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타이타닉’ 속 찬송가 앙코르 연주...강유리 “왜 음악을 하는가 깨우쳐준 곡” 고백
베토벤 3번·프로코피예프 2번 등 선사
‘살짝 낯선 바이올린 소나타’ 감동선율
민은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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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7 17:53 | 최종 수정 2023.10.06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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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고등학교 때 영화 ‘타이타닉’을 봤어요. 바이올린을 하면서 ‘나는 왜 음악을 하는가’라는 고민에 빠졌을 때였죠. 침몰하는 배에서 현악사중주 팀이 탈출하는데, 퍼스트 바이올리니스트가 떠나지 않고 찬송가를 연주해요. 그 음악 소리를 듣고는 다른 연주자들도 돌아와 함께 연주를 하잖아요. 힘들 때마다 그 장면을 생각합니다.”
바이올리니스트 강유리는 프로그램에 나와 있는 4곡을 모두 마친 뒤 앙코르로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을 들려줬다. 타이타닉에 타고 있던 현악사중주가 연주했던 노래다. 음악이 자신에게 살아가는 힘을 주는 존재였음을 깨닫게 된 순간을 고백하며, 한음 한음 정성을 들여 활을 그었다. 울컥한 감정을 속으로 숨기려 애썼지만 감은 두눈엔 묵묵히 바이올린의 길을 가겠다는 강한 다짐이 흘렀다.
25일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강유리의 리사이틀이 열렸다. 피아니스트 이선영이 호흡을 맞췄다. 프로그램이 살짝 낯설어 좋았다. 늘 듣던 ‘그 밥에 그 나물’이 아니라, 무대에서 자주 듣지 않은 곡으로 준비했다. 강유리는 직접 마이크를 들고 나와 친절하게 곡을 설명해줬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굉장히 떨렸는데 박수 소리를 듣고 나니 기운이 난다”며 “긴장을 풀려고 해설을 곁들였는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에이미 비치(1867~1944)는 미국 여성 작곡가 최초로 교향곡(게일교향곡)을 작곡한 주인공이다. 강유리는 비치가 남긴 소품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로망스(Op.23)’를 첫 곡으로 선택했다. “피아니스트로서도 뛰어난 실력을 갖춘 비치의 솜씨가 그대로 투영된 곡이다. 우리를 애틋하고 풋풋한 감정 속으로 안내하는 매력이 넘친다”며 케러멜 마키아토 같은 달달한 선율을 풀어 놓았다. 전체적으로 낭만적인 분위기가 주도하지만 갑작스러운 음의 도약이 액센트로 작용하며 살짝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풍성한 독창성이 귀호강을 선사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은 모두 10개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남겼다. 5번(봄)·9번(크로이처)·10번 등이 자주 연주되는데, 강유리는 ‘3번 내림E장조(Op.12 No.3)’를 들려줬다. 베토벤이 청각을 상실하기 전에 작곡돼 밝고 경쾌하다. “열정적인 드라마틱 요소가 곳곳에 숨어 있다. 그것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감상팁을 줬다. 열일곱 살 소년소녀의 싱그러움과 풋풋함이 느껴지는 곡이다.
1악장은 썸을 타듯 가벼웠다. 2악장은 강유리와 이선영의 티키타카가 빛났다. 피아노가 슬쩍 말을 붙였는데 바이올린은 무엇에 화가 났는지 눈을 흘긴다. 토라진 여친을 달래는 마음이 가득하다. 3악장에서 소년과 소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맞잡았다. 살짝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흥겨움에 몸을 맡겼다. 로코드라마 한편 본 듯한 느낌이다. 곡을 마치고 강유리는 ‘휴~’ 숨을 토해냈다.
프리츠 크라이슬러(1875~1962)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사랑의 기쁨’ ‘사랑의 슬픔’ 등을 쓴 작곡가로도 유명하다. 강유리는 그의 작품 가운데 ‘중국의 탬버린(Op.3)’을 연주했다. ‘중국의 북’으로도 번역된다. “나는 이 곡을 쓰는 것이 매우 즐거웠고, 이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중국 극장을 방문한 후에 떠올랐다. 그곳의 음악이 어떤 주제를 암시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 방식으로 자유로운 판타지를 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크라이슬러는 이렇게 작곡 과정을 밝혔다. 이국적 이미지가 강하다. 즐겁고 유쾌하다. 속사포 랩이 떠오르기도 한다. 강유리의 현을 타고 어느새 우리 몸은 상상의 세계 또는 머나먼 땅으로 날아갔다.
마지막 곡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1891~1953)의 ‘바이올린 소나타 2번 D장조(Op.94a)’. 프로코피예프는 세계대전으로 인한 혼란을 온몸으로 맞서며 독특한 음악적 사고와 표현의 예술세계를 확립했다. 2차 대전 당시 소련의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우랄산맥으로 피신한 그는 ‘플루트 소나타(Op.94)’를 작곡했는데, 다비드 오이스트라흐가 이 작품을 마음에 들어 하자 바이올린 곡으로 편곡했다.
강유리는 “무엇인가 때려 부수는 모습 또는 와장창 깨지는 화음과 리듬이 강하다”라며 “더블스탑이나 피치카토 등 바이올린의 기교를 첨가해 더욱 화려하고 풍부하다”고 설명했다. 활의 줄이 몇 가닥 끊어질 정도로 2악장의 보잉은 활기찼고, 3악장은 애틋했다. 전체적으로 우아함과 기품을 충만하게 잘 전달했고,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선율도 귀를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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