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이정은 객원기자(무용평론가)] 발코니 아래, 애타는 젊은 연인의 뜨거운 열정과 사랑을 이토록 잘 표현한 발레가 있을까? 영국 발레를 대표하는 케네스 맥밀란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8년여 만에 한국 무대에 올랐다.
세계적인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로미오와 줄리엣’은 많은 예술가에게 창작의 영감을 불어넣었다. 연극, 영화, 뮤지컬, 발레, 오페라 등 수많은 장르로 재탄생됐고 그 중 1965년에 초연한 맥밀란의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원전을 가장 잘 살려낸 발레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인물들의 내면심리를 발레 테크닉을 통해 드라마틱하게 풀어놓았고 현실적인 몸짓은 그들의 관계를 더욱 명확하게 보여준다. 발레는 무대와 관객의 거리가 분명하게 있다. 그러나 맥밀란 작품의 무용수들은 서로의 시선을 맞추며 미묘한 정적을 느끼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옮기기도 한다. 감정이 격해질 때에도 이를 표현하는 액션과 발레동작을 잘 결부시켜 놓았다.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특유의 현대성과 조화된 격정적이면서도 드라마틱한 발레 음악은 많은 안무가들의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수많은 버전을 탄생시키게 된다.
레오니드 라브로프스키의 첫 안무로 1940년 초연됐고, 이후 로열데니쉬발레단을 위해 프레데릭 애쉬튼이, 슈투트가르트 발레를 위해 존 크랑코가, 영국 로열발레단을 위해 케네스 맥밀란이 그들만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들어 세상에 내보였다.
이외에도 런던 페스티벌 10주년을 위해 루돌프 누레예프가 안무를 했고, 이 열기는 현대의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 버전의 작품까지 이어지고 있다.
유니버설발레단은 올해 창단 40주년 기념 공연으로 ‘코리아 이모션 情’ ‘더 발레리나’ ‘라 바야데르’ ‘호두까기 인형’ 등과 같이 약 12년전 한국 최초로 공연권을 획득했던 맥밀란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선택했다. 지난 5월 10일부터 12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모두 네 차례 공연됐다.
고전발레, 창작발레, 현대발레를 망라해 보여주는 라인업에 무럭무럭 성장해 온 유니버설의 다양한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우아하고 서정적인 움직임에 강점을 보이는 유니버설발레단이 드라마 발레의 대작인 맥밀란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어떻게 소화했는지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또 미국의 국립발레단인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의 주역 무용수인 서희와 다니엘 카마르고가 내한했고, 유니버설의 중심이자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강미선과 이현준, 그리고 신예 이유림과 콘스탄틴 노보셀로프가 주역에 캐스팅됐다. 연출가인 줄리 링컨의 내한으로 원작 고증에 심혈을 기울였다.
맥밀란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현실적인 묘사와 표현방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1막과 2막의 싸움장면에서 수많은 인파들이 만들어 내는 각자 다른 칼 소리는 음악과 어우러져 리드미컬하게 들렸다. 군무임에도 같은 움직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 그룹별로 다른 움직임을 해야 하고 자칫하면 지저분하게 보일 수 있는 장면임에도 칼 같은 박자로 보여주었다.
광장 장면의 경우도 많은 인파가 북적이는 광장을 표현하고자 수많은 무용수들이 각자의 스텝을 완벽한 타이밍에 수행해야 했다. 빡빡하게 구성된 안무에서 조금이라도 동선이 바뀌거나 타이밍이 달라지면 순식간에 군무의 자연스러운 느낌이 어그러지는데 유니버설 발레단은 연습을 통해 훌륭하게 만들어 보여주었다.
주역인 줄리엣의 강미선은 미성숙한 줄리엣의 모습부터 사랑을 알아가고 비극적 현실을 마주하게 된 줄리엣의 모습까지 풍부하게 표현했다. 발레동작뿐만 아니라 처음 로미오와 만났을 때 가만히 눈을 마주치며 호흡하던 숨이든지, 발코니 아래에서 헤어지며 아쉬운 발걸음이든지 동작이 아닌 몸짓에서 배어 나오는 그의 줄리엣은 극의 결말을 아는 관객의 입장에서 더욱 애절하게 보였다.
그리고 14세로 등장하는 줄리엣보다 나이가 더 많지만 그래도 아직은 고등학생 나이인 로미오를 이현준은 깔끔하게 소화했다. 그의 로미오를 보기 전에는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왕자 역할에서 벗어난 이현준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만큼 왕자 역할에 잘 맞는 무용수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1장의 로미오와 그의 친구들은 남고 앞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열기와 넘치는 체력, 약간의 다혈질적인 모습까지 담겨 있었다. 안무가 그렇게 짜여 있다 한들, 발레 동작이 아닌 그저 친구들끼리 뭉쳐 껄렁하게 걸어 다니는 모습까지 소화해 내는 것을 보고 캐릭터에 몰두한 무용수의 집중력에 감탄했다.
캐릭터 표현과 테크니컬한 동작의 연결까지 매끄럽게 수행했고 줄리엣을 바라보던 눈빛과 그를 향해 뻗던 손끝에 남은 애정 어린 표현까지 섬세하게 로미오의 모든 순간을 표현하고자 심혈을 기울인 것이 돋보였다.
로미오와 어울리며 젊음을 불태운 머큐쇼 역의 임선우는 꽤 어려운 리듬과 속도의 안무에도 흔들림 없이 동작을 수행하는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섬세한 라인을 뽐내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이고르 콘타레프가 수행한 벤볼리오 또한 개구지고 패기가 넘치는 역할이었다. 티볼트 역의 이동탁은 중압감이 느껴질 정도로 카리스마 있게 역할을 표현했으며, 테크닉의 수행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과 맞붙은 칼싸움에서도 역동적인 모습을 훌륭하게 보여줬다. 마담 캐플릿 역의 서혜원, 로잘린 역의 한상이, 패리스 역의 알렉산드르 세이트칼리예프는 우아한 당시 시대의 귀족적 모습을 춤과 마임에 잘 녹여냈다.
이번 작품, 이번 캐스팅에서는 춤이 많지 않아 아쉬웠고 다음 작품에서 마음껏 춤추는 모습을 보고 싶다. 상대적으로 춤추는 시간이 많고 자칫하면 어두워질 수 있는 전반의 분위기를 거리의 여인들 세 명이 끌어올렸다. 아나스타샤 데이아노바, 이가영, 김영경은 광장 장면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과감한 춤과 표현에서 그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번 공연의 연주를 맡은 지중배가 지휘한 코리아쿱오케스트라는 수많은 발레공연의 연주를 진행해왔고 필자 또한 많은 공연을 감상해왔기에 이번 공연의 연주에 더욱 의문이 생겼다.
맥밀란의 안무 특성상 춤과 연기가 많이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발레 테크닉 또한 연기와 마임처럼 보이게 연출된 부분들도 있는데 무용수 입장에서 수행하기 매우 어려운 테크닉들과 컨트롤이 어려운 동작들이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음악의 템포가 빠르다면 무용수는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동작의 완성도를 채우기 못하거나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동작을 넘어가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맥밀란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예전에도 유니버설발레단의 공연으로도, 국립발레단의 공연으로도, 영국 로열발레단의 공연으로도 보았지만 이번 공연은 유독 서둘러 연주하는 느낌이 강했다. 단순히 연주하면서 빨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대에 오르기 전 발레단과 오케스트라가 맞춰보는 과정에서 템포를 빠르게 가져간 것 같은데 이점이 이번 공연에서 유일하게 아쉬운 점으로 남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설명하기 참 어려운 것이라 생각하지만 누군가 물어본다면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라 할 것이다. 상황, 관계 모두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한 사람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양날의 검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의 어린 연인에겐 서로가 행복이었지만 동시에 서로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시대와 나라를 불문하고 사람과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곳 어디엔가 사랑이 싹틀 것이고 또 어디선가는 죽음이 있을 것이다. 자연의 섭리대로 흘러가는 이 상황이 유지된다면 명작 ‘로미오와 줄리엣’은 끝없이 다른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지만 그 속에 담긴 사랑은 영원할 것이다.
/classicbiz@classicbiz.kr
저작권자 ⓒ ClassicBiz,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