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저는 자유와 즉흥의 힘을 믿습니다. 관객들이 어떤 곡을 듣게 될지 미리 공지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놀라움도 공연의 한 요소입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저는 더욱 자유로워짐을 느낍니다. 공연도 더욱 새로워지고요.”
안드라스 쉬프는 지난해 한국 공연을 앞두고 자신의 소신을 이렇게 밝혔다. 그는 프로그램을 공개하지 않는 ‘깜깜이 연주’로 유명하다. 특정 곡목을 미리 발표하고 순서대로 연주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당일 공연장 음향 상태, 피아노 컨디션, 관중 숫자 등을 고려해 연주 전 레퍼토리를 확정한다. 그리고 현장에서 직접 곡목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공연을 진행한다.
그는 “보통의 음악가들은 2~3년 전 프로그램을 정하는데, 그것은 2~3년 후 저녁을 무엇으로 먹을지 미리 정하는 것과 같다”라며 자신은 서프라이즈를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다만 곡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해주려고 해설과 연주를 동시에 진행하는 ‘렉처 콘서트’ 형식을 따른다. 지난해에는 피아니스트 박재홍이 깜짝 통역을 맡았다. 쉬프는 연주를 시작하기에 앞서 작곡가와 음악을 친절하게 소개했다. 이 곡에는 어떤 포인트가 있는지 직접 건반을 눌러가며 설명하기도 했다.
쉬프는 오스트리아 황실의 공식 피아노 ‘뵈젠도르퍼’의 열광적인 팬이다. 뵈젠도르퍼는 오스트리아 장인들의 섬세한 수작업으로 1년에 약 300대만 생산되는 프리미엄 피아노 브랜드다. 연주자들이 더욱 다양한 음악을 표현할 수 있도록 저음부 건반이 더 많은 92 건반, 97 건반 피아노를 유일하게 제작하고 있다.
무대에서 쉬프가 특별히 사랑하는 뵈젠도르퍼 모델은 가로 157cm, 세로 280cm의 280VC다. ‘Vienna Concert’의 약자를 붙인 이름이 암시하듯 개발단계부터 빈의 정통적인 사운드를 표방한다.
“진정 노래하는 악기라고 할 수 있죠. 건반의 반응이 즉각적이면서도 정교하니까 피아니스트 입장에선 연주하는 재미를 한층 더 느낄 수 있습니다. 공명이 놀랍도록 따뜻하고 투명합니다. 여러 성부가 층층이 쌓인 바흐의 다성 음악을 연주할 땐 개별 성부를 명료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장점입니다. 슈베르트를 연주할 때도 다른 악기보다 훨씬 더 훌륭합니다. 피아니시모의 음영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표현할 수 있으니까요. 더 부드럽고 더 우울한 음색이 뵈젠도르퍼에선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는 지난해 롯데콘서트홀 리사이틀에서도 뵈젠도르퍼를 연주했다. 쉬프는 늘 전속 조율사와 함께 투어를 하는데 작년에도 최상의 소리를 내기 위해 280VC 모델을 세심하게 조율했다. 쉬프가 뵈젠도르퍼를 선호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저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존중합니다. 하지만 세계 대부분의 콘서트홀을 이 피아노가 독점하는 것은 부당하고 생각합니다. 한 종류의 악기로 모든 레퍼토리를 연주해 버리니까 아무리 피아니스트가 여럿이라도 소리가 비슷해져 개성을 구별하기 힘들잖아요. 이건 세계화의 폭력과 다름없습니다. 악기로부터 비롯되는 사운드의 다양성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피아니스트들의 피아니스트’ 쉬프가 지난해에 이어 다시 한국 무대를 찾는다. 오는 10월 서울, 부산, 수원에서 팬들을 만난다. ‘깜깜이 프로그램’ ‘뵈젠도르퍼의 마법’이 다시 펼쳐진다.
헝가리 출신의 쉬프(1953년생)는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명으로 꼽힌다. 5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1970년대에 차이콥스키 국제 음악 콩쿠르(1974년) 4위,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1975년) 공동3위 등 권위 있는 콩쿠르에서 수상하며 국제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차이콥스키 콩쿠르 결선에서는 정명훈(2위 수상)과 겨뤘다.
작품 전체를 조망하는 통찰력과 그 안에서 자신의 음악적 개성을 드러내는 연주로 정평이 나 있는 쉬프는 음반작업에도 꾸준한 열정을 보였다. 그의 ‘바흐: 영국 모음곡’ 음반은 최우수 클래식 기악 독주 부문에서 그래미상을 수상하며 큰 영예를 안았다. 이 외에도 그가 발표한 베토벤, 쇼팽, 슈만 등의 작품을 담은 수많은 명반들은 현재까지도 클래식음악계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누구든지 안드라스 쉬프의 연주를 듣는 순간, 그는 완전무결함을 갈구하는 아티스트이자, 거장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피아니스트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뉴욕 타임즈의 이런 극찬처럼 그는 ‘바흐 해석의 권위자’ ‘피아니스트들의 교과서’ 등 수많은 애칭을 가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믿고 가는 안드라스 쉬프’로 통하며 큰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 쉬프는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레퍼토리를 자랑하며, 정확하고 세밀한 분석과 타건, 투명한 빛깔의 음색으로 세계 관중들에게 무한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특히 음악에 대한 애정으로 충만한 그의 공연은 관객들의 마음을 매번 사로잡는다. 단순히 기교적인 부분만이 아닌, 음악사 안에서 특정 사조, 특정 작곡가, 특정 작품이 지닌 특성을 연주에 녹여내는 쉬프는 화려함보다는 그가 추구하는 음악의 정수를 담백하고 따뜻하게, 그러나 그 누구보다 완벽한 연주로 구현해내는 데 집중하며 듣는 이를 한 순간에 매혹시킨다.
이번 내한 투어는 서울 예술의전당(10월3일 오후 5시)을 시작으로 부산문화회관(10월4일 오후 7시30분), 경기아트센터(10월6일 오후 7시30분)에서 이어진다. 이번에는 어떤 프로그램으로 한국 관객들을 찾아올지 벌써부터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안드라스 쉬프 피아노 리사이틀-서울’의 티켓은 예술의전당, 인터파크 티켓을 통해 예매 가능하다. 가격은 R석 16만원, S석 12만원, A석 9만원, B석 6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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