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1. 3막 중간쯤 ‘백작부인 나정원’이 등장했다. 그는 알마비바 백작을 골탕 먹이기 위해 하녀 수잔나와 비밀작전을 짰다. 서로 옷을 바꿔 입고 백작부인은 수잔나인 척, 수잔나는 백작부인인 척하면서 속일 계략을 짠 것. 여자만 보면 군침을 흘리는 남편의 못된 바람기를 혼내주려는 묘책이다.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했다. 백작부인은 ‘E Susana non vien(아니, 수잔나는 어디로 갔지)’을 부른다.
“아니, 수잔나는 어디로 갔지. 궁금해 죽겠는데 잘 되고 있는 거겠지. 이제 나는 수잔나의 옷을 바꿔 입어야지. 그건 나쁜 짓이 아니잖아. 어둠의 힘을 빌려 백작을 골탕 먹여야지. 오 하느님, 못된 남편 때문에 이런 고통에 처하다니. 불신과 분노의 이 마음, 신기하기도 하지. 나에 대한 첫사랑을 잊고, 나를 배반하고 하녀를 좇다니.”
살짝 분노를 머금은 목소리다. 이제 곧 결혼을 앞둔 수잔나에게도 흑심을 드러내다니. 바람둥이 남편 때문에 겪은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는다. 뜨겁게 사랑했던 옛날이 떠오른다. 지난날의 아름다웠던 사랑을 추억하는 가슴 아픈 선율이 흐른다. ‘Dove sono I bei momenti(아름다운 순간은 사라지고)’다. 비록 나쁜 남자지만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이라고 고백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절절하다.
“그 달콤함과 행복으로 가득 찼던 순간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 세치 혀의 속임수로 꾸며졌던 귀한 맹세들은 어디로 사려졌을까요. 아무리 눈물 짓고 슬퍼해보아도, 그의 마음은 이미 변해버렸군요. 아름다운 추억은 내게서 떠나지 않았는데, 행복과 사랑은 어디로 가버렸을까요. 아, 나의 정열과 변함없는 사랑이 그의 배반한 마음을 돌이켜 주기만을 바랍니다.”
발코니 밑에서 아름다운 세레나데를 불러주던 그 다정한 남자,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사랑을 쟁취했던 그 멋진 남자는 어디로 간 걸까요? 세월이 사랑을 이토록 심하게 바꾸어 놓았네요. 소프라노 나정원은 부부들이라면 몇 번 쯤 겪었을, 어쩌면 지금 현재진행형으로 겪고 있을 고뇌를 쏟아냈다. 물기 머금은 목소리에 깊은 슬픔이 아로새겨져 있다. 눈물겨운 순애보다. 백작부인의 한숨이 가슴으로 들어와 박힌다.
#2. 4막 초반부. 백작부인으로 변장한 ‘수잔나 윤현정’이 어두컴컴한 어둠 속에서 ‘Giunse alfin il momento(드디어 기다리던 때가 왔네)’를 부른다. 피가로가 정원 어딘가에 숨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부르는 질투유발송이다.
“드디어 기다리던 때가 됐구나. 주저하지도 않고 나의 사랑의 품 안에서 즐기리. 걱정 근심 떠나라. 그들이 내 사랑 방해하지 못하도록. 모든 것이 내 사랑을 도와주네. 땅이여 하늘이여 말해 주오, 내 사랑을. 고통스럽고도 은밀한 밤이여”
짧고 귀여운 노래에 이어 솜사탕처럼 달콤한 ‘Deh vieni, non tardar(어서 오세요, 내 사랑)’가 흘렀다. 한마디로 고막여친이다. 토라졌던 마음도 눈 녹듯 사라지는 마법송이다.
“그대, 내 사랑이여, 머뭇대지 말고 어서 오세요. 사랑이 그대를 기다리는 곳으로! 하늘에 달빛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세상이 조용히 잠든 밤에 오세요. 시냇물이 종알대고 새벽이 다가오면 나의 마음은 신선해진답니다. 나의 기쁨과 사랑이여, 어서 오세요. 오세요, 내 사랑이여! 장미 넝쿨 속으로. 그대의 이마에 장미를 씌워 주겠습니다.”
일부러 백작부인 뒤에 숨어 큰 소리로 설레는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얄미운 수잔나. 소프라노 윤현정의 여우짓이 예쁘다. 수잔나의 목소리를 금방 알아챈 피가로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사방이 어두워 수잔나가 백작부인으로 변장한 것을 모르니, 백작을 홀리기 위해 부르는 러브송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다.
브라바! 브라바! 소프라노 나정원과 윤현정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서 물오른 연기와 노래 실력을 뽐냈다. 두 사람은 베세토오페라단이 무대에 올린 ‘피가로의 결혼’에서 백작부인과 수잔나 역할을 맡아 미션 클리어했다. 지난 6월 21일과 22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한 ‘피가로의 결혼’은 2024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참가작이다. 22일 공연을 감상했다.
‘피가로의 결혼’은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음악과 재치 있는 대사가 어우러져 오페라 애호가와 초보자 모두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작품 중 하나다. 초야권, 바람둥이 백작, 일편단심 백작부인, 세상 물정 모르는 피가로, 오지랖 넓은 수잔나, 몰락해가는 봉건시대, 귀족에 대한 조롱, 시민의식의 발아 등 흥행요소를 두루 갖췄다. 모차르트가 단 6주 만에 작곡했다. 알마비바 백작의 하인인 피가로와 백작부인의 시녀 수잔나의 결혼을 앞두고 벌어지는 유쾌한 소동을 다루고 있다.
오래된 히트작이다 보니 현대에 와서는 각종 실험이 가미되는 연출이 많지만 이번 ‘피가로의 결혼’은 오리지널 구성을 충실히 보여줘 친근함을 안겨줬다. 유쾌한 작품이다 보니 성악가들의 연기력이 필수인데, 배우들을 데려다 놨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멋지게 각자의 캐릭터를 소화했다. 100%를 넘어 120%의 연기 내공을 자랑했다.
공연을 앞두고 베세토오페라단 강화자 단장(예술총감독)은 “재미있는 작품을 준비했다. 누가 주연이고 누가 조연인지 구분이 없다. 피가로, 수잔나, 백작부인, 알마비바 백작, 케루비노 등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특이한 오페라다. 신인 오디션 공모를 통해 뉴페이스를 대거 발탁한 점도 감상 포인트다”라고 말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성악가들은 각자의 역할을 대표하는 시그니처 아리아로 존재감을 드러냈고, 중창 파트에서는 눈빛만 봐도 통하는 케미를 자랑했다. 나정원은 ‘E Susana non vien...Dove sono I bei momenti’에서 뿐만 아니라 2막에서도 애절한 ‘Porgi amor(사랑을 주소서)’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끊임없이 한눈을 파는 남편 때문에 병이 날 지경이지만 끝까지 기품을 유지하는 우아한 백작부인을 완벽하게 살려냈다.
윤현정 또한 ‘Giunse alfin il momento...Deh vieni non tardar’는 물론이고 주요 등장인물들과 다양한 이중창을 소화하며 상큼 발랄한 수잔나의 매력을 마음껏 발산했다.
나정원과 윤현정이 부른 편지 이중창 ‘Che soave zeffiretto(저녁 산들바람은 부드럽게)’도 귀를 사로잡았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 삽입돼 더 유명해진 곡이다.
피가로를 연기한 바리톤 최병혁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무대를 누볐다. 특히 1막 아리아 ‘Non piú andrai(나비야 날지 못하리)’로 관객의 환호를 이끌어 냈다. 골칫거리인 소년 시종 케루비노가 성가셔 백작은 그를 군대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이에 케루비노를 나비라고 칭하고 피가로가 비아냥대며 부르는 노래다.
알마비바 백작을 맡은 바리톤 박경준은 큰 덩치로 무대의 무게감을 높이며 중심을 잡아줬다. 3막에서 보여준 ‘Hai gia vinta la causa(벌써 다 이긴 셈이다)’는 수잔나를 쟁취할 기쁨에 겨워 부르는 노래다.
백작부인을 짝사랑하는 사춘기 소년 케루비노를 맡은 메조소프라노 송윤진은 1막 ‘Non so piu cosa son(난 몰라,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와 2막 ‘Voi che sapete(사랑이 무엇인지 아시나요)’를 매혹적으로 불렀다. 사랑하게 만드는 귀여운 캐릭터다.
이밖에도 베이스 김지섭(바르톨로 역), 메조소프라노 안세원(마르첼리나 역), 테너 석승권(바실리오·돈 쿠르치오 역), 바리톤 유재언(안토니오 역), 소프라노 이주리(바르바리나 역)도 극의 활력을 불어 넣은 감초연기를 보여줬다.
김지영 연출은 영리하게 작품을 이끌어 갔다. 서곡을 연주하는 동안, 백작과 그에 대항하는 하인 5명을 동시에 무대에 등장시켜 극의 대립구조를 극대화했다. 몰락해가는 백작의 모습과 이를 비웃는 시민들의 모습을 대비시키는 센스가 뛰어났다. 또한 여자 뒤를 졸졸 따라 다니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넣어, 치마만 두르면 무조건 돌진하는 백작의 바람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세트에도 상징성을 부여했다. 피가로와 수잔나의 신혼방을 배경으로 한 1막에서는 귀족을 바라보는 비판적인 시선을 대변하듯 건물의 기울기를 사선으로 비스듬하게 디자인했다. 백작부인과 수잔나가 서로 옷을 바꿔 입고 변장하는 4막에서는 땅에 있어야 할 나무를 뿌리째 하늘에 매달아 신분의 뒤바뀜을 표현했다. 이후 해피엔딩으로 극이 마무리 될 때는 모두 동등한 신분이 됐음을 암시하며 비로소 나무도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무용수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3막 백작부인의 애절한 아리아가 흐를 때 두 무용수(유승아·이동욱)가 멋진 동작을 보여줘 눈길을 사로잡았다. 노래의 시각화! 번뜩이는 연출이다.
곳곳에 담겨있는 웃음 유발 포인트는 깨알재미를 선사했다. 케루비노와 백작이 차례대로 소파 뒤에 숨어 뜻하지 않은 어색한 만남이 생기고(1막), 백작부인과 수잔나가 케루비노를 여자로 변장시키거나, 옷장 속에 숨어 있는 케루비노가 유리창을 넘어 도망치는 장면(2막)에서 웃음이 터졌다. 3막에서 바르톨로와 마르첼리나가 피가로의 부모라는 게 밝혀지면서 세 사람이 서로 팔뚝을 치켜들며 한 핏줄임을 확인하는 과정은 압권이었다. ‘개콘’의 한 장면이었다.
유럽을 비롯한 세계무대에서 활동하며 체코프라하시립오페라단의 상임 지휘자를 역임한 지리 미쿨라는 섬세하고 감성적 지휘를 선보였다. 뛰어난 음악해석과 감각으로 오페라의 수준을 한층 높인 음악총감독 권용진의 활약도 돋보였다. 연주와 합창은 소리얼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위너오페라합창단이 힘을 보탰고, 김지은·김순기·장지선·김송원이 음악코치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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