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하늘나라 남편에게 보내는 세레나데라고나 할까요. 남편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저 혼자서 스스로 약속한 음악회의 프로그램을 하나씩 꺼내고 있는 셈이죠.”
참가번호 17번의 이단(65) 씨가 안으로 들어왔다. 심사위원들에게 인사한 후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를 펴고 건반을 눌렀다. ‘은파(銀波)’라는 제목으로 불리는 에디슨 와이먼의 ‘은빛 물결(Silvery Waves)’이 출렁거리며 흘렀다.
유치원 때 시작해 중학교 3학년까지 피아노를 쳤다. 체르니 40번 정도까지 배운 것 같다. 그 후 고등학교,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피아노는 먼 나라 이야기가 됐다. 결혼하고 아들·딸 낳고 살면서는 더 멀어졌다. 오랫동안 잊었다.
50대 중반이 되어 다시 피아노를 시작했지만 쉽지 않았다. 부지런히 연습하고 연습했지만 막상 실전에 나서니 생각지도 않은 실수가 나온다. 7명이 매의 눈을 하고 쳐다보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미스 터치를 할 땐 스스로를 꾸짓듯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경연의 특성상 곡을 끝까지 연주할 수는 없었지만 3분 남짓의 시간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더 잘 할 수 있었는데’라는 아쉬움이 컸다.
17일 오후 서울 서초동 스타인웨이 갤러리서울에서 이단 씨가 솜씨를 뽐낸 무대는 ‘제2회 한국 스타인웨이 아마추어 콩쿠르’. 지난해 코스모스악기 창사 50주년을 기념해 처음 개최됐다.
올해는 클래식, 재즈, 팝, 뉴에이지 등 다양한 장르의 피아니스트를 지원하는 스타인웨이의 행보에 걸맞게, 록·메탈을 제외한 여러 장르의 곡들을 선보일 수 있도록 과제곡의 범위를 늘렸다. 연주하고 싶은 곡을 마음껏 선택 가능하도록 곡의 길이를 제한하지 않았다. 암보가 원칙이지만 음악을 있는 그대로 즐기고 싶은 아마추어 음악가들이 스트레스 받지 않도록 악보 사용도 허용했다. 3억7500만원짜리 스타인웨이 피아노(D모델)를 실제로 쳐보는 기회도 메리트였다.
그가 출전한 부문은 50세 이상을 대상으로 한 시니어부. 소설가, 치과의사, 호텔리어, 번역사, 대학시간강사, 초등교사, 회사원, 주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1972년생부터 1957년생까지 21명이 출전했다.
실력을 테스트해 보려고, 상 한번 받아볼 욕심으로, 내 삶의 2막을 더 풍성하게 즐기려고 등등 저마다의 출전 이유가 있지만 이단 씨의 사연이 눈길을 끈다. 먼저 떠난 남편에게 바치는 애틋한 사부곡(思夫曲)이다.
“제가 집에서 요리는 가르치는 일을 했어요. 남편은 저보다 다섯 살 위였어요. 2013년, 남편의 환갑 생일을 맞아 100여가지 레시피를 담은 요리책을 4권 발간했어요. 출판기념회를 열었는데, 사실 저를 위한 행사가 아니라 남편에게 책을 헌정하는 서프라이즈였어요. 막판까지 비밀로 했어요. 모두들 정말 깜짝 놀랐죠.”
남편에게 책을 헌정한 이유는 정말 고마웠기 때문이다. 그는 어렸을 적에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하다. 그런 자기를 진정 사랑해 ‘험난한 길’을 뚫고 결혼했다. 어디를 가든지 꼭 데리고 다녔단다. 해외여행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남편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 책을 헌정한 것이다.
그날 이후 이단 씨는 또 다른 목표를 세웠다. ‘남편이 70세 되는 해에 음악회를 열어주자’라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남편에게도 자식들에게도 이런 결심을 밝히지 않았다. 비밀 작전하듯 몰래 선생님을 섭외해 연습했다. 다행히 악보 보는 것을 잊어버리지는 않았지만, 완전 초보자가 되어 ABC부터 시작했다.
그런데 2017년 1월 겨울 남편이 갑자기 쓰러졌다. 손 쓸 틈도 없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었으니 아픔이 얼마나 컸겠는가. 1년 8개월 동안 밖에도 나가지 않고 고립생활을 했다. 눈물의 날들이었다.
주위 분들이 많은 걱정을 해줬다. 2018년 8월 평소 알고 지내던 한 뮤지컬 가수가 음악회에 초청을 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고 있는 대배우다. 오랫동안 귀도 닫고 눈도 닫고 살았는데 그 가수가 손글씨로 꾹꾹 눌러쓴 편지를 줬다. 이단 씨는 “제가 말한 적도 없는데 남편을 떠나보내고 두문불출하고 있는 제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라며 “다시 세상으로 나와 달라는 간곡한 마음이 느껴져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그날 알았어요. 그래 내겐 ‘사명’이 있었지, 남편을 위한 피아노 연주회라는. 그리고 노래하는 사람이나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도울 수 있다면 돕자라고 맹세했어요. 음악의 힘이 저를 어둠 속에서 끌어낸 겁니다.”
다시 힘을 얻어 피아노 앞에 앉았다. 빠뜨리는 날도 많았지만 열심히 연습했다. 그리고 지난해 우연히 스타인웨이 아마추어 콩쿠르가 열린다는 포스터를 봤다. 두근두근 설렜다. ‘그래 한번 나가보자’라며 접수했다. 그동안 연습했던 구스타프 랑게의 ‘꽃노래’를 들고 출전했다. 12월에는 남편 추모 5주년을 맞아 작은 음악회를 열었고, 거기서도 ‘꽃노래’를 연주했다.
그리고 올해 다시 ‘은빛 물결’로 두 번째로 콩쿠르에 도전한 것. 결국 ‘꽃노래’도 ‘은빛 물결’도 하늘나라 남편에게 보내는 사랑의 세레나데다. ‘여보! 고마워요 사랑해요’라는 편지다.
“남편을 먼저 보낸 뒤 피아노로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 근육이 굳어 마음대로 연주되지는 않지만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마음의 근육’은 매일 더 단단해지는 것 같아요. 지금도 1주일에 한번씩 레슨을 받아요. 제가 음악을 통해 힘을 받았으니, 이제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어요. 남편을 위해 연주하겠다는 약속을 매일 지키는 것 같아 뿌듯하고요.”
이단 씨는 남편과 자신의 이름에서 한글자씩을 가져와 ‘화단’이라는 재단을 만들어 음악인들을 지원하고 있다. 음악을 통한 선한 영향력이 이렇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것이다.
이날 시니어부에 참가한 21명 모두는 저마다의 간절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페셔널이 아니기 때문에 실수는 많았지만 모든 것이 용서되는 콩쿠르였다.
베토벤 ‘발트슈타인’ 1악장을 연주한 참가자는 중간에 음을 잘못 누르자 “다시 할게요”라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고, 멀리 경남 함양서 올라온 참가자는 눈이 침침해 돋보기를 꺼내 쓰고 드뷔시의 ‘달빛’을 연주했다.
지난해 베토벤 ‘월광 소나타’를 연주했던 한 기업의 대표는 올해는 ‘비창 소나타’를 들고 다시 나왔다. 그는 연주를 마친 뒤 잦은 에러가 못내 아쉬운 듯 ‘어이쿠’를 연발하기도 했다.
번역사로 일하고 있는 참가자는 음악을 즐기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리스트의 ‘소네트 104’를 연주해 눈길을 사로잡았고, ‘월광’을 연주한 남성 출전자는 음악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심사위원이 세 차례에 걸쳐 이제 그만해도 된다며 종을 쳤지만 소리를 듣지 못하고 계속 연주했다. 뜨거운 열정이다.
코스모스악기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들의 무대 기회를 늘려주기 위해 총 3곳의 국내 유명 공연장에서 입상자 연주회를 계획하고 있다. 콩쿠르가 진행된 스타인웨이홀, 후원·협업을 맺은 전자랜드의 랜드홀, 그리고 모든 음악인들의 워너비 공연장인 예술의전당 인춘아트홀(미정) 등에서 입상자 연주회를 진행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어디 이뿐인가. 입상자 연주회와 함께 부상으로 전문 피아니스트의 마스터클래스도 개최한다. 스타인웨이 교육 파트너를 중심으로 국내 유명 피아니스트도 초청할 예정이다.
김용배 심사위원장(전 예술의전당 사장)은 “올해는 전체적으로 수준이 더 높아졌다”라며 “특히 입상한 피아니스트들의 실력에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콩쿠르가 피아노를 통해 힐링이 되는 삶을 누리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한편 각 부문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학생부(15~25세)=최우수 노준탁·엄현서, 은상 박경재, 동상 김효재, 장려 윤희승·김명준·유재준
▲청년부(26~35세)=최우수 차희민, 금상 박태원, 은상 고정우, 동상 정건희·정지선, 장려 송재신·박준범·이진형
▲일반부(36~49세)=대상 이준, 금상 이미선, 은상 서지은, 동상 김진희, 장려 홍은경·박경수·백지영·조소진
▲시니어부(50세 이상)=최우수상 성은주, 금상 서덕식, 은상 김수경·김태연, 장려 박미나·이현정·양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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