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작곡가 정애련 “‘부여잡은 손가락 핏물 들도록 이별 힘들었나’에 심쿵”

김민지·조지영·윤승환·최병혁 등과 작곡 콘서트
‘12월’ ‘가을빛 담쟁이’ 등 17곡 탄생비화 소개

박정옥 기자 승인 2023.01.09 17:30 | 최종 수정 2023.03.17 08:30 의견 0
작곡가 정애련(왼쪽에서 네번째)이 6일 열린 열번째 작곡발표회에서 성악가·피아니스트와 함께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김문기의포토랜드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강명성의 시 ‘12월’에서는 ‘휘청이는 마음 기대라고 고독이 등을 대준다’에 꽂혔습니다. 시인은 한해의 마지막 달에 느끼는 상실감을 이렇게 토닥토닥 위로해주고 있습니다. ‘가을빛 담쟁이’에서는 ‘부여잡은 손가락 핏물이 들도록 그리도 이별이 힘들었나’에 심쿵했어요. 초록에서 붉은빛으로 물들어 가는 담쟁이의 색채변화를 우리네 인생사에 빗대 이토록 감각적으로 표현해낼 수 있다는 게 감동이었죠.”

한국적인 음악을 선사하는 작곡가 정애련은 좋은 시를 캐치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남들이 그냥 흘러 보내는 작품도 그의 예리한 레이더망에 걸리면 멋진 작품으로 탄생한다. 그는 6일 서울 서초구 SCC홀에서 열린 열 번째 작곡 콘서트에서 “시를 사랑하는 작곡가”라고 스스로를 정의했다. 그러면서 “시가 노래라는 날개를 달고 우리 귀에 살랑거리는 기쁨과 행복을 함께 누리고 싶다”고 덧붙였다. 음악을 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시인이 됐으리라.

작곡가 정애련이 6일 열린 열번째 작곡발표회에서 자신이 만든 곡을 설명하고 있다. ⓒ김문기의포토랜드 제공


이날 발표회에서는 17곡을 소개했다. 모두 그의 ‘촉’과 ‘감’을 통과한 명품 노래들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듯, 17곡은 피와 땀과 눈물로 빚은 귀한 자식들이다. 직접 마이크를 잡고 곡을 만들게 된 배경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기 때문에 더욱 값진 시간이었다.

정애련은 한 시인의 작품을 깊숙이 파고든다. 인연을 맺으면 그 시인을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면서 베스트를 만들어 낸다. 임경희 시인의 3편, 강명성 시인의 6편, 이상규 시인의 3편, 고봉 기대승의 3편이 그의 손길을 거쳐 출생신고를 마쳤다. 김생기 시인도 1편, 그리고 정애련도 직접 1편의 노랫말을 만들었다.

정애련 작곡가는 “이번 공연은 내 마음 속으로 떠나는 힐링여행이 되기를 바란다”라며 “자연, 고향, 사랑 등을 담고 있으니 도시의 소음과 네온사인은 잠시 잊고 휴식을 취하면 좋겠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소프라노 김민지가 제10회 정애련 작곡콘서트에서 노래하고 있다. ⓒ김문기의포토랜드 제공


정상의 성악가 6명과 피아니스트 이유화가 케미를 뽐냈다. 소프라노 김민지는 연인과의 이별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슬픈 비장감을 제대로 살려냈다. ‘그대 가시려거든’(임경희 시)에서 “눈물 한 방울마저도 훔쳐가소서”라며 벼랑끝 절박한 사랑을 호소했고, ‘노을빛 그대’(임경희 시)에서는 “곁에 둘 수 없는 그 날이 올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절절하게 토해냈다. 절창이다.

소프라노 조지영이 제10회 정애련 작곡콘서트에서 노래하고 있다. ⓒ김문기의포토랜드 제공


해마다 봄이 되면 여의도 윤중로 벚꽃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지만, 경희대 서울캠퍼스의 벚꽃도 이에 견줘 전혀 꿀리지 않는다. 시인은 어느 봄날 경희대 교정의 꽃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하늘과 땅 사이에 부시도록 황홀한 사랑”이 끝나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탄생한 곡이 ‘낙화’(이상규 시)다. ‘님 생각’(이상규 시)은 옥잠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쓴 시다. “오신다던 님 / 아니 오시고 / 봄볕에 묻어 온 / 꽃내음은 뜨락 가득합니다”라며 간절한 그리움을 담았다. 소프라노 조지영은 벚꽃이 되기도 하고 옥잠화가 되기도 하면서 작사가와 작곡가의 마음을 짚어냈다.

조지영은 ‘가을빛 담쟁이’(강명성 시)와 ‘단향’(강명성 시)도 들려줬다. 정애련은 ‘단향’에 대해 자세한 해설을 곁들였다. “사전에 올라 있지 않은 단어로 ‘비단 단(緞)’자와 ‘향기 향(香)’자를 새로 조합해 만들었다”라며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 즉 ‘화양연화(花樣年華)’와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그래, 그랬지 / 고난도 기쁨이라 아픔도 사랑이라” 노랫말에서 세상을 살아내는 긍정 마인드가 읽혀져 따뜻했다.

소프라노 서혜원이 제10회 정애련 작곡콘서트에서 노래하고 있다. ⓒ김문기의포토랜드 제공


소프라노 서혜원은 ‘그대 오는 길’(임경희 시)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설렘과 흥분을 노래한 뒤, 이어 “한으로 채색되어 / 화려한 색채로 / 태어나는 그림들”이라며 천경자 화백의 삶을 다룬 ‘한 여인의 전설’(김생기 시)을 들려줬다.

테너 윤승환이 제10회 정애련 작곡콘서트에서 노래하고 있다. ⓒ김문기의포토랜드 제공


테너 윤승환은 ‘그리움 실어 밤비 내리다’(강명성 시)를 불렀다. 피아노 전주에 뚝뚝뚝 빗방울이 떨어졌고, “그리움 사무쳐 / 걷다가 뛰다가 / 호도도독 달려들어 / 메마른 내 가슴을 적시누나”라며 뜨거운 걸음으로 사랑이 내 곁으로 오고 있음을 노래했다. 보이스에 호소력이 넘쳤다.

“어느 해 겨울, 서울행 열차를 탔는데 눈이 내렸어요. 눈을 바라보며 시를 썼죠. 하늘에서 흰 색이 떨어질 때는 아름답지만, 흙땅에 뒹굴다 사라질 때는 솔직히 지저분하잖아요. 여기서 생각의 날개가 펴지면서, ‘날 잠시라도 잊은건 괜찮다오 / 그래서 그대가 행복할 수 있다면’이라는 구절이 나왔어요. 누군가 내 모든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만 기억해줘도 행복한 삶이잖아요.”

정애련의 고백처럼 ‘눈처럼’(정애련 시)은 희생의 마음이 담겨있어 뭉클했다. 이날 공연의 타이틀이 ‘눈처럼...’이었는데, 마침 콘서트가 열리는 동안 밖에서는 공연을 축복하듯 눈이 내렸다. 기막힌 타이밍이다.

테너 김지훈이 제10회 정애련 작곡콘서트에서 노래하고 있다. ⓒ김문기의포토랜드 제공


테너 김지훈은 ‘풍월’(고봉 기대승 시)과 ‘꽃잎은 바람에 날리고’(강명성 시)를 선사했다. ‘풍월’은 기대승이 강과 바다가 만나는 영산강 하구에서 지은 시다. 정애련은 “가곡은 피아노의 음악이다”라며 성악가와 하모니를 이루는 피아노 반주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풍월’에서는 피아노의 엑설런트 선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꽃잎은 바람에 날리고’는 초연이었다. ‘신인’ 김지훈은 “내 안의 작은 뜨락에”라며 레치타티보를 한 뒤, 초연의 영광을 함께 하는 기쁨을 누렸다. 내일이 더욱 기대되는 목소리다.

바리톤 최병혁이 제10회 정애련 작곡콘서트에서 노래하고 있다. ⓒ김문기의포토랜드 제공


바리톤 최병혁은 ‘12월’(강병성 시)에 이어 ‘기약’(이상규 시) ‘작별’(고봉 기대승 시)을 불렀다. ‘기약’은 “말없이 그대가 뒤돌아서더라도, 말없이 그대가 떠나가더라도, 서러움 되삼키며 와락 야윈 가슴 열어보일 먼훗날 기약하네”라는 가사가 관객 가슴에 박혔다.

퇴계 이황(1502~1571)과 고봉 기대승(1527~1572)은 비록 스물다섯 살의 나이차가 났지만, 학문적으로 서로를 존경했다. 치열하게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펼쳤지만 예를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아름다운 싸움이었다. 후배는 1년의 시차를 두고 선배와 헤어지는 아쉬움을 담은 두 편의 시를 썼다. 이 두 편을 1절과 2절로 삼아 만든 노래가 ‘작별’이다.

소프라노 서혜원과 테너 김지훈이 제10회 정애련 작곡콘서트에서 노래하고 있다. ⓒ김문기의포토랜드 제공
소프라노 김민지와 바리톤 최병혁이 제10회 정애련 작곡콘서트에서 노래하고 있다. ⓒ김문기의포토랜드 제공


듀엣곡도 2곡 선물했다. 서혜원과 김지훈은 ‘고백’(강명성 시)을 통해 사랑의 시작을 담아냈고, 김민지와 최병혁은 ‘식영정’을 통해 그림자까지 쉬어가는 담양 식영정의 아름다운 풍광을 콘서트홀로 데리고 왔다.

한국가곡 발전을 위해 헌신한 정애련 작곡가가 리음아트&컴퍼니 월간리뷰의 김종섭 대표로부터 공로패를 받은 뒤 인사하고 있다. ⓒ김문기의포토랜드 제공


1부가 끝나고 2부가 시작되기 전 흐뭇한 장면도 연출됐다. 이번 공연을 주최·주관한 리음아트&컴퍼니의 월간리뷰는 그동안 한국가곡 발전을 위해 헌신한 정애련 작곡가에게 공로패를 수여했다.

/park72@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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