얍 판 츠베덴 서울시향 음악감독이 신년음악회가 시작되기 전에 무안공항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을 추모하고 위로하기 위해 엘가의 ‘님로드’를 연주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2주 전에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희생자와 유가족을 추모하기 위해 연주하겠습니다. 곡이 끝난 뒤에는 박수를 치지 마시고 잠시 침묵을 지켜주세요.”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추모로 새해를 시작했다. 지난 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신년 음악회에서 무안공항 참사 희생자를 애도하는 특별한 시간이 준비됐다.

무거운 걸음으로 무대로 걸어 나온 얍 판 츠베덴 서울시향 음악감독은 직접 마이크를 잡은 뒤 추모곡을 연주하겠다고 공지했다. 그리고는 에드워드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중 아홉 번째 곡인 ‘님로드’를 들려줬다.

비교적 귀에 익숙한 곡이다. 다이애나 왕세자빈,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 등에서도 연주된 추모곡이다. 얍 판 츠베덴과 서울시향은 ‘님로드’ 특유의 처연한 악상을 섬세하게 그려가며 슬픔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숙연했다. 연주를 마치자 청중들은 침묵을 유지하며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얍 판 츠베덴 서울시향 음악감독이 신년음악회에서 멘델스존의 교향곡 4번 ‘이탈리아’를 지휘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추모로 시작한 신년음악회는 ‘희망’으로 본격적인 공연을 이어갔다. 다음에 연주한 작품은 펠릭스 멘델스존의 교향곡 4번 ‘이탈리아’. 판 츠베덴 감독의 손끝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활기와 역동성이 뿜어져 나오며 저마다 여행했던 이탈리아 도시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음악을 타고 로마, 밀라노, 피렌체, 시칠리아, 베니스 등의 풍경이 넘실댔다.

멘델스존이 이탈리아 풍광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작곡한 만큼 따뜻한 햇살, 역동적인 파도, 풍요로운 포도밭 등이 얼마나 음향적으로 잘 묘사할 수 있느냐가 관건인데, 판 츠베덴은 유연한 지휘로 고유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담아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서현이 서울시향 신년음악회에서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바이올리니스트 김서현이 서울시향 신년음악회에서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바이올리니스트 김서현이 서울시향 신년음악회에서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이날 2000여명의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주인공은 협연자인 바이올리니스트 김서현이다. 그는 이자이 국제 음악 콩쿠르(2021), 레오니드 코간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2021), 토머스 앤 이본 쿠퍼 국제 콩쿠르(2022) 등에서 1위 자리에 오르며 클래식 음악계를 놀라게 했다.

여세를 몰아 2023년 만 14세의 나이로 스위스 티보르 버르거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했다. 이 우승으로 1753년에 제작된 과다니니 바이올린을 ‘득템’했다. 과다니니는 스트라디바리우스, 과르니에리 델 제수와 함께 ‘바이올린계의 3대 명기(名器)’로 꼽힌다.

김서현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제 연주를 보고 티보르 버르거 가문에서 먼저 과다니니를 후원해주고 싶다고 연락해왔다”라며 “언제까지 쓰면 될지 물어보니 ‘애즈 롱 애즈 유 원트’(as long as you want·원하는 만큼)라고 바로 말해 무척 놀랐다”고 말했다. 유럽의 유서 깊은 가문에서 명기를 어린 학생에게 무기한으로 빌려주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그가 얼마나 재능이 출중한지 체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서현이 서울시향 신년음악회에서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바이올리니스트 김서현이 서울시향 신년음악회에서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 뒤 얍 판 츠베덴 음악감독과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이제 막 16세가 된 김서현은 반짝이는 은색 드레스를 입고 뒤로 머리를 질끈 묶은 채 등장했다. 연주한 곡은 장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고음 부분에서 촘촘하게 선율을 표현하는 능력이 돋보였고 저음으로 이어지는 연결도 부드러웠다. 무대를 쥐락펴락하는 솔리스트로 성장할 수 있는 ‘싹’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관객들은 김서현의 연주에 엄청난 환호로 응원을 보냈고, 김서현은 앙코르로 외젠 이자이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2번 중 ‘복수의 여신들’을 선사했다.

김서현은 앞으로의 목표도 밝혔다. 그는 “작곡가의 의도와 연주자의 색깔을 가장 진솔하게 표현해내는 음악가가 되고 싶다”며 “지금은 별 다섯 개 중에 하나만 간신히 채운 연주자라고 생각한다”고 겸손함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나중엔 베를린 필하모닉과 협연도 해보고 싶고, 브람스의 소나타 전곡 음반도 내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정재왈 신임 서울시향 대표는 “김서현이라는 연주자를 발굴해 서울시향을 통해 많이 알려질 기회를 만든 것처럼 실력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연주자들을 발굴해 무대에 올리겠다”고 말했다.

끝으로 서울시향은 빈 필하모닉 신년 음악회의 단골 레퍼토리로도 유명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 서곡과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연주하며 새해의 희망과 활기를 불어넣었다.

<백브리핑1> 내란·참사 영향으로 프로그램 바꾼 신년음악회

클래식 음악계도 12·3내란과 12·29무안참사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신년음악회의 프로그램이 일부 바뀌는 등 위로와 추모의 분위기가 역력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의전당이 기획해 국립심포니가 연주한 신년음악회(1월 9일)는일부 프로그램을 교체했다. 원래 준비한 첫 곡은 존 윌리엄스의 ‘올림픽 팡파르와 주제’. 금관에 타악기가 가세해 분위기를 한껏 띄우는 곡인데, 요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라 프로그램에서 아예 제외했다. 2부 첫 곡으로 들려준 장 시벨리우스의 ‘슬픈 왈츠’는 시의적절했다.

이에 앞서 예술의전당은 지난달 제야음악회(12월 31일)에서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근심·걱정 없이 폴카’를 빼고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가운데 ‘님로드’를 연주했다. 타이타닉호 침몰 희생자 추모를 위해 영국 작곡가 엘가의 지휘로 연주된 이후 추모곡으로 자주 연주되는 4~5분 안팎의 차분한 곡이다.

금호아트홀은 아레테 콰르텟이 연주한 하이든의 ‘십자가 위 예수의 마지막 일곱 말씀’으로 신년음악회(1월 9일)를 열었다. 불안과 공포, 절망에 휩싸인 사람의 슬픔과 용서를 그린 내용이라 추모 분위기와 크게 어긋나지 않아 그대로 연주했다. 9곡으로 구성된 이 곡은 원래 관현악곡이었으나 하이든 스스로 현악사중주와 합창곡으로도 편곡했다.

<백브리핑2> 한재민·이현정 등 10대 신동 연주자들 신년음악회 ‘장악’

한재민(첼로), 김서현(바이올린), 이현정(바이올린) 등 10대 신동 연주자들이 서울시립교향악단, KBS교향악단,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올해 국내 주요 악단의 신년음악회 무대를 장악했다. 출중한 실력도 실력이지만 ‘될성부른 떡잎’을 키워주려는 오케스트라들의 과감한 선택도 한몫했다.

서울시향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개최한 신년음악회(1월 10일)에서 2008년생 바이올리니스트 김서현과 협연했다. 김서현은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해 관객의 박수와 환호를 이끌어 냈다.

2006년생 첼리스트 한재민은 ‘더블 캐스팅’됐다.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열린 경기필 신년음악회(1월 19일)와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KBS교향악단 새해 첫 정기공연(1월 24일) 무대에 잇달아 섰다. 경기필과는 생상스의 ‘첼로 협주곡 1번’, KBS교향악단과는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협주곡’을 들려줬다. KBS교향악단과의 협연은 이스라엘 출신의 거장 엘리아후 인발이 지휘봉을 들었다. 인발은 올해 89세로 한재민과의 나이차가 무려 70세다.

한재민은 2021년 제오르제 에네스쿠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로 우승하며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2022년 윤이상 국제 콩쿠르도 거머쥐며 확실하게 존재감을 뽐냈다.

2010년생 바이올리니스트 이현정은 마포문화재단이 마포아트센터 아트홀맥에서 개최한 신년음악회(1월 18일)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김광현 전 원주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가 지휘한 KBS교향악단과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다.

이현정은 지난해 9월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에서 준우승하며 역대 바이올린 부문 최연소 수상자 기록을 세웠다. 당시 청중상, 지정곡 최고연주상도 휩쓸었다.

/eunki@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