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은 정말 저에게 뜻 깊은 곡이며, 제 연주 커리어상 가장 많이 연주한 곡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번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국내에서 라흐마니노프 2번 협주곡을 협연할 일은 없을 듯합니다. 더 뜻을 담아 연주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임동혁의 고백처럼 라흐마니노프 2번은 아주 특별하다. 일곱 살에 피아노를 시작했고, 열 살에 아예 러시아로 이주해 모스크바 국립 음악원에서 레프 나우모프에게 배웠다. 그의 음악적 뿌리가 ‘러시안 피아니즘’에 있고, 그를 대표하는 곡이기 때문이다. 2019년 발매한 5집 앨범에도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연주한 이 곡을 수록했다.
2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마지막’으로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 2번을 보려는 관객들로 꽉 찼다. 이미 5월에 슈베르트 소나타를 앞세워 국내 데뷔 20주년(2002년 6월 EMI 첫 앨범 출시·9월 LG아트센터 첫 단독리사이틀) 투어를 마쳤지만, 이날은 20주년 스페셜 공연이다. 이병욱이 지휘하는 디토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췄다.
임동혁은 관객의 박수를 받으며 천천히 걸어 나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손수건을 꺼내 피아노에 묻은 지문을 닦아냈다. 예민함과 세밀함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일종의 시그니처 퍼포먼스다.
1악장부터 열 손가락 마법이 펼쳐졌다. 피아노가 홀로 앞부분을 연주하자 황량한 바람이 훅 몰려왔다. 저음과 고음이 번갈아 교차하는가 싶더니 중간 중간 날카로운 타건이 매서웠다. 현악이 제1주제를 낮은 음 위주로 연주하면서 불안감을 조성했다. 피아노에 의해 제시되는 제2주제는 긴장감을 70% 정도 드러낸 채 한결 여유롭고 편안하게 이끌어갔다.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취나 경지가 바로 ‘극치(極致)’다. 2악장은 ‘서정의 극치’를 보여줬다. 오케스트라의 가녀린 오프닝 후, 피아노의 펼친 화음을 배경으로 플루트가 아름다운 주제 선율을 연주하고 클라리넷이 이를 받아 이어갔다. 애간장을 녹인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그리고 역할을 바꿔 클라리넷의 펼친 화음을 배경으로 이번엔 피아노가 선율을 반복한다. 꿈꾸는 듯한 분위기다.
인삼을 꿀에 오랫동안 재워두면 흐물흐물 형과 질이 사라진다. 누가 인삼이고 꿀인지 모른다. 2악장이 딱 그렇다. 손가락이 건반을 터치할 때 마다 자작나무 숲을 뒤덮은 눈꽃이 피어나고, 두 볼을 빨갛게 스치는 눈보라가 몰아쳤다. 서늘한 아름다움이다. 에릭 칼멘이 ‘All By Myself’를 만든 이유를 알겠다.
3악장은 끝없는 설원을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다. 긴장을 가득 담고 힘차게 출발했다. 빠른 피날레는 피아니스트의 기량을 한층 돋보이게 했고, 중간에 아름다운 노래 선율이 등장해 잠시 숨을 고르기도 했다. 3악장을 달린 뒤 임동혁은 지휘자와 포옹을 하며 열띤 분위기를 가라 앉혔다.
관객들은 ‘계’를 탔다. 임동혁은 당분간 라흐마니노프 2번을 라이브로 직관할 수 없다는 아쉬움을 앙코르 4곡으로 달래줬다. 모두 프로그램북에 새겨 넣어도 될 만큼 무게감 있는 곡들이다.
먼저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3악장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들려줬다. 연주를 마치고 퇴장하자 지휘자 이병욱은 출입문에 서서 재치 있게 박수를 유도했다. 이어 라벨의 ‘라 발스’, 스크랴빈의 ‘에튀드 Op.8 No.12’, 차이콥스키의 ‘사계’ 중 ‘10월’을 잇따라 연주했다. 2곡 정도면 ‘생큐’인데 무려 4곡이니 ‘생큐 베리 머치’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앙코르에서는 악장에게 손가락 세 개와 네 개를 펼쳐 보이면 양해를 구하는 센스를 발휘하기도 했다.
이날 공연의 또 다른 하이라이트는 첼리스트 문태국이 엘가의 ‘첼로 협주곡’ 연주해 임동혁의 데뷔 20주년을 축하한 것. 두 사람은 10년의 나이차를 뛰어넘어 서로 음악적으로 긴밀하게 교류하는 동지이자 선후배 사이다. 문태국은 지난해 임동혁과의 듀오 연주를 통해 환상적인 호흡을 선보이며 호평을 받았다.
문태국은 첼로의 강렬한 화음으로 비극적인 운명을 담아냈고, 즐거웠던 지난날을 추억하듯 속삭였고, 서정적 선율로 위로하는 등 실력을 뽐냈다. 카잘스의 ‘새의 노래’로 앙코르를 선사했다.
지휘자 이병욱과 디토 오케스트라는 체코를 대표하는 민족주의 작곡가 드로르자크의 ‘슬라브 무곡 1권’ 중 ‘8번 사단조, 작품번호 46’을 들려줬다. 드로브자크의 후원자 역할을 자처하던 브람스가 자신의 ‘헝가리 무곡’과 같은 작품을 써보라고 권유해 만든 작품이다. 보헤미아의 민속춤곡을 매우 빠르고 강렬한 선율로 뿜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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