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 한스는 삶의 마지막 순간 혼자 노래를 부른다. 그의 곁에는 예술적 재능이 풍부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친구 헤르만이 함께해왔다. ‘데미안’에서 주인공 에밀은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들으며 음울하면서도 신비한 전율에 사로잡힌다. 성당 앞을 지나가다 오르간 연주를 들으며 외로운 마음을 위로받기도 한다.
‘게르트루트’는 음악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며, ‘황야의 이리’에서도 재즈음악 연주자가 중요 인물로 등장한다. 최후의 대작 ‘유리알 유희’는 모든 현상을 음악으로 형상화하는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이처럼 독일 출신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1877∼1962)의 거의 모든 소설에는 음악이 전면에 등장해 청각적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의 문학은 음악과 음악가로 가득 차 있고, 문장들은 음악적 선율과 리듬에 맞추어 직조됐으며, 무엇보다 모든 작품에 음악의 정신과 형식이 깊이 흐르고 있다.
이런 이유로 헤세를 깊이 읽어나간 사람들은 그의 문학을 ‘악보 없는 음악’이라고 칭하기도 하며, 그의 문학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음악에 대한 사유를 연대기적으로 따라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음악은 헤세의 세계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헤세 60주기를 맞아 출판사 북하우스는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옮긴이 김윤미·408쪽·2만2000원)를 번역 출간했다고 1일 밝혔다. 헤세의 음악에 대한 글을 모두 아울렀다.
194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헤세는 문학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사랑했지만, 그 중에서도 다른 어떤 부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음악과 깊고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그는 음악을 “미적으로 지각 가능한 순수한 현재이자, 찰나의 순간이 과거 및 미래와 합일을 이루는 마법”이라고 표현하면서, 모든 예술 장르 중에서도 음악을 가장 높은 곳에 내세웠다.
어느 편지에서는 “음악은 내가 무조건적으로 경탄을 바치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유일한 예술이다. 다른 그 어떤 예술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음악에 대한 독자적인 작품들을 모은 것으로 산문, 소설, 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2부는 신문과 잡지에 기고한 글, 편지, 일기, 메모 등을 집필 순서에 따라 배치됐다. 2부에 실린 글은 1부에 실린 글보다 자전적이며 직접적인 고백을 담고 있으며, 평생에 걸쳐 이루어진 헤세의 음악 탐색과 변화 과정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음악에 대한 감정 위주의 묘사가 주를 이루었던 젊은 시절의 글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사회적·정치적 현실을 의식한 모럴리스트적 요청의 차원으로 나아감을 감지할 수 있다.
초기의 글에서 헤세는 청각적 지각을 시각적 지각과 비교해 묘사함으로써 음악적 인상을 눈에 보이는 언어로 탁월하게 옮겨놓는다. 프랑스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로맹 롤랑도 이 시기의 헤세를 회상하면서 “그는 무엇보다도 시각적인 인간이다. 음악을 들을 때 그는 언제나 이미지와 풍경을 본다”고 기록했다. 즉 이즈음의 헤세는 음악이라는 예술 분야에 감각적이고 가치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독자들은 음악에 대한 다이내믹하면서도 극도로 섬세한 묘사들을 읽으며 음악의 소리가 시의 언어로 옮겨가는 황홀한 마법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그의 입장은 감각적인 차원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의 음악론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모럴의 차원이 합류하면서 더 깊어지고 확장된다. 예술가이자 청자로서 그는 특히 관객을 마비시키는 도취적인 음악과 연주자에 대한 개인숭배를 경계했다.
한자리에 모인 수많은 개인들이 연주에 도취되고 사로잡혀 하나의 균질한 덩어리가 되어버리는 것, 개인성이 사라지고 그 모든 다양한 충동이 하나의 집단 충동으로 수렴되는 것 등 음악이 청중의 심리를 조종할 가능성을 염려한 것이다. 여기에는 정치 집단이 군중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심리를 조종했던 당시의 사회적 배경(1, 2차 세계대전과 나치 집권)이 자리하고 있다. 예술과 정치가 집단을 움직인다는 공통점을 인지해나가면서 그는 예술적 성취를 사회적 정치적 현실과 별개의 것으로 다룰 수 없게 된다.
헤세의 음악적 선호는 확고하다. 그는 (가령 바그너나 말러처럼) 도취적인 표현이나 육중한 악기 편성이 드러난 음악보다 (바흐나 모차르트처럼) 삶을 긍정하는 가뿐하고도 명랑한 선율을 사랑한다. 헤세에게 이들의 음악은 그저 아이 같은 경쾌함이나 순진무구한 표현이 아니라 “사무치게 깨달은 자의 경쾌함과 무구함”이 담긴 영혼이라고 확신한다.
한편 헤세와 음악의 친밀한 관계는 한국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작가 장정일은 “헤세의 작품에서는 음악 소리가 들린다. 그의 전작을 일별하고 최후의 대작까지 살피고 나면 헤세는 단연 음악의 성자다”라고 썼고, 작가 배수아도 “헤세가 음악에도 관심과 조예가 있었다”고 쓰면서 이 책에도 수록된 ‘어느 여자 성악가에게 쓴 부치지 않은 편지’가 헤세의 독특하고도 설득력 있는 음악론을 보여준다고 정리했다.
음악인들이 헤세의 작품에서 음악을 찾아낸 시도도 여럿 있었다. ‘데미안’을 주제로 한 연주회가 종종 열리기도 했고, 2020년에는 헤세의 작품에 등장하는 클래식 작품들을 연주하는 콘서트 ‘헤르만 헤세의 음악세계’가 열려 문학 독자들과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이렇듯 수많은 이들이 헤세에게서 음악을 발견하고 글과 연주로 선보였던 가운데,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는 헤세의 문학에 스민 음악에 대한 예감을 확인해주는 하나의 결실이자 선물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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