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시비즈 김일환 기자] 케테 콜비츠(1867~1945)는 오늘날까지 가장 유명한 독일 미술가로 간주되며 전 세계에서 끊임없이 재평가되고 있다. 케테 콜비츠는 러시아에서는 이미 1920년대 이후에 인기를 끌었으며, 중국에서는 1930년대 루쉰의 목판화 운동에 영향을 주어 항일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에서의 회고전은 항상 주목을 받았다.
풍월당이 출간한 ‘케테 콜비츠 평전(KOLLWITZ: Die Biografie·560쪽·4만3000원)’은 독일 프롤레타리아 회화의 선구자 케테 콜비츠의 삶과 예술을 전방위적으로 다루고 있다.
콜비츠는 두차례의 세계 대전에서 아들과 손자를 잃은 상실과 슬픔을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작품으로 승화해 냈다. 벨기에에 있는 독일 병사 묘역에 세워진 ‘애도하는 부모’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묘지 조각상이다. 베를린에 있는 콜비츠의 피에타 조각상은 매년 약 200만 명의 방문객을 베를린으로 끌어들인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이 20세기의 문제적 인물을 포괄적으로 다룬 전기가 없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열정적이고 기분 좋으며, 언젠가 “항상 누군가에 푹 빠졌고”, 남자와 여자 모두를, 심지어 밤중의 꿈에서는 자신의 아들조차 갈망한다는 것을 거리낌 없이 고백했던, 우리가 간과했던 콜비츠를 만난다.
부르주아적 관습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했고, 파리의 보헤미안 세계에 이끌렸으며, 여성이 다른 도시에서 공부하기 위해서는 남성의 ‘보호’가 필요했던 19세기 후반에 결혼과 정조를 의문시했던 콜비츠. 가장무도회를 꿈꾸고, 열광적으로 춤추는 것을 좋아했던 콜비츠.
이 책에서 우리는 저자들(유리 빈터베르크·소냐 빈터베르크)이 끈기를 가지고 살펴본 편지, 수첩 메모, 스케치, 공개할 생각이 없어서 ‘비밀 일기’라고 불렀던 노트, 생존해 있는 콜비츠의 세 손주들과의 대화에서 다양한 욕망을 지닌 또 다른 콜비츠를 만난다.
저자들은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는 콜비츠의 ‘성배’를 찾겠다는 희망을 품을 만큼 자신들이 주제넘지 않는다는 고백으로 글문을 연다. 그럼에도 우연히 콜비츠의 학창 시절 친구의 손녀 집에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콜비츠의 자화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진품 목록에 올리기도 한다. 옮긴이(조이한·김정근)의 말처럼 이 책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상당 분량의 케테 콜비츠 전기를 출간한 두 작가 덕분에 위대한 예술가의 삶과 예술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말 없는 선들이 고통의 비명처럼 골수까지 파고든다.” -게르하르트 하웁트만(노벨 문학상 수상자)
콜비츠는 전쟁에서 아들과 손자를 잃고 매일이 칼날 위에 서 있는 아픔이었을 형벌의 시간을 위대한 예술로 승화한 모성의 예술가다. 콜비츠는 노동자의 삶을 진솔하게 표현한 판화가였으며 사회적 약자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사회의 비리를 고발한 뛰어난 통찰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빈민촌에서 의사인 남편과 함께 헐벗고 굶주린 환자들을 보살피면서 가난의 비참함을 유심히 스케치하는 한편 굳은살 박인 노동자의 손에서 창조의 힘을 발견해 낼 줄 알았다. 시선은 언제나 고통 받는 사람을 향했고 단순한 동정을 진정한 예술로 바꾸는 데 성공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이 책은 콜비츠라는 평범하다 못해 유약하기까지 했던 한 여성이 선전선동의 교두보가 되어 펄럭이는 깃발에 새길 판화를 제작하고 저항의 아이콘이 되기까지, 그리고 “다시 전쟁은 안 돼!”라고 외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엮었다.
그런가 하면 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콜비츠가 겪어야 했던 심정적 고뇌와 흔들림,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능력에 대한 회의,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의무감과 책임감, 기존의 틀과 몸에 밴 관성을 깨부수기 위해 겪어야만 했던 초조, 불안, 회의, 절망 등에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콜비츠를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초지일관 신념을 밀고 나간 영웅적인 인간이기 전에 콜비츠라는 한 여성이 가진 다양한 욕망, 모든 예술의 본질인 질긴 생명력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콜비츠의 작품에는 유독 여성이 많이 등장한다. 콜비츠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 아름답지 않아서 사랑 놀음 따위에 방해받지 않고 예술을 계속할 수 있을 거라고 평가한다. 당시는 많은 여성 화가들이 전시회에 출품하기 위해 이름을 중성적으로 줄여 기재해야 했다.
‘직조공 봉기’ 연작 기사를 내보낸 프랑스 잡지는 콜비츠가 아닌 그 스승의 이름을 기재했다. “여성에게 메달이라니, 너무 나가지 않았소. 고귀한 상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과 다름없는 짓이오! 훈장과 명예 휘장은 공을 세운 남자들의 가슴에 달리는 것이오”라는 황제의 거부권으로 수상에서 제외됐던 콜비츠였기에 여성의 고통과 몸부림을 작품에 옮기는 일은 예술가로서 숙명에 가까웠을 것이다.
싱글맘이자 유대인이었던 뮤리얼 루카이저는 ‘케테 콜비츠’라는 시에서 “한 여자가 본다 / 그 폭력을, 수그러들지 않는 / 알몸의 움직임을 / ‘아니오’라는 고백을 / 위대한 연약함의 고백을, 전쟁을, …… 한 여자가 자기 삶의 진실을 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 세계는 터져버릴 것이다”라고 노래했다. 마지막 두 문장은 우리에게 미투 운동의 슬로건으로도 알려져 있다.
뮤리얼 루카이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여성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는 ‘갈망’이라는 시에서 “페이지마다 기록한다. 고생에 찌든 아이들을 고생에 찌든 품에 끌어안은 / 콜비츠의 여자들을, 젖이 마른 ‘엄마들’을”이라며 콜비츠의 판화에서 튀어나올 듯한 여성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예술을 통해 교감하고 연대했던 여성들은 죽이는 전쟁에서 먹여 살리기 위한 투쟁을 감행했고, 서로를 알아보고 손을 건넸던 것이고 맨 앞에 콜비츠가 있었다. 그들은 위로하고 응원하고 동행하는 것이 예술이 나아갈 길임을 알았던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콜비츠의 ‘어머니’들은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1903년), ‘굶주림’(1922년), ‘빵’(1924년), ‘가내 노동자’(1925년), ‘자화상’(1924년) 등에서 말없이 고통을 끌어안고 절규하면서 마지막까지 커다란 두 손으로 아이들을 감싸고 있다. 콜비츠는 “보시오, 우리 모두가 겪은 참상을”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희생을 강요받은 침묵하는 독일 민족의 목소리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미술가.” -로맹 롤랑(노벨문학상 수상자)
유화를 전공하기 위해 들어간 학교에서 콜비츠는 판화를 접한다. 판화는 유화처럼 집 안을 장식하는 유한계급의 값비싼 소장품이 아니라 얼마든지 복제가 가능하고 대중적이며 선동적이기까지 한 홍보에 적합한 민중의 매체다. 평생 아틀리에에 갇힌 예술을 넘어 민중이 현장에서 대중 예술을 향유하기를 바랐던 콜비츠에게 판화는 안성맞춤 작업 방식이었을 것이다.
콜비츠는 빠르고 천재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느리면서도 끈질기게 평생 판화와 조각으로써 젊은이들이 의미 없이 희생되는 전쟁에 반대했다. 히틀러와 나치의 집권을 막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서명을 하고 힘을 보탤 필요가 있는 곳에서는 작품만이 아니라 직접 거리로 나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어떤 당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반전 판화를 제작한다는 이유로 당국의 감시와 가택수색을 당해야 했던 콜비츠. 그는 2차 세계대전 종전을 보름 앞두고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쓸쓸히 죽음을 맞았다.
우리에게는 익숙하고도 낯선 이 책은 ‘추모’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한편으로 끝없는 분노, 슬픔 등 감정의 소용돌이에 갇혀버린 콜비츠의 작품 속 혼령들은 세상의 불의에 눈감지 말 것을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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