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마지막 음 놓치지 않으려 관객 모두 얼음...안드라스 쉬프 ‘30초 마법’

건반서 손 뗐지만 슈베르트 소나타 20번 깊은 울림
앙코르만 무려 4곡 ‘역대급 리사이틀’ 화끈 팬서비스
부소니 콩쿠르 우승자 박재홍은 ‘특급통역’ 어시스트

박정옥 기자 승인 2022.11.08 17:11 | 최종 수정 2022.11.09 08:31 의견 0
‘피아니스트들의 피아니스트’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안드라스 쉬프가 6일 롯데콘서트홀 리사이틀을 마친 뒤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올해 69세의 피아니스트는 피날레곡으로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20번’을 선택했다. 31년의 짧은 생을 살다간 불행했던 남자가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에 완성한 3편의 연작 소나타(19번·20번·21번) 중 하나다. 안드라스 쉬프는 이 곡 하나로 자신의 이름 앞에 ‘피아니스트들의 피아니스트’라는 수식어가 왜 붙는지 확실하게 증명했다.

열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슬픔이 흘러내렸다. 이태원 참사의 아픔도 오버랩됐다. 강하게 몰아친 셋잇단음표의 펼침 화음은 가슴을 두드렸고(1악장), 애수에 찬 선율은 마음에 하얀 서리를 내렸다(2악장). 아주 잠시 동안 3악장은 밝고 활기찼다. 어둠 속에서도 꽃은 피어나듯 살짝 희망을 보여주고는 금세 시들어버렸다.

결국 4악장에서 왈칵 서글픔이 밀려왔다. 손은 이미 건반을 떠났지만 마지막 음이 30초 넘게 이어졌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계속되는 마법의 소리에 넋을 잃었다. 숨이라도 쉬면 마지막 음이 달아날 것 같아 그냥 참았다. 깊은 울림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모두 얼음이 됐다.

안드라스 쉬프는 6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리사이틀에서 완벽을 뛰어넘은 성역(聖域)의 경지를 보여줬다. 인터미션과 앙코르를 포함해 무려 4시간을 내달렸다. 1953년생임에도 ‘에너자이너 쉬프’였다.

‘피아니스트들의 피아니스트’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안드라스 쉬프가 피아니스트 박재홍과 호흡을 맞춰 렉처 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저는 자유와 즉흥의 힘을 믿습니다. 관객들이 어떤 곡을 듣게 될지 미리 공지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놀라움도 공연의 한 요소입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저는 더욱 자유로워짐을 느낍니다. 공연도 더욱 새로워지고요.”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쉬프는 프로그램을 공개하지 않는 ‘깜깜이 연주’를 선보였다. 특정 곡목을 미리 발표하고 순서대로 연주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당일 공연장 음향 상태, 피아노 컨디션, 관중 숫자 등을 고려해 연주 전 레퍼토리를 확정한다. 그리고 현장에서 직접 곡목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공연을 진행했다.

그는 “보통의 음악가들은 2~3년 전 프로그램을 정하는데, 그것은 2~3년 후 저녁을 무엇으로 먹을지 미리 정하는 것과 같다”라며 자신은 서프라이즈를 좋아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곡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해주려고 해설과 연주를 동시에 진행하는 ‘렉처 콘서트’ 형식을 따른다. 피아니스트 박재홍이 통역을 맡았다. 연주를 시작하기에 앞서 작곡가와 음악을 친절하게 소개했다. 이 곡에는 어떤 포인트가 있는지 직접 건반을 눌러가며 설명하기도 했다.

1부 오프닝은 역시 바흐였다. 쉬프를 따라다니는 또 다른 수식어는 ‘바흐 해석의 권위자’다. 매일 1시간 이상 바흐의 연주로 아침을 시작한다고 고백했다. 쉬프는 “마음을 정갈히 하고 영혼과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 바흐의 연주로 아침을 시작하고 있다”며 “바흐는 가장 위대하면서도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인물이다”라고 말했다. 첫 번째 곡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 988’에 이어 두 번째 곡 ‘프랑스 모음곡 5번’을 연주했다. 이어 모차르트 ‘지그 G장조, K.574’,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 32번’,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7번, K.570’,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를 들려줬다. 2부에서 모차르트 ‘론도 a단조, K. 511’,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0번’을 연주했다.

앙코르는 무려 4곡을 선사했다. 끝까지 남아 박수를 친 관객들에게 제대로 서비스를 했다. 브람스 ‘인터메조 A장조, Op.118’,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6번, K.545’ 1악장을 들려줬다. 그리고는 바흐 ‘이탈리아 협주곡 F장조, BWV 971’ 1악장을 연주했는데, 다시 천천히 걸어 나와 2악장을 마저 연주했다. 오후 5시에 시작한 공연은 마지막 곡이 끝나자 거의 9시가 됐다. 역대급 공연의 멋진 피날레다.

<에필로그1> ‘부소니 콩쿠르 우승자’ 박재홍의 특급통역

‘피아니스트들의 피아니스트’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안드라스 쉬프가 렉처 콘서트 통역을 맡은 피아니스트 박재홍의 손을 잡고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오늘날의 청중들은 50년 전보다 음악에 대한 교육과 정보가 더욱 적은 세대입니다. 학교에서 음악적인 훈련을 받는 경우가 거의 없고, 가정에서도 역시 매우 적은 음악을 경험하며 자랍니다. 베토벤 소나타를 처음 듣는다는 것은 어려운 여정일 수 있습니다. 뒤로 가만히 앉아서만은 즐기기 쉽지 않죠. 아름다운 곡이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그에 맞는 적절한 도움과 정보가 필요합니다. 프로그램북 속 해설지에 맡기기보다 연주자가 직접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낫다고 봤습니다. 공연 중 관객들은 프로그램북을 읽기보다 음악을 들어야 합니다.”

쉬프 공연의 특징은 강연과 연주를 동시에 선보이는 ‘렉처 콘서트’다. 피아니스트 박재홍은 이날 공연에서 통역자로 나섰다. 처음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지금까지 남들 앞에서 연주만 했지, 직접 마이크를 들고 말을 옮긴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지난해 세계적 권위의 부소니 콩쿠르에서 우승한 박재홍은 쉬프의 연주 의도를 족집게처럼 잡아내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오히려 영어보다 더 자세하게 의역해 관객의 음악 감상을 도왔다. 진정한 인터프리터(interpreter)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연주를 하는 동안에도 꼼짝없이 무대에 있어야 하는 부담스러운 시선을 견디며 특급 도우미 실력을 뽐냈다.

박재홍은 “쉬프 선생님을 도우며 같은 무대에 설수 있어 큰 영광이었다. 처음으로 해 보는 통역이었기에 실수와 부족한 점은 아쉬웠지만, 대가의 연주를 이렇게 가까이서 들어볼 수 있었던 시간 자체가 큰 배움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에필로그2> 쉬프의 ‘뵈젠도르퍼’ 사랑

‘피아니스트들의 피아니스트’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안드라스 쉬프가 건반을 치면서 연주할 곡의 감상포인트를 짚어 주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쉬프는 오스트리아 황실의 공식 피아노 ‘뵈젠도르퍼’의 열광적인 팬이다. 기존 피아노보다 저음역 건반이 더 늘어난 임페리얼 그랜드를 오랫동안 보유하고 있는데, 최근엔 마호가니 나무로 만든 독특한 외양의 그랜드 피아노를 하나 더 장만했다. 제작 과정에 쉬프의 음악적 성향이 충실히 반영됐다고 한다.

뵈젠도르퍼는 오스트리아 장인들의 섬세한 수작업으로 1년에 약 300대만 생산되는 프리미엄 피아노 브랜드다. 연주자들이 더욱 다양한 음악을 표현할 수 있도록 저음부 건반이 더 많은 92 건반, 97 건반 피아노를 유일하게 제작하고 있다.

이 피아노는 차별화된 디자인을 위해 고급 베니어 사용, 독자적인 저음부 현으로 따뜻한 음색을 선사하며 공명 케이스 원리를 채택해 풍성한 울림을 제공한다. 연륜을 갖춘 기술자들이 한 대 한 대 충분한 시간을 들여 탄생시키는 예술품이다.

무대에서 쉬프가 특별히 사랑하는 뵈젠도르퍼 모델은 가로 157cm, 세로 280cm의 280VC다. ‘Vienna Concert’의 약자를 붙인 이름이 암시하듯 개발단계부터 빈의 정통적인 사운드를 표방한다.

“진정 노래하는 악기라고 할 수 있죠. 건반의 반응이 즉각적이면서도 정교하니까 피아니스트 입장에선 연주하는 재미를 한층 더 느낄 수 있습니다. 공명이 놀랍도록 따뜻하고 투명합니다. 여러 성부가 층층이 쌓인 바흐의 다성 음악을 연주할 땐 개별 성부를 명료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장점입니다. 슈베르트를 연주할 때도 다른 악기보다 훨씬 더 훌륭합니다. 피아니시모의 음영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표현할 수 있으니까요. 더 부드럽고 더 우울한 음색이 뵈젠도르퍼에선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아쉽게도 롯데콘서트홀에는 뵈젠도르퍼가 없다. 그래서 야마하뮤직코리아가 협찬을 해줬다. 쉬프는 늘 전속 조율사와 함께 투어를 하는데 이번에도 최상의 소리를 내기 위해 280VC 모델을 세심하게 조율했다. 쉬프가 뵈젠도르퍼를 선호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저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존중합니다. 하지만 세계 대부분의 콘서트홀을 이 피아노가 독점하는 것은 부당하고 생각합니다. 한 종류의 악기로 모든 레퍼토리를 연주해 버리니까 아무리 피아니스트가 여럿이라도 소리가 비슷해져 개성을 구별하기 힘들잖아요. 이건 세계화의 폭력과 다름없습니다. 악기로부터 비롯되는 사운드의 다양성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park72@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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