있었다.
플레밍을 신뢰하게 된 하버드 천문대는 그에게 인사권을 넘겼고, 재능 있는 열두 명의 여성을 추가로 고용했다. ‘하버드의 컴퓨터’로 불린 이 여성들과 함께 플레밍은 죽기 직전까지 30년 동안 천문대에서 일하며 10개의 신성, 52개의 성운, 310개의 변광성을 발견했다. 말머리성운은 백색왜성과 함께 그의 최고 업적으로 손꼽힌다.
슈트라우스가 ‘돈 후안’을 통해 이상적인 여성상에 새롭게 접근했다면, 머피는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했던 플레밍에게서 이상적인 여성상을 발견했다. 머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두운 밤, 빛나는 별, 광활한 우주’는 ‘질문과 탐색, 호기심’ ‘인내와 결단력’ ‘별이 빛나는 밤하늘의 아름다움’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음악이 시작되면 하프의 테마가 질문을 던지고 목관악기 솔로가 이에 응답한다. 질문과 탐색이 갈수록 심화되면서 인내와 결단이라는 태마로 이어진다. 이 테마는 빠르고 끈질기며, 때로는 격렬하다. 트럼펫과 오보에 독주로 잠시 의구심이 스며들지만, 점차 자신감과 힘을 되찾고 금관악기 합주와 함께 집중력이 차분하게 모습들 드러낸다. 다시 한번 인내의 주제가 등장하면서 결국 성취와 발견의 순간에 이른다. 작품 전체에 걸쳐 별들은 끊임없이 반짝이며 우리를 부르고, 인도하고, 영감을 준다.”
연주를 마치자 지휘자는 객석에 앉아있던 머피를 무대 위로 불러 관객에게 인사시켰다. 자국 작곡가의 신작을 해외 투어 프로그램에 넣을 뿐만 아니라 작곡가까지 동행한다는 점에서 부러웠다.
알렉산더 셸리가 지휘하는 캐나다 국립 아트센터 오케스트라가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을 연주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알렉산더 셸리가 지휘하는 캐나다 국립 아트센터 오케스트라가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을 연주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2부에서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 5번 c단조(Op.67)’를 선사했다. 클래식 음악을 통틀어 가장 대중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다. 1악장 맨 처음에 등장하는 여덟 개의 인상적인 음표를 두고 베토벤이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고 말했다는 비서 안톤 쉰들러의 증언 때문에 ‘운명 교향곡’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 모티브는 2악장에서 호른과 트럼펫이 선포하는 승리의 테마로, 3악장에서는 호른이 연주하는 행진곡으로, 4악장에서는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테마로 변화무쌍하게 등장한다. 1악장을 마치고는 자연스럽게 박수가 터져 나왔다.
첫 한국 공연인 만큼 앙코르도 단단히 준비했다.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5번과 6번,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서곡,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중 님로드를 들려줬다.
류태형 평론가는 “‘돈 후안’에서는 지휘자의 요구보다 빠릿빠릿하게 반응하는 악단의 적극적인 기동력이 돋보였고, 베토벤 교향곡 5번은 독일적이라 할 수 없는 악단 성격의 빈틈을 지우며 숨 쉴 틈 없이 부드럽게 이어서 연주했다”고 말했다.
이어 “브람스 헝가리 춤곡, 비제 카르멘, 엘가 님로드 등 앙코르는 내한공연 오케스트라 앙코르의 전형을 압축해서 듣는 듯했다. 골격은 굵지 않았지만 빼어난 관과 열정을 갖춘 오케스트라였다. 프랑스와 스페인 레퍼토리를 더 들어보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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