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송인호 객원기자] 안동은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로 젖어가고 있었다. 길 위의 낙엽들은 바짝 마른 거친 몸을 뉘어 아무런 저항 없이 빗물을 맞았다. 온기가 아쉽다. 따뜻한 차 한잔이 생각난다. 그 향기 끝에 묻어나는 피아노 선율이 그립다. 항상 가을이 끝나갈 때쯤, 점점 앙상해져 가는 나무를 보면서 듣는 음악이 바로 쇼팽의 녹턴이다. 녹턴은 때 묻은 영혼의 흔적마저 지워버린다.
피아니스트 양성원도 똑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그는 지난 11월 16일 안동문화예술의전당 웅부홀에서 첼리스트 송영훈, 바이올리니스 김다미와 함께 ‘비르투오소들의 조우’라는 제목으로 공연했다.
그가 연주한 첫 곡은 ‘Nocturne in C Sharp Minor(Op.Posth)’, 바로 ‘녹턴 20번’이다. 나지막이 객석 사이 사이로 퍼져나가는 선율은 전율로 옮겨왔다. 이 짜릿함을 무엇으로 표현할까. 음악을 들으러 2시간 넘게 달려온 팬의 심장을 멎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녹턴은 나이 변화에 따라 다 다르게 들린다. 또 계절에 따라 다 다르게 들린다. 건반을 누르는 양성원의 한 음 한 음을 따라 희로애락이 겹쳐진다.
특히 이 녹턴은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연주된 곡으로 유명하다. 전쟁의 폐허 속에 부서진 가정집 2층에 숨어있던 한 남자의 어깨너머로 피아노가 보이고, 이 녹턴의 첫 도입부가 연주되는 장면은 가히 최고의 신(scene)이다. 도입부의 선율은 잔잔히 흘러가는 강물에 반짝이는 은빛처럼 빛난다. 그러면 모든 것이 무장해제 된다. 그렇게 4분 20초의 짧은 시간이 4시간의 감동으로 늘려지는 순간이었다.
이어 연주한 슈베르트의 ‘Impromptu No.3 in G Flat Major(Op.90 D.899)’도 우리에게 익숙한 곡이다. 앞서 녹턴을 차분하게 들려줬다면 이번 즉흥곡은 살짝 분위기를 띄우는 쪽이다. 건반 위의 현란한 테크닉을 통해 화려한 음이 펼쳐졌다. 작품 번호 D.899에는 4곡이 있다. 오늘 연주한 곡은 3번이다. 4번이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3번도 많이 연주된다. 가을 끝나가는 시점에 딱 어울리는 선곡이다. 앞서 녹턴에서 준 감동이 이어졌다.
양성원은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음대와 뒤셀도르프 국립음대 최고연주자 과정을 최우수로 졸업했다. 프랑스 리옹국제콩쿠르를 비롯해 여러 콩쿠르에서 각종 상을 수상했다. 독일, 체코, 이탈리아, 중국, 그리고 한국의 국립심포니, 대구시향, 광주시향 등 국내외 최고의 협연 무대를 장식했다. 정통 독일 피아니즘의 계승자인 게하르트 오피츠로부터 섬세하고 정교한 연주력을 갖춘 빼어난 피아니스트라고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다음 무대는 양성원과 바이올리니스트 김다미의 듀엣이다. 김다미는 커티스음악원과 뉴잉글랜드콘서바토리 그리고 크론베르크를 거쳐 뉴욕주립대 박사과정을 했다. 5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켜 온 그는 여러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머쥐며 두각을 나타낸 뛰어난 음악가다. 그의 연주는 부드러움과 날카로움을 동시에 표현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이번 듀엣에서는 크라이슬러의 ‘Leivesleid’를 선보였다. ‘사랑의 슬픔’으로 번역되는 이 작품은 크라이슬러의 또 다른 작품 ‘Liebesfreud(사랑의 기쁨)’과 함께 자주 연주된다. ‘Leivesleid’는 이 새침한 가을에 어울리는 곡이다. 김다미는 우수에 젖은 곡을 섬세하면서도 부드럽게 풀어나갔다. 양성원의 피아노 선율과 만난 연주는 조금씩 조금씩 비밀을 풀어 나가는 느낌이었다.
이어 프랑스의 오페라 작곡가 마스네의 ‘Thais Meditation’이 연주됐다. 가을의 서정이 더 잘 녹아들었다. ‘타이스 명상곡’은 마스네의 뛰어난 음악성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바이올린곡으로 편곡돼 많은 연주가들이 애호하는 곡이다. 원래 오페라 ‘타이스’에서 2막 1장과 2장 사이에 연주되는 막간 음악이다. 관현악곡인 이 곡을 편곡해 바이올린 독주곡으로 만든 것으로 서정적이며 우아한 선율이 아름답다.
다음은 첼리스트 송영훈과 함께 하는 시간. 송영훈은 라디오 클래식 방송의 진행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따뜻한 목소리와 그의 첼로 음색은 잘 맞아떨어져 이 가을을 더 낭만적으로 만들었다. 송영훈은 영국 왕립 노던음악원과 시벨리우스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아홉 살에 서울시향과 협연하면서 데뷔한 영재다.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통해 실력을 과시했다.
송영훈과 양성원 듀엣은 슈만의 ‘Fantasiestücke(Op.73)’를 들려줬다. 슈만은 1849년 2월 단 이틀 만에 이 ‘환상소곡집’을 썼다고 한다. 원래는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곡으로 작곡했는데 작곡노트에 클라리넷 부분을 바이올린이나 첼로로도 연주할 수 있다고 적었다. 처음엔 ‘Soirée Pieces(야회곡)’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나중에 지금의 제목으로 바꿨다.
총 3곡으로 구성됐는데 제목처럼 부드럽고 몽환적인 느낌으로 시작했다. 프로그램 노트에 ‘Zart und mit Ausdruck(부드럽고 표현력 있음)’이라고 적혀 있는 것처럼 은근함과 달콤함이 섞여 있는 연주였다. 곧이어 ‘Lebhaft, leicht(활기찬, 가벼운)’, ‘Rasch und mit Feuer(빠르고 불타오르는)’ 곡으로 이어지는 송영훈의 표현력은 가을밤의 정점을 찍는 순간이었다. 피아노와 첼로의 완벽한 조합이다.
마지막 대미는 세 사람이 베토벤의 Piano Trio in D Major(Op.70 No.1) ’Ghost‘로 장식했다. 1808년 여름에 빈 근교의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두 개의 피아노 트리오를 작곡했으며 그중 하나다. 모두 3악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 ‘유령’이라는 제목은 2악장에 붙어 있다. 약간 느리면서 장중한 느낌을 주어서 그런지 이 곡 전체를 ‘고스트 트리오’로 부르기도 한다.
1악장은 ‘알레그로’답게 빠른 템포로 경쾌하게 시작하고 활기차게 마무리했다. 2악장은 변화무쌍했다. 지시어 ‘라르고’처럼 먼저 첼로와 바이올린이 느릿하게 시작한다. 뒤이어 피아노의 맑은 선율은 마치 딴 세계에 와 있는 듯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오래된 정원을 느릿하게 걷는 느낌이다. 오후의 햇빛은 눈 속을 비집고 들어와 숨을 헐떡이는 것 같다. 침묵하지만 가끔 탄식을 내뱉는 소리의 움직임은 우리를 알 수 없는 곳으로 이끌어 갔다. 아름답다. 하지만 슬프다. 베토벤은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2악장에서 넘어온 3악장은 ‘프레스토’로 점점 빨라진다. 마치 이 가을이 다 끝났다는 뜻으로 모든 시간을 다 쓸어가 버리는 듯 몰아쳐 나간다. 그렇게 가을은 끝나가고 있었다. 곧 길고 긴 침묵의 겨울이 오겠지. 일시에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다. 세 사람의 호흡은 완벽함을 이뤘다. 어느 하나 군더더기 없는 선율들이 비 내리는 가을밤의 감성을 그대로 가슴 깊이 박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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