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공연 타이틀은 ‘한지민 피아노 독주회’다. 그런데 2부가 시작되자 무대에 여러 타악기가 등장했다. 작은북, 트라이앵글, 심벌, 탬버린, 글로켄슈필, 튜블러벨스 등이 세팅됐다. 그 뒤로 퍼커셔니스트 손혁진이 위치를 잡았다. 이색적 풍경이다.
피아니스트 한지민이 동학 농민운동을 이끌었던 전봉준 장군을 기리는 우리 민요 ‘새야새야 파랑새야’를 모티브로 한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꼬마 파랑새(The Little Blue Bird Dance Suite)’를 연주했다. 세계 초연이다. 재미작곡가 박희정에게 직접 곡을 위촉했다. 타악기와 협업하는 새로운 장르의 피아노 작품이 탄생한 것.
박희정은 프로그램북에 이렇게 적었다. “기본적으로 약자에 대한 폭력을 담았다. 민족이나 국가 단위의 거시적 규모든, 아니면 학교나 가정에서의 미시적 규모든, 폭력은 씻을 수 없는 아픔과 상처를 남긴다. 이 곡은 아직 세상의 위험을 모르는 순진한 꼬마 파랑새가 사냥꾼에게 쫓기는 모습을 통해 폭력의 문제점을 이야기 하고 있다. ‘파랑새 민요’ 주제에 의한 일종의 변주곡이다. 각 장면에서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꼬마새의 날갯짓과 불길한 운명의 대립이 펼쳐진다.”
한지민은 작곡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잡아냈다. 그의 손끝을 타고 새벽녘 어두운 숲에 남겨진 어미 잃은 파랑새가 날아올랐다. 나무 사이로 떨어지는 차가운 물방울에 놀라기도 하고, 작은 소리를 내며 주변을 살피기도 한다. 총총걸음으로 이곳저곳을 다니며 어미를 찾는다. 그 모습 뒤로 뒤뚱거리며 다가오는 사냥꾼이 보인다.
꼬마새가 빠른 걸음과 비행으로 도망치는 추격전이 장난스럽다. 사냥꾼을 피해 숨지만 큰 위험인지 모르고 숨바꼭질을 즐기는 듯하다. 멀리 날아가 혼자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노는 모습을 재미있는 왈츠로 표현했다. 곧 닥칠 비극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꼬마새와 사냥꾼이 다시 조우한다. 불길한 분위기가 가득한 가운데 꼬마새가 예쁜 꽃 앞에서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사냥꾼의 총에 맞는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멀지 않은 나무 가지 위로 날아간 새는 어미를 그리워하며 힘들어 하다가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죽음의 음악이 음산한 가운데 절규하는 울음이 가슴 아프다. 마지막 날갯짓 후 꼬마새는 조용히 숨을 거둔다.
피아노 연주 중간 중간 타악기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심지어 악보까지 펄럭펄럭 흔들어 날갯짓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입체적 사운드다. 익숙하지 않은 곡인 만큼 무대 위 벽면에 악보를 띄워 관객들이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했다. 친절한 연주회다.
낯설지만 의미있는 도전에 나선 한지민에게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그는 22일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열린 리사이틀 ‘새로운 지평선으로의 여정(A Journey for the New Horizon)’에서 세계 초연 1곡과 한국 초연 2곡을 선보였다.
음악가에게 독주회는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것을 보여주는 신고식 개념이 강하다. 하지만 한지민은 이런 고정 관념을 과감히 벗어났다. 새로운 레퍼토리를 시도해 연구와 탐구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국내 초연 2곡도 귀를 사로잡았다. 퓰리처와 그래미 작곡상을 수상한 미국 작곡가 아론 제이 커니스의 ‘피아노 독주를 위한 잠과 꿈의 자장가(Lullaby by Before Sleep and Dreams for Solo Piano)’에서는 아이를 재우는 부모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조용하게 반복되는 멜로디가 점차 큰소리로 불협화음을 만들었다. 절정을 찍은 후 다시 조용하고 사색적인 음악으로 컴백한다.
중국 출신의 세계적 작곡가 드칭 웬의 ‘피아노 솔로를 위한 연가와 뱃노래(Love Song and River Chant for Solo Piano)’는 강렬함으로 깊은 인상을 줬다. ‘연가’ 파트에서 피아노 연주자가 휘파람 소리를 내기도 했고, ‘뱃노래’ 파트에서는 뱃사공들이 하루에서 상류로 큰 배를 이끄는 에너지를 음으로 살려냈다.
한지민은 1부에서 모두 여섯 곡으로 이루어진 사무엘 바버의 춤곡 모음곡 ‘선물(Souvenirs)’ 중 제2·3·5곡을 연주했다. 역동적인 폴카(제2곡)가 끝나자 여성과 남성이 함께 추는 발레곡 파드되(제3곡)와 활기차고 웅장한 탱고(제5곡)가 한지만의 열손가락에서 피어났다.
로베르토 슈만은 한때 위대한 피아니스트를 꿈꾸며 엄청난 연습에 몰두했다. 안타깝게도 손가락을 다쳐 연주자의 길을 포기하고 작곡가와 평론가의 길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 시기에 피아노 독주를 위한 변주곡 형식의 곡을 8곡 작곡했는데, 그 중 가장 성공적 작품이 ‘교향적 연습곡(Symphonic Etueds)’이다. 한지민은 독주 피아노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는 슈만의 뜻을 잘 살려냈다.
한지민은 솔리스트뿐만 아니라 실내악 분야와 오케스트라 협연에도 특별한 관심을 갖고 매진하고 있다. 오는 7월 13일(목) 일신홀에서 열리는 함신익 오케스트라 ‘심포니송 2023 챔버뮤직 시리즈 Ⅱ’에서 드칭 웬의 피아노 3중주와 베토벤의 피아노 삼중주 4번을 연주한다. 또한 내년에는 드칭 웬이 작곡 중인 피아노 협주곡을 중국에서 세계 초연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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