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부흐빈더의 ‘월광 마법’...귓전에서 “사랑해 사랑해”로 자동번역돼 들렸다

75세 피아니스트 ‘베토벤 소나타 리사이틀’ 감동 연주

민은기 기자 승인 2021.10.20 15:11 | 최종 수정 2023.03.20 10:39 의견 0
‘베토벤 스페셜리스트’로 통하는 루돌프 부흐빈더가 19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독주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빈체로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비록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발걸음은 느릿느릿했지만 손가락은 여전히 활력이 넘쳤다. 펄떡펄떡 뛰는 물고기였다. 싱싱했다. 1946년생. ‘베토벤 스페셜리스트’로 통하는 올해 75세의 피아니스트는 첫 곡으로 14번 ‘월광’을 선택했다. 이 곡을 가장 좋아하는 한국팬을 위한 배려였을까.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고 객석은 숨조차 쉬지 못했다. 머리털을 곤두세운 채 집중했다.

허리를 곧추 세우고 1악장을 터치하자 영원한 사랑의 맹세가 흘렀다. 건반을 누를 때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속삭임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해머가 줄을 두드려 내는 소리지만, 우리 귀를 통과하는 순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로 자동 번역되는 마법이 펼쳐졌다. 그렇게 모두가 줄리에타 귀차르디가 되어 달콤함을 즐겼다.

2악장에선 몸을 약간 앞쪽으로 숙이고 어깨를 움찔하며 추임새를 넣는 여유를 보였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3악장에서는 공중으로 펄펄 날아다녔다. 청춘의 분노와 눈물이 한곳으로 모여 커다란 천둥소리로 변했다.

베토벤 자신은 ‘환상곡풍의 소나타’라고 이름 붙였지만, 후세 사람들은 렐슈타프의 상상력에서 나온 ‘루체른 호수의 달빛’을 더 좋아한다. 19일 밤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로 이 달빛이 내려왔다.

‘거장’ 루돌프 부흐빈더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5곡을 선사하는 리사이틀은 달빛 물결 위로 감동까지 넘실댔다. 원래 지난해 예정됐던 독주회였지만 코로나19 때문에 올해로 연기됐다.

‘베토벤 스페셜리스트’로 통하는 루돌프 부흐빈더가 19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독주회에서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빈체로


오랜만에 합창석까지 꽉 찼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부흐빈더를 직관하지 못할 것이라는 조바심이 솔드아웃을 만들었다. 온몸으로 베토벤을 받아들이려는 듯 관객들은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않은 채 공연 내내 ‘자발적 얼음’이 됐다. “베토벤은 평생 연주해도 절대 질리지 않는다”는 그는 정성을 다해 엑설런트 연주로 화답했다.

‘월광’을 마친 뒤 잠시 퇴장하는가 싶더니 물 한잔도 먹지 않고 곧바로 들어와 2개 악장으로 이루어진 20번을 들려줬다. 경쾌하고 발랄하고 상큼했다. 5월 캠퍼스를 누비는 프레시맨이 연상됐다.

음악의 호흡을 깨뜨리지 않으려는 듯, 관객에게 인사를 한 뒤 바로 다시 자리에 앉아 8번 ‘비창’을 연주한다. ‘에너자이저 부흐빈더’다. 체력이 장난이 아니다. 젊은 베토벤이 앞으로 짊어져야 할 인생의 고난을 예상하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각오와 의지가 느껴진다. 2악장에서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슬픔과 아련함이 오버랩되며 살짝 콧등을 찡하게 만들었다.

인터미션 후 계속된 10번은 물 위에 반짝이는 햇빛들의 운동회(1악장), 딱딱 끊어지는 음들의 재미있고 익살스러운 행진(2악장), 나른한 오후를 깨우는 시원한 사이다(3악장)가 떠올랐다.

역시 논스톱으로 이어진 21번 ‘발트슈타인’에서는 88개의 건반이 확장할 수 있는 무한한 상상력과 웅대한 세계를 고스란히 표현해 냈다. 1악장은 ‘속사포 랩’이었다. 건반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를 종횡무진 누비며 기교의 끝판을 보여줬다.

음과 음 사이의 담백한 여백을 담은 짧은 2악장을 거쳐 3악장에서는 고도의 스킬인 옥타브, 이중트릴, 글리산도 등 건반 위에서 펼칠 수 있는 테크닉을 대방출하면서 화려한 피날레를 향해 질주했다. 엄청난 카타르시스가 쏟아졌다.

앙코르에서는 ‘친절한 부흐빈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줬다. 모두 2곡을 연주했는데, 피아노에 앞에 앉더니 자연스럽게 “17번(템페스트) 3악장을 연주하겠다” “이번엔 18번(사냥) 2악장이다”라며 직접 곡명을 알려주는 센스를 발휘했다.

한편 부흐빈더는 19일에 이어 20일에도 같은 장소(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연다. 프로그램은 다르다. 소나타 대신에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념해 발매한 ‘디아벨리 프로젝트(2020)’ 앨범에 수록된 곡을 들려준다.

‘베토벤 스페셜리스트’로 통하는 루돌프 부흐빈더가 19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독주회에서 연주하고 있다. Ⓒ빈체로


<에필로그 #1> 베토벤은 모두 32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남겼다. 부흐빈더는 소나타 32곡을 모두 세 번 녹음했다. 엄청난 대기록이다. 흔히들 3대 소나타로 ‘비창(8번)’ ‘월광(14번)’ ‘열정(23번)’을 꼽는다. 한국팬들도 일반적으로 이 3곡을 중심으로 감상하는데, 이번에 부흐빈더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10번과 20번을 프로그램에 넣었다.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으리라. 이제 한번 들어봤으니 앞으로 10번과 20번의 찐팬이 되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음원을 다운 받았다. 가장 최근에 발표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녹음 앨범이다.

<에필로그 #2> ‘46년생’ 부흐빈더의 콘서트가 열린 날, 세계적인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에디타 그루베로바의 별세 소식이 들렸다. 그도 ‘46년생’이다.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루치아는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고음의 끝판을 보여준 성악가다. 두 사람이 같은 나이 임을 생각하면 디바가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난 것이 아쉽다. 그래서 부흐빈더의 독주회는 값지다. 앞으로 더 오랫동안 그의 음악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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