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책 표지가 강렬하다. 선연한 붉은빛이 가득하다. 그 붉은빛을 더 돋보이게 해주는 짙은 오렌지색과 검정 수술·암술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표지 4분의 3정도를 꽉 채우고 있다. 미국의 여류화가 조지아 오키프(1887~1986)가 그린 ‘양귀비’다. “손에 꽃 한 송이를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순간만큼은 그 꽃이 당신의 우주다.” 꽃에서 자신의 우주를 발견한 오키프의 혜안(慧眼)이 가슴을 파고 든다.
그 아래에 ‘매혹하는 미술관’(아트북스·312쪽·1만8000원)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다. 작은 부제도 붙어있다. ‘내 삶을 어루만져준 12인의 예술가’다. 이 책을 쓴 송정희는 뒤늦게 미술에 매혹돼 제주에 갤러리를 열고 작가와 컬렉터를 연결하며 전시를 기획하는 갤러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10년 동안 영자 신문 ‘제주위클리’를 발행해 제주도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데 힘쓰기도 했다. 제주 출신 미술가 변시지(1926~2013)의 특별전 기획을 계기로 갤러리스트로 전향한 그가 ‘지역’과 ‘미술’ 사이에 작은 다리들을 잇는 과정은 어두운 주변을 더듬으며 한 발 한 발 내딛는 어렵고도 낯선 여정이었다.
‘매혹하는 미술관’은 그 힘든 순간마다 송정희를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운 예술가 열두 명과 그들의 삶과 작품에 자신을 반추하며 앞으로 나아간 지은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 속 예술가들은 모두 여성이다. 같은 여성으로서 비슷한 시련을 겪었고, 기존의 관습을 깨뜨리며 자신의 길을 만들어간 삶의 궤적에 공통점이 많기 때문에 일부러 여성을 선택했다.
조지아 오키프, 마리 로랑생, 천경자, 수잔 발라동, 키키 드 몽파르나스, 카미유 클로델, 판위량, 마리기유민 브누아, 프리다 칼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케테 콜비츠, 루이스 부르주아.
책에서 다루는 이 열두 명의 미술가들은 가족과 얽힌 폭력과 트라우마, 강렬한 사랑이 불러온 깊은 상처, 비극적인 사고, 사회적 장벽 등을 마주해야 했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예술로써 말했고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새겼다. 굴곡진 인생사가 아니더라도 생명력 넘치고 혁신적인 이들의 작품은 그 자체로 우리의 시선을 오래 붙잡는다. 미술과 단단히 사랑에 빠진 지은이가 안내하는 아름다움과 기이함, 고통과 환희가 함께하는 ‘매혹하는 미술관’으로 들어가면 금세 시간이 지나간다.
책은 모두 네 장으로 구성됐다. ‘아름다움, 그 너머’는 화려한 그림 뒤에 아픔과 고독을 숨긴 작가들을 다룬다. 대담하게 확대한 꽃 그림으로 데뷔부터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후기에는 뉴멕시코 사막에서 구도자의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 조지아 오키프. 외롭고 힘들었던 삶과 대조되는, 색색의 물감과 광기로 형형한 눈빛이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림을 그린 천경자, 여인들이 서로 친밀하게 쓰다듬거나 이야기하는 파스텔톤의 고유한 화풍을 고집해 ‘잊히지 않은 여인’으로 남은 마리 로랑생의 삶과 예술 이야기가 펼쳐진다.
‘뮤즈에서 예술가로’에서는 남성 예술가들의 모델 혹은 조수에서 예술가가 된 뚝심 있고 용감한 여성들을 만난다. 르누아르의 아름다운 소녀로서 그림 속에 살기보다는 화가로 살기를 선택하며 프랑스국립예술협회 최초 여성 회원이자 살롱전 참가자로 이름을 남긴 수잔 발라동, 만 레이의 모델로 유명했던 한편 헤밍웨이가 서문을 바친 회고록의 저자이자 첫 전시회에서 모든 작품을 판매한 재능 있는 예술가 키키 드 몽파르나스, 로댕을 열렬히 사랑했지만 작품에서만큼은 그의 그늘을 벗어나 당당하게 실력을 인정받고자 했던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의 새로운 얼굴을 만난다.
‘몸을 통해, 몸을 위해’는 자유와 억압, 자기와 타자, 사적이면서 공적인 공간이 교차하는 ‘몸’에 대한 사유를 작품으로 풀어낸 미술가를 소개한다. 중국 초기 현대화 운동에서 여성 미술가로는 드물게 미술대학 교수까지 지낸 판위량은 어릴 적 몸종으로 팔려가 창기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동양 여성에 대한 관음증적 시선을 전복하는 누드화를 그렸다. 프리다 칼로는 민족적 전통과 서구 미술의 전통, 장애를 가진 몸과 넘치는 에너지, 혁명가의 심장과 예술가의 자아 사이에서 복잡하게 요동치는 내면을 신화와 환상과 실제가 뒤엉킨 그림으로 표현했으며, 신고전주의 화가 마리기유민 브누아는 오늘날까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마들렌의 초상’을 남겨 하나의 몸을 둘러싼 시대적 맥락이 얼마나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회복과 치유의 약속’에서는 고통으로 출발해 회복과 치유를 종착지로 삼는 작품을 창작한 예술가를 만난다. 퍼포먼스에 임할 때는 누구보다 대담하게 뛰어들어 관람객에게 형언할 수 없는 경험과 에너지를 전하는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한 연대와 저항의 메시지를 담아 판화를 제작한 케테 콜비츠, 개인적 고통을 반영한 난해하고 다면적인 작품으로 재생과 회복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세계를 짚으며, 이들의 파격적 작업이 고통의 전시 혹은 고발을 위한 것이 아니라 화해와 이해를 위한 예술적 실천임을 말해준다.
이 책을 단박에 읽게 해주는 독서의 매혹 포인트가 세 가지 있다. 먼저 당대를 대표하는 여성 미술가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열두 명의 미술가 중 열 명의 활동 시기가 19세기 말~20세기 초중반에 걸쳐 있다. 문화가 꽃피며 실험적인 예술사조가 속속 등장하는 한편, 전쟁으로 향해가는 유럽의 정세가 예술가들의 심리를 잠식한 시기. 이러한 불안 속에서 여성 미술가들이 견지했던 주제의식과 그 평가를 두루 살펴본다.
두 번째 포인트는 선명한 도판으로 현대미술을 만난다는 점이다. 조지아 오키프의 ‘검은 붓꽃 III’을 비롯한 회화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 사진들, 천경자의 ‘생태’ ‘황금의 비’ 등 매혹적인 미술가 12인의 작품 80여 점을 생생한 컬러 도판으로 만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와 공감하는 미술 입문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갤러리스트이자 컬렉터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미술 애호가라는 정체성으로 바라보는 지은이는 진심으로 미술을 사랑하고 미술의 매력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미술은 ‘아무리 탐색해도 영원히 가닿을 수 없는 미지의 세계’라는 지은이의 말이 미술에 입문한 독자들을 위로하고 응원한다.
“이 땅에 꽃이 피고, 내 마음속에 환상이 사는 이상, 나는 어떤 비극에도 지치지 않고 살고 싶어질 것이다.”--천경자
독자들은 이 책에서 가족, 사랑, 우정, 커리어 등 현실적인 문제와 씨름하면서도 결국 자신만의 우주를 작품으로 탄생시킨 여성 예술가들의 당당함은 물론이고, 그들이 품었던 치열한 질투와 분노의 감정도 만날 수 있다.
송정희는 “열두 명 작가들이 살아낸 고된 삶과 화려한 작품 사이의 괴리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며, 그로부터 큰 위안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지은이가 예술에 빠져 미술을 업으로 삼게 된 것도 미술이 이러한 다양한 삶의 모습을 모두 포용하기 때문이었다.
매혹은 머리보다는 마음으로 작동한다.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한다고 일컬어지는 그림보다는 내가 처한 상황에서 마음에 불쑥 들어오는 그림이 더 깊숙이 남는다. 그렇게 남은 잔상을 따라 예술가의 삶에 다가가다 보면 결국 그 세계에 매혹된다.
지은이는 이 과정을 ‘사랑하게 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조선의 문장가 유한준의 말로 표현한다. 낯설고도 매혹적인 작품이 가득 걸린, ‘매혹하는 미술관’에서 예술가 열두 명의 마음과 접속해보자. 새로운 세계가 일상의 크고 작은 슬픔을 치유해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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