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인연1, 한상완과 이재석. 지난 2019년 11월, 저 멀리 보이는 한라산 자락이 가을빛으로 물들던 날이다. 우강(友江) 한상완은 제주에서 열린 ‘늘푸른음악회’에 초대받아 참석했다. 한국 가곡을 주로 무대에 올리는 콘서트였다.
공연이 끝난 뒤 뒤풀이 모임에 갔는데, 바로 옆에 범계(凡溪) 이재석 작곡가가 앉았다. 첫 만남이었다. 나이를 묻고 대답하면서 깜짝 놀랐다. 1941년생 뱀띠였고 생일도 12월로 같았다. 한상완이 “저는 12월3일인데 12월 며칠이십니까”라고 묻자, 이재석은 “1주일 늦은 10일입니다”라고 말했다. 요즘 말로 민증을 깠으니 서열은 단박에 정리됐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로 서로 ‘갑장 형’ ‘갑장 아우’하기로 하면서 다정한 벗이 됐다. 도원결의에 버금가는 제주결의가 이뤄진 것. 갑장(甲長)은 육십갑자가 같다는 뜻으로, 같은 나이 또는 나이가 같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한상완은 시를 쓰고 이재석은 작곡을 한다. 어느 날 음악회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장 아우’가 불쑥 제안을 했다. “형님이 쓴 시 중에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의 시 3편씩 모두 12편을 골라주면 곡을 써볼게요.” ‘갑장 형’은 흔쾌히 동의하고, 이미 완성한 것과 새로 창작한 것에서 12개의 작품을 선택해 전달했다.
열두 편의 시는 다섯 달이 채 되기도 전에 작곡을 마치고 노래가 됐다.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해 곡을 쓴 것. 아우는 한발 더 나아가 이를 예술 가곡집으로 묶어 출판하자고 말했다. 그래서 우정이 깃든 아름다운 가곡집 ‘갑장의 시와 노래’(현장24·2만원)가 탄생했다.
한상완은 “우리 두 사람 전생의 인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며 기뻤다. 동생을 만난 저의 삶은 축복이다”며 환하게 웃었다.
#인연2, 한상완과 김조자. 2019년 8월 늦더위가 한창인 때, 한상완은 인천 서구에서 열린 ‘정서진 피크닉클래식-작곡가 김효근의 아트팝’ 콘서트에 갔다. 소프라노 김순영과 테너 김승직이 체임버 앙상블에 맞춰 김효근의 가곡을 연주하는 음악회였다.
직접 곡 해설을 하던 김효근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중간 중간 퀴즈를 냈고, 이를 맞히면 음반을 선물했다. 문제가 나오자 한상완을 비롯해 몇 사람이 손을 번쩍 들었다. 김효근은 최연장자에게 답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한상완이 호기롭게 41년생이라고 하자, 저쪽에 있던 한 여자 분도 41년생이라고 하는 것 아닌가. 이제 태어난 달로 결정해야했다. 여자 분은 3월생, 한상완보다 아홉 달이 빨랐다.
이 분이 송월당(松月堂) 김조자다. 한국 가곡을 사랑하는 두 사람은 금세 친구가 됐다. 음악회를 마치고 공항철도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김조자는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뒤늦게 배우고 익힌 아마추어 소프라노다. 63세에 시작해 80세까지 노래했는데 모두 244곡을 암보로 불렀다. 엄청난 기억력이다. ‘공식 은퇴’ 했지만 요즘도 특별 요청이 있을 때는 간간히 무대에 선다.
한상완은 ‘갑장의 시와 노래’ 악보집을 선물하려고 이재석과 함께 김조자를 만나러 갔다.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며 누님은 칭찬과 격려를 해줬다. 그러면서 “이를 기념하는 음악회를 열면 어떻겠느냐”며 두 동생을 위해 흔쾌히 경비를 마련해줬다.
한상완, 이재석, 김조자. 올해 모두 83세다. 세 갑장의 아름다운 우정이 빚은 콘서트가 모두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타이틀은 ‘우정 서린 갑장의 시와 노래, 사계’. 지난 5월 23일 서울 을지로 푸르지오아트홀에서 열렸다. 지초와 난초의 만남처럼, 맑고도 고귀한 사귐을 뜻하는 지란지교(芝蘭之交) 콘서트였다.
앞뒤로 인쇄된 세 쪽짜리 프로그램북을 만들었는데 송월당 김조자가 그린 수채화 ‘자작나무’를 실었다. 마침 그림 속 자작나무도 갑장 세 사람처럼, 세 그루다. 자작나무는 줄기의 껍질이 종이처럼 하얗게 벗겨지고 얇아서, 이것으로 명함도 만들고 벗들끼리 우정의 글귀를 쓰기도 하는 낭만적인 나무다. 자작나무 껍질은 기름기가 많아 오랫동안 썩지 않으므로 신라시대 고분 속에서 자작나무 껍질에 글자와 그림을 새겨 놓은 것이 발견되기도 한다. 천마총의 천마도가 대표적이다. 세월 흘러도 변하지 않을 세 갑장의 우정을 대변하는 안성맞춤 나무인 셈이다.
“5월을 좋아합니다. 이 좋은 계절에 여러분들 앞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선물하게 돼 행복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어울리는 시를 내놓으라는 ‘협박’에 작품을 썼지만, 거기에 선율이 더해지니 시가 더욱 멋지게 됐습니다.”(한상완)
“사계절을 그린 연가곡은 한국에서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악보집을 내고 출판음악회를 여는 것뿐만 아니라 곧 노래를 녹음해 CD로 제작해 배포도 할 겁니다. 앞으로 여러 음악회에서 자주 불렀으면 좋겠네요.”(이재석)
두 사람의 인사말에 이어 소프라노 김성혜·김민지, 테너 김재민, 바리톤 송기창·임창한, 피아니스트 백설 등이 가곡집에 실려 있는 곡(12곡)을 중심으로 모두 15곡을 노래했다. 전곡 모두 한상완의 시에 이재석이 곡을 붙였다.
초록 물결 넘실대는 봄은 ‘편지를 보내며’ ‘푸른 물총새 되어’ ‘재회’ ‘백학봉의 연가’로 구성했다. 김성혜는 “연모하는 이에게 마음의 지도를 그려 보일 수 있어”(편지를 보내며) 설렜고, 김재민은 “봄 향기에 취하여 꽃 세상에 당도했다”(푸른 물총새 되어)고 고백했다.
여름은 ‘달맞이 꽃’ ‘보름밤 달 여행’ ‘조국의 강’ ‘바람결에 그려진 수채화’로 수놓았다. 임창한은 “이른 아침 아직도 어젯밤 달님과 환희로웠던 이별 아쉬워 가슴 채 못 여며 생긋거리는”(달맞이꽃) 노랑꽃을 그렸고, 김민지는 “한강 끝자락에 임진강과 한탄강과 개성 쪽 예성강도 함께 만나는 할아버지의 강”(조국의 강)으로 통일 염원을 간절하게 드러냈다.
수많은 전설이 태어나는 가을 시즌은 ‘저무는 가을 숲에서’ ‘늦가을 비와 낙엽의 향연’ ‘나목의 혼’ 세 곡이 흘렀다.
송기창의 목소리는 가을컬러를 닮았다. “그대는 보았는가/ 가을 청명한 햇살이/ 우거진 숲 사이로/ 투명한 요정이 되어/ 이리저리 줄무늬로/ 수놓는 것을”(저무는 가을 숲에서)이라고 노래할 땐 콘서트장에 심홍의 단풍잎이 흩날렸다.
김재민이 부른 ‘나목의 혼’은 백설의 드라마틱한 피아노 소리와 조화를 이뤄 관객의 귀를 사로잡았다. “낙엽은 나목의 혼”이고 “가을바람은 낙엽의 혼”이라는 점층법적 전개로 쓸쓸한 만추의 풍경을 잘 담아냈다.
한상완의 겨울은 찬바람 쌩쌩 불어 모든 것을 꽁꽁 얼게 만드는 시련의 계절이 아니다. 새 꿈을 잉태하는 계절이다. ‘꽃지 앞 바다’ ‘흡일제’ ‘연인의 동상’ ‘사랑은’이 그랬다.
“정월 대보름에 달을 삼키는 흡월은/ 이루지 못한 비애의 사랑/ 기어이 맺으려는 비원 서린/ 녹지 않는 빙산// 시월상달의 석양/ 강화 석모도 앞 바다에 저무는/ 선홍의 장엄한 태양을/ 삼키는 흡일은 사랑의 송가”
임창한이 부른 ‘흡일제(吸日祭)’는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우리 전래민속 중에 ‘흡월제(吸月祭)’라는 것이 있다. 달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달의 정기를 온몸으로 빨아들이는 행위다. 시인은 한해가 저물어 가는 때에, 강화도 서쪽섬 석모도에서 서해바다로 저무는 해를 들이마시며 새해의 희망을 잉태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냈다. 작명 센스가 반짝였다.
세상에 출생신고를 마친 15곡은 앞으로 여러 음악회에서 자주 불려질 것이다. 그때마다 1941년생 세 갑장 친구의 아름다운 우정을 되새기면, 한국 가곡의 아름다움에 더 마음을 빼앗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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