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 작가가 작업실에서 소형방역기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호작가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색깔이 참 곱네. 마음도 왠지 편안해지고.” 얼마 전 경기도 파주 헤이리예술마을 큐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전시를 방문한 사람들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캔버스 한가운데에 자리한 빨강, 파랑, 노랑의 둥근 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중심부의 짙은 물감이 가장자리로 옅게 번지면서 그라데이션 효과를 주는 작품들이다. 보기만 했을 뿐인데, 뾰족했던 마음이 원만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바뀐다.

이호 작가의 작품은 이처럼 힐링을 준다. ‘컬러 오브 마인드(Color of Mind)’라는 타이틀로 김선휘 작가와 함께 2인전(1월 18일~2월 16일)을 개최했다. 두 사람 모두 청강대학교 만화스쿨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색채라는 큰 주제를 각자의 스타일로 해석했다.

이호 작가는 동그란 원만 고집하지 않는다. 캔버스 그 자체를 네모 형태 삼아 아래에서 위로, 또는 위에서 아래로 스며들 듯 그린 작품도 여럿이다. 하얀 스펀지가 물감을 듬뿍 머금은 모습을 닮았다. 그래도 원이 압도적으로 많다. 전시를 마친 이호 작가와 20일 전화 통화를 했다.

“원은 가장 기본입니다. 조형적으로 완전한 비율을 갖추고 있어요. 제가 주목하는 것은 원의 중심을 벗어나 주변부로 자연스럽게 색칠되는 부분입니다. 화면을 꽉 채우지 않아요. 그래서 관람객에게 여유와 사유를 줍니다. 마치 숨 쉴 곳을 선물한다고 할까요. 편안한 안정감이 느껴지죠.”

이호 작가는 소형방역기에 물감을 넣어 뿌리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호작가 제공
이호 작가는 소형방역기에 물감을 넣어 뿌리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호작가 제공


이호라는 이름은 필명이다. 본명은 양승민. 양승민 시절엔 나름 잘 나가는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했다. 주요 고객은 엔터테인먼트 회사들. 가수들의 앨범 커버와 포스터 등 다양한 비주얼 아트워크를 제작했다.

대표작이 샤이니 종현의 두 번째 소품집, AOMG 그레이의 ‘하기나 해' 싱글 앨범 커버, 로꼬의 ‘남아있어’ 싱글 음반 커버, SM 레드벨벳의 세 번째 콘서트 포스터다. 신세계 SSG 옥외광고 등 여러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주로 리얼리즘적 회화 접근법과 표현주의적 기법을 바탕으로 독창적 색채와 거친 붓 터치로 풀어냈다. 추상미술로 갈아타게 된 결정적 전환점은 팬데믹이었다.

“모든 것이 단절된 시간이었잖아요. 재택 근무가 일상화됐고, 설령 사무실을 나간다 해도 접촉을 최대한 줄이는 게 미덕이었습니다. 당연하게 생각됐던 공원 산책하기, 사람들과 커피 한잔하며 이야기하기 등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새롭게 알게 됐습니다. ‘코로나 블루’ ‘코로나 레드’ ‘코로나 블랙’ ‘코로나 포비아’와 같은 신조어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 위기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결단을 내렸다. 구상에서 추상으로 전환했다. 그는 “평면 회화에서 사유와 여유를 여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는 잠시 호흡을 제공하는 것 같다”며 “관람객과 창작자 모두에게 그림 속 여백은 새로운 사고와 시각적 환기를 불어넣는 일종의 공간이 된다”고 밝혔다.

이호 작가는 소형방역기에 물감을 넣어 뿌리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호작가 제공
이호 작가는 소형방역기에 물감을 넣어 뿌리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호작가 제공


이호 작가는 독특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린다. 코로나 시절에 사용했던 소형 방역기를 새로운 창작 도구로 삼았다. 코로나 덕분에 자신만의 시그니처를 개발한 셈이니, ‘생큐 코로나’다.

“쓸모없어진 분무기는 평면에 색을 그리는데 유용합니다. 이제 소독 용액 대신 물과 물감을 희석해 캔버스 위에 뿌립니다. 색칠을 하는 행위는 방역·소독의 행위와 똑같은 효과를 줍니다. 사람들의 심리와 정서를 달래주죠.”

작업할 때는 보통 소형 방역기를 10대 넘게 쓴다. 각각 다른 물감이 담겨있다. 농도 조절에 애를 먹는다. 물감을 많이 풀면 노즐로 잘 빠져 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아주 묽게 탄다. 캔버스 위에 색깔 하나를 제대로 내기 위해 100번 정도를 뿌린다. 붓질로 따지자면 100번 정도 덧칠하는 것이다. 집중력이 필요한 고단한 과정이다. 노하우도 터득했다.

그는 “캔버스의 천이 물감을 잘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안료가 잘 안착되고 보존될 수 있도록 하는 재료를 뿌려준다”며 “마지막엔 소금물로 마무리한다. 색깔이 훨씬 더 잘나온다”고 비법을 공개했다.

구상미술·상업미술에서 추상미술로 갈아타니 당장 돈 벌이는 어렵다. 하지만 예술하는 마음 덕에 배가 부르니 결국 남는 장사 아닌가. “합정동 근처 작업실에서 동료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돌아오는 여름에 이들과 단체전을 열 계획입니다. 마음의 위안과 위로, 이게 그림의 힘 아닌가요.”

/park72@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